비범하고 전지전능한 영웅, 셜록 홈즈는 아니다

[장르소설의 작가들 ③] 하드보일드의 대가, 레이먼드 챈들러

등록 2015.12.09 15:18수정 2015.12.09 15:20
1
원고료로 응원
장르소설, 그중에서도 범죄소설의 역사를 장식했던 수많은 작가들이 있습니다. 그 작가들을 대표작품 위주로 한 명씩 소개하는 기사입니다. 주로 영미권의 작가들을 다룰 예정입니다. - 기자 말

범죄소설의 역사, 그중에서도 하드보일드(Hard-boiled, 문학이나 영화 등 예술 텍스트에서 비정하고 건조한 세계의 일면을 미니멀한 스타일로 담아내는 제반 수법들을 지칭 - 네이버 지식백과)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작가가 바로 레이먼드 챈들러(1888~1959)다. 그가 창조한 탐정 필립 말로우는 아마도 셜록 홈즈 다음으로 후대의 탐정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사색하는 탐정이 아닌 행동하는 탐정을 만들어 냈다.


하드보일드의 탄생은 어쩌면 시대의 변화와 연관된 일이다. 범죄소설의 역사는 범죄 자체의 역사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발달하면서 개인적인 범죄 못지않게, 조직범죄가 증가하게 된다. 이런 조직을 상대하기 위해서 발로 뛰어다니고 몸싸움을 벌이는 탐정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응접실에 있던 탐정은 이제 거리로 뛰쳐나온다. 단서들을 분석해서 논리적인 추리를 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용의자들을 찾아다니는 탐정이 등장한 것이다. 때로는 거침없이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자신의 에세이 <간단한 살인기술>에서 이런 인물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비열한 거리를 걸어가야만 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비열하지도 타락하지도 두려움에 떨지도 않는다. 이런 종류의 소설에 나오는 탐정은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영웅이며 전지전능하다. 그는 완벽한 동시에 범상해야 하고, 비범하기조차 해야 한다."

이런 묘사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탐정이 바로 필립 말로우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1939년에 발표한 <깊은 잠>에서 필립 말로우를 창조한다. 대공황의 여파는 서서히 가라앉았고, 1920년대를 관통했던 금주법도 끝난 시기다.


그래서 필립 말로우도 작품 속에서 자유롭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레이먼드 챈들러도 술을 즐기는 작가였다). 하지만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젊은 여자와 농담을 주고 받을 때도 있지만 그 농담은 냉소의 수준일 뿐이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기가 죽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드보일드의 대가, 레이먼드 챈들러

a

<깊은 잠> 겉표지 ⓒ 나무그늘

필립 말로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뛰어다닌다. 그에게는 혼자서 살고 있는 집과 역시 혼자서 근무하는 작은 사무실이 전부다. 비서도 없고 동료도 없다.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경찰들도 없다.

작품 속에서 경찰들은 필립 말로우를 삐딱하게 바라보기만 한다. 말로우는 경찰에게 두들겨 맞기도 하고 강제로 구치소에 갇히기도 한다. 그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한편으로는 범죄자들을 상대하고, 돌아서서는 경찰조직에게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일을 반복한다.

<깊은 잠>에서 말로우는 33세의 노총각으로 등장한다. 손님에게 사건을 의뢰받고 그 수고비로 먹고사는 전형적인 사립탐정이다. 하루일당은 25달러고 여기에 각종 경비가 추가된다. 하루 25달러는 결코 많은 비용이 아니다. 자신의 사무실과 집을 유지하고, 담배와 위스키를 구입하다보면 별로 남는 것도 없다. 사건이 잘 해결되면 특별보너스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크게 기대할 만한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말로우를 찾아오는 의뢰인들은 끊이지 않는다. 말로우는 자신의 원칙을 잃지 않는다. 그 원칙은 바로 '정직한 일만 한다', '의뢰인을 보호한다'라는 것이다. 사건을 위해 거리를 뛰어다니고 때로는 얻어터지면서도 말로우는 이 두 가지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우가 가는 길은 항상 험한 가시밭길이었을 것이다.

의뢰인이 가져오는 사건들은 대부분 처음에는 사소해 보이는 일이다. 소식이 끊긴 가족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의뢰인, 도둑맞은 금화 한닢을 되찾으려는 노파, 범죄자와의 만남에 동행을 원하는 손님 등. 말로우를 찾아오는 고객들은 모두 사연도 제각각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에게는 사건을 가지고 경찰에게 찾아갈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널려있는 만큼 말로우의 일이 유지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영화로도 제작된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

a

영화로 제작된 <안녕 내 사랑> DVD판 표지 ⓒ ITC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들은 여러편 영화로 제작된다. 두 번째로 발표한 장편 <안녕 내 사랑>은 1975년에 로버트 미첨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1917년 생인 로버트 미첨이 30대인 필립 말로우를 연기하기에는 다소 나이들어 보였지만, 어눌하면서도 강인한 이미지의 필립 말로우를 표현해 낸다.

33살에 데뷔한 필립 말로우는 6번째 작품 <기나긴 이별>에서 어느새 40대의 나이에 접어든다. 나이를 먹고 일당도 40 달러로 늘었지만 말로우의 스타일은 여전하다. 현실과 타협하지않고 협박에도 굴하지 않는다.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도 그대로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말로우도 약간의 외로움을 느꼈을지 모른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 말로우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의 기분은 별과 별 사이의 공간처럼 공허하기만 하다. 그는 집에서 위스키를 마시면서 혼자서 체스를 두고 창 밖을 바라본다. 말로우의 앞에 펼쳐진 세계는 온통 아수라장이다. 많은 범죄를 안고 있는 밤 속에서 누군가가 죽고, 누군가는 손발을 잃고 누군가는 부상당한다. 풍요롭고 활기차게 보일지는 몰라도, 짓눌리고 공허로 가득찬 도시.

말로우는 조자룡이나 람보처럼 그 도시 한가운데를 혼자서 뛰어다닌다. 자기만의 정의를 지키겠다는 신념이 있지만, 경찰이 되기에는 너무도 로맨틱한 인물이었던 필립 말로우. 레이먼드 챈들러는 낭만과 냉소가 결합된 하드보일드 최고의 영웅을 만들어낸 작가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깊은 잠 - 빅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박철범 옮김,
나무그늘, 2015


#레이먼드 챈들러 #깊은 잠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군산 갯벌에서 '국외 반출 금지' 식물 발견... 탄성이 나왔다
  2. 2 20년만에 포옹한 부하 해병 "박정훈 대령, 부당한 지시 없던 상관"
  3. 3 광주 찾는 합천 사람들 "전두환 공원, 국민이 거부권 행사해달라"
  4. 4 "개발도상국 대통령 기념사인가"... 윤 대통령 5·18기념사, 쏟아지는 혹평
  5. 5 '동원된' 아이들 데리고 5.18기념식 참가... 인솔 교사의 분노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