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관은 도망가고, 25명의 백성들이 왜적 상대

임진왜란 이전 경상좌수사가 제사 지냈던 곳... 지금도 여전히 부산 시민들의 기도처

등록 2016.07.15 11:52수정 2016.07.15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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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229-1에 있는 경상좌수영 남문(유형문화재 17호). 붉은 선의 형상에 따라 돌을 쌓은 이 남문은 홍예(무지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문 앞 좌우는 조선개 두 마리가 지키고 있다. 이는 수영성이 왜구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워진 군사 시설이라는 사실을 상징한다. ⓒ 정만진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등지고자 하랴마는
세월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일흔도 넘은 고령에 두 번이나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같은 이력에 힘입어 이 시조는 대한민국 '국정'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이력과 시조는 김상헌을 후세인들의 뇌리에 더욱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마침내 김상헌은 절개와 의지의 상징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되었다. 물론 명분론에 사로잡힌 고집불통 선비라는 평가도 뒤따르는 탓에 '사육신'만큼 국민적 지지를 얻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가노라 삼각산아'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사람은 없을 터이다. 그런 김상헌이 아래의 비명(碑銘)을 남겼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 水軍節度使)에 임명된 공은 백성들을 너그럽게 대하고 일을 부지런히 했다. 선비와 군사들은 편안하다고 입을 모았고, 군정(軍政)이 실행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중략) 임기가 차면 관례상 교체하게 되어 있었지만 조정이 공의 재능을 알고 특별히 1년 더 유임시켰다. 그 이듬해 임진년(壬辰年, 1592년), 왜적이 국력을 기울여 침범해 왔다.

공은 바닷가로 나아가 맞서 싸웠지만 중과부적이어서 본진(本鎭, 경상좌수영)에 들어가 수성을 했다. 하지만 왜적이 연달아 이웃 고을들을 함락하면서 구원병이 끊어졌다. 공은 어쩔 수 없이 상황을 조정에 보고한 후 백성들부터 먼저 성 밖으로 나가게 하고, 이어 자신도 군량과 병기를 챙겨서 뒤따랐다. 미처 챙길 수 없었던 나머지는 모두 불살라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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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성 남문을 들어서면 천연기념물 270호 곰솔이 서 있다. 22m 곰솔 아래에는 경상좌수사와 백성들이 제사를 지냈던 사당 수영고당이 있다. 사당에 작게 보이는 사당이 곰솔의 높이를 짐작하게 해준다. ⓒ 정만진

비명 속의 '공'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좌수사였던 박홍(朴泓, 1534-1593)이다. 김상헌은 박홍에 대해 최대한의 찬사를 펼치고 있다. 국민들은, 고집불통으로 보든 절의의 상징으로 여기든 필자가 김상헌이라는 사실을 알면 이 글을 사실로 믿을 것이다. 김상헌은 결코 불순한 목적을 위해 역사를 왜곡할 인물이 아니라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은 뜻밖에도 김상헌의 비명과 정반대의 내용을 보여준다. 1592년 4월 14일자 <선조수정실록>은 '경상좌수사 박홍은 (왜적이 쳐들어 오자) 바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慶尙左水使朴泓 卽棄城退走)'라고 증언한다.

1592년 6월 28일자 <선조실록>에 실려 있는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의 보고서도 대동소이하다. 김성일은 '좌수사 박홍은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먼저 성을 버렸고(不發一失 首先棄城), 좌병사 이각도 뒤이어 동래로 도망쳤으며, 우병사 조대곤은 연로하고 겁이 많아 시종 물러나 움츠렸고, 우수사 원균은 군영을 불태우고 바다로 나가 배 한 척만 보전하였습니다. 한 도(道)의 주장(主將)인 병사와 수사가 이 모양이었으니 그 휘하의 장졸들이 어찌 도망하거나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하고 증언한다.

박홍은 전쟁이 터지자 그 길로 도주하였을까, 아니면 중과부적으로 도저히 상대가 안 되자 백성들부터 피란시킨 다음 자신도 청야(淸野) 작전을 펴며 물러섰을까? 김성일이 조정에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박홍은 한 발의 화살도 날리지 않고 잽싸게 도망친 비겁한 졸장이고, 김상헌의 비명을 신뢰하면 백성들부터 살린 뒤 슬기롭게 후퇴한 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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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의용단의 외삼문 ⓒ 정만진


어느 쪽이 역사적 진실일까? 전쟁 초기 부산진첨사 정발, 동래부사 송상현, 다대첨사 윤흥신 등 무수한 부산 사람들이 장렬하게 순국했다. 그들에 견준다면, 김상헌의 비명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박홍은 당당하게 왜적과 맞서싸운 인물은 못된다. 그는 그저 물러섰을 뿐이다. 

조선군 지휘관들 도망치자 적은 수영성을 무혈 접수

박홍이 스스로 물러가버리자 경상좌수영에 주둔 중이던 조선군은 저절로 와해되어 버렸다. 일본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이곳을 점령했다. 그 이후 7년 내내 이곳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의 주둔지가 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적들의 위협에 굴복하여(脅從假命, 이하 '의용단비명'의 표현) 왜복을 입고(服班爛) 오랑캐의 소리로 말하는 자(言侏離者)'가 되지는 않았다.

특히 '사신(師臣, 병사와 수사)들이 도망쳐 나가는 것을 보고 분개하고 한탄한' 25명의 의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의연히 종군하여 금석 같은 초지일관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적을 공격하고, 또는 적의 칼날 아래 목숨을 잃고, 때로는 새로 임명된 장수를 영접하기도 하여 공로가 뚜렷하고 의열이 늠름하였다.'

25인의 업적이 처음 알려진 때는 1609년(광해 1)이었다. 부산 백성들은 동래부사(오늘의 부산광역시장) 이안눌을 찾아가 25인의 저항 의병군을 기려줄 것을 청원했다. 이안눌은 그 25인의 집집마다 문에 '義勇(의용)' 두 글자를 써붙여 표창하였다. 순조 때에는 동래부사 오한원이 그 후손들에게 역(役, 징집과 노동에 동원되는 일)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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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의용단 내삼문 ⓒ 정만진


1853년(철종 4)에는 경상좌수사 장인식이 스물다섯 분들과 그 외 무명의 의사들을 제사지내기 위해 단을 쌓고, 비석도 세웠다. 제단에는 의용단, 비석에는 의용단비(義勇壇碑)라는 이름을 붙였다. '바람이 세게 불어야 굳센 풀을 알게 된다(疾風知勁草者)'라는 비유적 표현으로 의사들을 찬양한 장인식은 제단과 비석이 세워지고, 제사가 이루어지게 된 경위를 비문에 다음과 같이 새겼다.

'아아, 이 수영은 남쪽 변방의 요해처이고, 영좌(嶺左, 경상좌도)의 요충지이다. 단을 쌓아서 제사를 지내고 비를 세워서 사적을 기록한 것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밝혀 후인들을 격려하려는 것이니 어찌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두 북돋우고 움직이지 않을 것인가. 경비는 스스로 도우려는 사람들이 많아 공사에 백성들을 동원하지 않았고, 제사에는 관가에 폐를 끼치지 않았다.'   

왜적들에 대항하여 유격전 펼친 평범한 수영 백성들

장인식이 세운 의용단비는 현재 '25의용단(義勇壇)'이라는 이름으로 수영구 연수로 379번길 42에 남아 있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12호인 25의용단의 외삼문 앞 검은 빗돌을 읽어본다. 빗돌에 '25의용사 건립문'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은 이 빗돌이 사당 건립 기념으로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빗돌은 의용단을 '조선 시대 임진왜란 7년간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의 운명이 매우 위태로울 때 우리 고장을 지키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바쳐 향토를 수호한 25의사의 충혼을 모신 곳'으로 정의한다. 기라성 같은 고관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줄행랑을 쳤지만 그저 그런 백성들은 오히려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바쳐 향토를 수호'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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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의용단의 사당 의용사와, 13기의 비석들이 보이는 풍경. 사진에는 뜰 건너편 담장 아래에 있는 '의용제인비' 및 12기 비석의 일부도 작게 보인다. ⓒ 정만진


1995년 수영구청이 개청되었을 때 일부 수영 구민들이 '25의사의 행적에 비하여 의용단의 규모와 시설이 너무나 왜소한 점을 안타깝게 여겨 수영 역사찾기 일환으로 의사의 충절을 드높이기로 뜻'을 모았고, '새천년을 맞아' 그 결실이 맺어졌다. 25의사의 위패가 새로 제작되었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을 한 사당 의용사(義勇祠), 그리고 내삼문 영회문(永懷門), 외삼문 존성문(存誠門), 관리사 전사당(典祀堂)을 건립했다.

의용단 경내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뜰 좌우를 가득 메우고 있는 비석들이다. 절의와 용기를 보여준 여러 사람들을 기리는 비석이라는 뜻의 의용제인비(義勇諸人碑)를 필두로 무려 25기나 되는 빗돌들이 양쪽 담장 아래에 도열해 있다. 의용제인비 옆은 정인강(鄭仁疆), 최송업(崔松嶪), 최수만(崔守萬), 박지수(朴枝壽), 김팽량(金彭良), 박응복(朴應福), 심남(沈男), 이은춘(李銀春), 정수원(鄭樹元), 박림(朴林), 이수(李樹), 신복(辛福) 의사를 기리는 비석들이다.

25의용단이 현재와 같은 면모를 갖춘 것은 2000년의 일이다. 뜰을 가운데에 두고 맞은편 담장 아래에는 김옥계(金玉啓), 이희복(李希福), 최한연(崔汗連), 최한손(崔汗孫), 최막내(崔莫乃), 최끝량(崔-良), 김달망(金達亡), 김덕봉(金德俸), 이실정(李實貞), 김허농(金許弄), 주난금(朱難今), 김종수(金從守), 김진옥(金進玉) 선열들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 가운데로 걸어 의용사로 다가서려면 참배객은 저절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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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의용단 경내로 들어서면 왼쪽 담장을 등지고 서 있는 12기의 비석을 볼 수 있다. 뜰 건너편에는 이 12기의 비석들을 마주보고 있는 13기의 비석이 또 있다. 사진의 가장 오른쪽의 비석은 이 비석들의 총칭은 '義勇諸人碑'이다. 의용제인비는 '의롭고 용기있는 여러 사람들을 기리는 비'라는 의미이다. ⓒ 정만진


수영성에 가면 25의용단 외에 남문(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7호)도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 낙동강 동쪽에서 경주까지의 우리나라 동남해안을 방어했던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이 바로 이곳 수영성이다. 남문의 모양이 홍예(虹霓, 무지개) 형태인 것과, 성문 앞면 기둥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박견(조선개) 한 쌍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도둑을 지키는 개를 성문 앞에 배치한 것은 수영성이 왜구를 감시하는 임무의 군사시설이었음을 잘 증언해준다. 하지만 성주 박홍은 바다에 왜선들이 나타나자 (김상헌이 아니라 김성일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 길로 잽싸게 달아나버렸다.

조선개 두 마리는 아직도 왜적들 두 눈 부릅뜨고 지키고 있건만

성문 바로 안에는 천연기념물 270호인 '부산좌수영 성지 곰솔'이 서 있다. 수령 400년 이상, 키 22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 4.1m, 가지퍼짐(樹冠幅) 동서 19m, 남북 21.7m인 엄청난 노거수이다. 이곳에 좌수영이 있었던 조선 시대 당시, 나무로 만든 군선(軍船)을 보호하고 무사안녕을 지켜주는 나무의 신이 이 노거수에 있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래서 이 곰솔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많이 지냈다고 전해진다.

당연히, 신령스러운 노거수 옆에는 수영고당(水營姑堂)이 있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신당(神堂)은 경상좌수사를 비롯 마을민들이 국태안민과 풍요를 기원을 올린 집이었다. 현지 안내판은 이 집이 '1936년에 재건되었는데, 지금 건물은 1981년 김기배(金己培)씨가 다시 지었고 2003년 들어 그의 아들 김종수(金鍾秀)씨가 수리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수영고당 현지 안내판은 '(오늘날에도) 자식이 군대에 가거나 먼 길을 떠날 때 수영고당과 신목에 무사안녕을 기원하면 큰 효험이 있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해설을 마친다. 곰솔나무와 신당 앞에 선 나도 잠깐 마음의 바람을 빌어본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입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기원하기는 좀 우스꽝스럽고, '지구상 유일의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가 하루라도 빨리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속으로 중얼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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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좌수영 성터 남문 바로 안에 세워져 있는 수영고당. 경상좌수사와 백성들이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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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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