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길 가다 힘들면 연락해도 되죠?"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선물한 제자

등록 2016.10.25 08:40수정 2016.10.25 08:42
0
원고료로 응원
3년 전, 윤동주의 어린 시절 삶이 오롯이 남아있는 중국 길림성 연길 용정과 명동촌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동주가 태어난 고향 명동을 방문하기 전 시인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대성중학교에도 들렀다. 흑백 사진으로 남아있는 동주의 흔적들을 보며 교과서나 시집 속에서만 봤던 시인이 한결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후 그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를 방문했다. 용정에서 명동촌까지 버스로 약 30분 정도 달린 것 같다. 버스로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 도착했을 땐 어스름이 기웃거릴 때였다. 버스에 내려 가장 먼저 눈에 띈 게 명동촌이란 커다란 바윗돌로 만든 표지석이었다. 그리고 허름한 지붕 위에 달린 뾰족하게 서 있는 십자가를 보았다. 그의 시 '십자가'가 떠올랐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십자가' 전문

사실 시라는 게 시인의 경험과 상상력이 버무려져 만든 결과물이지만 독자들의 눈에는 추상적 존재나 종이에 박힌 활자로만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시인이 태어나 자라고 살았던 곳에 가서 시인의 시를 연관시키면, 시가 더 친근하게 다가옴은 물론 구체적 형상으로 다가온다.

윤동주 생가에 들렀을 때 그랬고, <모란이 피기까지의>의 김영랑 생가에 들렀을 때도 그랬다. 또 <향수>의 고향 정지용 생가와 고향에 갔을 때도 시의 내용이 좀더 생생히 다가오곤 했다.

a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김현


갑자기 윤동주 이야길 꺼낸 건 두 권의 책 때문이다. 두 달 전 동화라는 친구가 초판본이라며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선물했다. 공무원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 친구는 "웬 책이냐"는 질문에 "선생님이 생각나서요" 한 마디 하곤 쑥스럽게 웃었다.

학교 다닐 때에도 늘 말이 없던 친구였다. 학교에서 문학기행이나 캠프 같은 거 할 때면 항상 데리고 갔다. 진득함이 좋아서였다. 졸업할 때까지 3년을 함께 하다 보니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정들음은 흘러가는 바람이다.

그렇게 잘 따르고 했던 아이들도 졸업하면 자기 생활이 바빠 대부분 연락을 하지 않는데 동화는 종종 문자로 안부를 전하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찾아와 책 두 권을 주고 간 것이다. 그것도 쑥스러운 미소와 함께.

"제가 좋아하는 시 표시해 놨어요."

녀석은 인사를 하며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 하곤 총총히 멀어져갔다. 그런데 난 한동안 책을 펼쳐보지 못했다. 바쁜 탓도 있었지만 두 시인의 시집을 몇 번 읽은 탓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문득 '제가 좋아하는 시 표시해놨어요'라는 말이 떠올라 다시 시집을 꺼내 읽었다. 녀석이 표시해 놓은 시는 윤동주의 '새로운 길'이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새로운 길' 전문 

거기엔 또 이런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시 아시죠? 제가 시낭송 대회 때 준비했던 시에요. 전 지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이 아닌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 낮엔 알바하고 밤에 공부하다 며칠 전부터 알바 그만두고 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저 응원해주세요. 이 시처럼 새로운 길을 가다 힘들고 지칠 때 가끔 연락해도 되죠? 연락하면 힘내라고 한 마디 해주세요."

누구나 하나의 길이 끝나면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길이든 말이다. 특히 젊은 날엔 그 새로운 길이 두렵다. 사회 초년병엔 더 그렇다. 그러면서도 때론 거침이 없을 때도 있다. 실패로 돌아올지라도 말이다.

누군간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했지만 그 청춘들이 너무 아픈 세상이다. 이미 기성세대가 된 내가 바라보는 현실은 탈출구 없는 동굴 속에서 수많은 청춘들이 아우성치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도 그들은 동굴을 깨고 나갈 것이다. 그렇게 믿어야 하고 조금 더 앞에 산 세대들이 탈출구를 만들어 줘야 하는데 더 막는 건 아닌지 안타까울 뿐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산천에도 소월의 시처럼 금잔디 가득한 봄이 왔으면 좋겠다.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 '금잔디' 전문

초판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 윤동주 유고시집, 1955년 10주기 기념 증보판

윤동주 지음,
소와다리, 2016


#김소월과 윤동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너! 나! 따로 가지 말고 함께 가자.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4. 4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5. 5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