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촛불을 들기 전에 당신이 내려놔야 할 것

[주장] 나와 내 집단만 계몽됐다는 '1등 시민' 의식을 버리시라

등록 2016.11.18 09:49수정 2016.11.18 09:49
0
원고료로 응원
'조선일보 가이드라인'

지난 12일에 100만 명(경찰 추산 26만 명)이 광장에 모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여전히 버티고 있다. 대통령과 국민 중 오래 버티는 쪽이 이긴다. 이제 19일의 광장에 대해 상상해보자. 그전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조선일보>는 노련하다. 그들은 이미 4월부터 (의도적이든 결과적이든) 청와대 및 친박계를 버리는 카드로 처리하는 각본을 짰다. 총선 전부터 새누리당 공천 파동을 문제시하며 대립각을 세웠고 이대로는 보수 정권이 위태롭다는 경고를 해왔다.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옳았다. 그간 영남권 유권자들과 여권 정치인들은 '우리'라는 한 테두리 인식과 함께 견고한 관계를 형성해왔다. 이것을 여당 스스로 공천 파동으로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알량한 권력욕이 드러나자 영남의 민심 이반이 일어났고, 그 균열을 파고든 몇몇 야권 정치인들의 선전과 낙동강 벨트의 2030 유권자들을 복병으로 만나 여당은 참패했다(관련 기사: 대구 시민도 사람, 김부겸이 옳았다). 이때부터 <조선>은 수구 세력을 보수로부터 갈라치기하는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4월부터 최순실 게이트에 들어가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진동 <TV조선> 사회부장은 지난 1일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7월 초에 김종 차관, 국가브랜드, 늘품체조 건을 썼다. 7월 중순에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을 썼다. 다음은 이화여대, 하이라이트는 문화융성사업이었다. 많은 예산을 최순실이 짜고 그게 실제로 반영되고 집행됐기 때문이다. 국가를 흔드는 문제라고 봤고 뒤쪽에 배치했다. 마지막에 최순실을 꺼내려고 했다."(관련 기사: TV조선 부장, "조선일보vs청와대 프레임 부담스러웠다")

a

영화 <내부자들>의 이강희 <조국일보> 논설 주간은 "어차피 대중들은 개, 돼지다. 거 뭐 하러 개, 돼지들한테 신경을 쓰느냐.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거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짠 판 속에서 민심을 관리할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 쇼박스


청와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조선> 기자에게 기밀을 누설하는 국기 문란을 일으켰다며 수사를 지시했다. 친박계 김진태 의원은 8월 29일 <조선> 송희영 주필이 대우조선으로부터 초호화 향응을 받았다며 <조선>을 '기득권 세력'이라 칭하는 등 지원사격을 가했다. <조선>이 주춤한 새 <한겨레>가, JTBC가 바통을 이어받아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혔다. 마침내 이른바 '조선일보 가이드라인'이라 불리는 사설이 올라왔다.

10월 26일 "부끄럽다"라는 제목 하에 국정에서 손 뗄 것(2선 후퇴), 새누리당 탈당, 거국 중립 내각 구성을 정국 해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어서 12일 민중총궐기 하루 전 "가짜 보수와의 결별"이라는 제목으로 "보수 전체의 몰락을 막기 위해선 수구와 진정한 보수가 구별되고, 갈라서야 한다. 절연을 통해 대한민국 보수가 새롭게 정립돼야 할 시점이다"라면서 속내를 드러냈다.


문재인은 어쨌든 조금씩 전진해왔다

<조선>이 던진 미끼를 청와대는 안 물었고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는 물었다. 잘 알려졌듯 박근혜 대통령은 2선 후퇴 없이 김병준 교수를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했고, 문재인은 '조선일보 가이드라인'이 올라온 당일 SNS를 통해 박 대통령에게 거국 내각을 제안했다. 다른 야권 대선 주자들이 하야, 탄핵 등 보다 높은 수위의 요구를 해온 것과는 달랐다.

그렇다면 문재인이 '조선일보 가이드라인'에 갇힌 걸까. 필자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볼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문재인은 <조선>의 미끼를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기보다는 일부러 '물어준 것'에 가깝다. 그 스스로 반복적으로 대통령 탄핵, 하야를(요컨대 '퇴진'을) 요구하는 민심을 잘 안다고 강조해왔다. 다만 박 대통령이 여기에 귀 기울일 것을 요구하면서도 2선 후퇴-거국 내각을 제안했다. 지금은 당론이 바뀌었지만 처음에는 그랬다. 왜 그랬을까?

a

더불어민주당이 민중총궐기가 열리는 12일 오후 2시 청계광장 일대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날 규탄대회에는 추미애 대표, 우상호 원내대표, 김종인 전 대표 등 전현직 당 지도부와 문재인 전 대표, 김부겸 의원,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성남시장 등 대권주자, 다수의 국회의원이 참석했다. 주최 측은 이들을 포함해 3만여 명의 당원이 규탄대회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 더불어민주당


표면적으로는 퇴로를 열어줘 마지막 책임을 다할 기회를 주려는 충정이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명분 쌓기'다. 현 상황의 지속되면 누가 곤란해지는 잘 봐야 한다. 박 대통령? 최순실? 친박계? 모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뻔한 답이다. 게이트 정국으로 어차피 그들은 너덜너덜해졌다. 답은 <조선>이 수구인 친박계를 보수에서 갈라치기 한 뒤 여집합으로 남겨두려던 '비박계'다. 비박계는 처음에는 '거국 중립 내각' '이정현 대표 사퇴'를 주장했다.

이제는 '탄핵' '새누리당 해체'까지 꺼낼 정도로 초조하다. 반면에 청와대와 친박계를 보라. 되레 '탄핵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의 배짱을 부린다. 지지율은 언제든 오를 수 있다는 둥, 거리에 안 나온 시민들은 국정 안정을 원한다는 둥 민심을 조롱까지 하고 있다. 지금 정치권은 이미 <조선>의 가이드라인을 벗어나 있는 상황이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박 대통령과 친박계가 2선으로 물러나는 성의는 보여야 했다.

그런데 청와대와 친박계가 상상 이상으로 비합리적이고 패권적인 집단이라 이조차 거부하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이렇게 흘러가면, 내년 대선에서 '보수 정권 재창출'도 불투명하다. 다가오는 대선에서 친박계를 찌그러뜨려야 이미지 세탁을 할 수 있는 비박계는 압박 수위를 높일 수밖에 없다. 문재인과 더민주 지도부는 탄핵을 말할 상황인가. 그럴 수 있지만 제약이 있다. 역풍? 노무현 때 민심과 박근혜 때의 민심은 같은 정서가 아니다. 역풍은 본질이 아니다.

노무현 때 역풍을 불러온 감수성이 '동정'이었다면 이번에는 자격 없는 자들이 국정을 농단했고 부와 권력을 전횡했고 지도자에게 속은 것에 대한 '격분'이다. 더민주의 진짜 난관은 탄핵 소추안 통과, 헌법재판관 9명 중 6명 확보, 황교안 총리말고도 <조선>을 필두로 한 보수 언론의 낙인찍기와 불신 조장(더민주, 거리의 시민, 사회단체를 편 가르는) 전략에 있다.

더민주가 '조선일보 가이드라인'을 벗어나 탄핵 이야기를 비박계보다 먼저 천명했다고 해보자. 또한 100만 시민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온 것보다 빨리 장외로 나온 후 시민과 사회단체와 결합했다고 해보자.

어찌 됐을까. 당장 더민주에게 '운동권 정당' '정치 공세' '혼란 조장', 거리의 시민들에게 '불법 집회' '폭력 시회', 사회단체에게 '기득권 세력' '종북 좌파' '선동' 등의 낙인이 돌아온다. 애초에 '조선일보 가이드라인'의 목표는 비박계가 정국 주도권을 쥐는 것이다.

이 가이드라인 상에서 촛불의 임무조차 대통령을 압박해 2선 후퇴를 받아내는 것까지였다. 이 큰 그림에서 야권이 정국을 주도하는 일은 계획과 어긋난다. 필자는 일각에서 답답해하는 것처럼 문재인과 더민주가 여권에 끌려다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추미애 대표가 최후통첩 적기와 절차를 오판한 약간의 잡음을 제외하면 그들은 여권과 조중동만큼이나 노련하다.

<조선>을 필두로 한 보수 언론들에게 책잡힐 '명분'을 내어주지 않고자 던진 미끼를 물어주되, 현 정국의 이면에 깔려 있는 '친박계 대 비박계' 자중지란이 알려지기를 바랄지도 모른다(이것은 <조선>이 두려워한 '청와대 대 조선일보' 프레임과 유사하다). 결과를 보라. 국민이 나아간 만큼 문재인도 어쨌든 조금씩 전진했다.

무엇을 해야 나라가 나라다워 질까?

a

청와대 입구 막은 경찰 박근혜 퇴진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지난 12일 오후 청와대로 향하는 동십자각 부근에서 경찰이 폴리스라인과 차벽을 설치하고 있다. ⓒ 권우성


물론 현재 많은 국민들의 도덕 감정은 복잡한 정치적 해법보다 박 대통령과 측근들의 즉각 퇴진과 응징을 원한다. 사람들은 나라가 나라다워지기를 바랄 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고민은 필요해 보인다. 나라가 나라답다는 게 정확히 뭘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모든 주권이 시민에게 있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답한다. 좋다. 그럼 그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인가?

우리는 정작 그것에 답하지 못 하고 있다. 우리가 전진하는 만큼 역사도 전진한다. 우리는 정말 '진지하게' 박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왜 지난 12일 내곡로 동십자각 폴리스라인과 '평화 집회' '순수한 집회' '문화제' 프레임을 넘지 못 했고 왜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걸 견디지도 관용하지도 못 한 채 집회의 '변질'을 걱정했나. 반대로 폴리스라인은 결국 정권의 가이드라인이라며 넘어서보자는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대의를 가졌으면서도 동료 시민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나.

우리는 이미 안다. 누구나 자신의 신체와 신념이 소중하다는 것을. 아주 중요한 순간에만 그것을 걸고 무언가 해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지금이라고 확신하고 서로를 믿고 참을성 있게 설득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이것은 민주주의인가? 필자는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원한다. 따라서 19일에도 광장으로 나갈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퇴진한 이후에 한국 사회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도래하겠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100만은 모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유대감을 회복시키고 잃어버린 가치를 다시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큰 의미를 갖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더 나아가지 못 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폴리스라인도 <조선>의 가이드라인도 아니라 정작 서로 간에 쌓아둔 마음의 벽은 아닐까.

지금 이 시각에도 인터넷 어딘가에서 사람들은 2선 후퇴, 하야, 탄핵, 퇴진 등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싸운다. 또한 집회는 질서를 잘 지켜야 하느냐 무력도 사용할 수 있느냐를 두고 갑론을박 한다. 왜 이 구호를 외쳤니 말았니 싸운다. 또한 서로에게 대안이 무엇이냐고 추궁한다.

필자에게 대안을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 모두가 '1등 시민의식'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나와 내 집단은 동료 시민들과 다른 더 계몽됐거나, 질서를 잘 지키고 선동 당하지 않는 존재라는 우월 의식. 나와 타인을 분리시키고 섞이지 않으려는 배타적인 감각. 그것들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서로를 좀 믿고 19일에 광장에서 만나자. 그때 비로소 19일은 12일보다 진보할 것이다. 분열되지 않고 오래 버티는 쪽이 이긴다.
#민중총궐기 #박근혜 #최순실 #조선일보 #문재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하이브-민희진 사태, 결국 '이게' 문제였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