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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몸 고문, 박근혜는 빚 고문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인혁당재건위사건' 피해자, 대법원의 배상금 감액 판결로 여전히 고통

등록 2020.02.15 11:56수정 2020.02.2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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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18시간 만에 사형당한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희생자들, 후에 무죄로 밝혀졌다. ⓒ 의문사위 자료사진

 
"인혁당계인 서도원·도예종 등은 경북대생인 여정남에게 '서울에 있는 대학의 반정부 학생과 접선해 이들에게 폭력에 의한 정부 전복을 선동하고 그 방법을 교시하며 자금을 지원하는 등 전국적인 대학생 조직을 결성하도록' 지령을 내렸고, 여정남은 이 지령에 따라 인민혁명당 서울 지도부인 이수병·김용원의 비호하에 이들을 통해 이철·유인태 등을 접선하고 이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들로서 자기들 나름대로 전국적인 폭동에 의해 정부를 전복해 공산정권 수립을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에 적극 찬동 폭력혁명의 필요성, 필연성을 강조하며 이들을 격려했고 전국적 조직 확대, 학생 봉기의 민중 봉기화를 위한 방법들을 교시했다."

1974년 5월 27일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중정)가 발표한 이른바 '인혁당재건위사건'이다. 당시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서도원·도예종·하재완·이수병·김용원·우홍선·송상진·여정남 등 8명은 사형선고를 받고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창복 등 15명은 무기징역, 15년, 20년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장석구 등 24명은 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불행하게도 장석구는 1975년 옥사했다.

인혁당재건위사건의 피해자 대부분은 1964년에는 대일굴욕외교 반대운동, 1967년에는 재야 대통령 단일후보운동, 1969년에는 삼선개헌 반대운동, 1971년에는 김대중 지지운동 및 공정선거감시운동, 그 후에는 유신반대운동과 평화통일을 기원했다.

이 사건의 피해자 전창일은 1974년 당시 중정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물고문·전기고문, 구타를 당했다. 피해자 김한덕 역시 당시 수사팀장 윤아무개에게 전기고문·물고문을, 수사관 김아무개에게 몽둥이로 구타를 당했다. 피해자 황현승은 수사관 박아무개에게 전기고문, 물고문을 당했다. 이창복(1938- )은 온몸이 시커멓게 될 때까지 몽둥이로 구타당했고, 김종대는 수사관 손아무개로부터 물고문 당한 결과 반실신했으며, 박중기는 박아무개에게 전기고문을 당해 실신했고 그 결과 왼쪽 눈이 실명되었다.

피해자 임구호는 수사관 이아무개에게 몽둥이 구타를 당했고, 이재형은 물고문과 구타를 심하게 당해서 중정과 서울구치소 계단을 혼자 걸어서 올라가지 못했으며, 강창덕·라경일은 대구 남부서에서 물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 피의자였던 이철(1948- )은 중정 복도에서 여정남이 죽어가는 표정으로 다리를 절면서 지나가는 것을 2~3회 가량 보았고, 서울구치소에서 여정남이 "박정희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나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김지하는 서울구치소에서 하재완으로부터 "인혁당 사건은 고문을 통해서 조작되었다. 나는 고문을 심하게 받아서 탈장이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훗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당시 피해자 하재완은 중정에서 고문을 심하게 받았다고 서울구치소 교도관에게 이야기했고, 탈장이 되어서 아랫배가 불룩했으며 잘 걷지 못한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하재완의 몸에는 구타로 인한 멍 자국이 있었다. 또한 우홍선은 서울구치소에서 대낮에도 구치소 당국의 허락을 받고 감방 안에서 누워 있었고 우홍선·하재완은 고문조사를 받고 새벽에 감방으로 복귀할 때 고문의 후유증 때문에 업혀 왔다.

당시 서울구치소 교도관 전아무개는 이 사건 관련자들이 모두 구타로 인한 피멍자국이 있었고 대화를 하면서도 온몸의 고통을 못 견디어 감방 철문을 붙잡고 몸을 뒤척이는 것을 목격했다고 훗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전기고문 후유증으로 실명
 

인혁당재건위사건 재판 모습 ⓒ 의문사위 자료사진

 
당시 서울구치소 교도관들의 진술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의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 재소자들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유진곤은 손과 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으며, 김용원은 눈동자의 맥이 풀려 있었고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또 하재완은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서 탈장이 되었고 물고문 때문에 폐농양증에 걸려서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묻어 나왔다. 그리고 이수병은 대화 도중 "고문을 많이 받아서 목이 불편하다"고 이야기했다.

서울시경 소속 경찰로 중정에 동원되었던 전아무개는 인혁당재건위사건 피의자 조사에 1회 입회했다가 황현승이 인혁당재건위 사건 수사경찰관 4명으로부터 전기고문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며 훗날 의문사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중정의 지하 보일러실로 추정되는 곳에서 전기고문이 자행되었는데 피의자는 팔걸이가 있는 의자에 묶여 있었고 팔걸이 위에 올려진 손으로 전류가 통했다. 길이 30cm, 폭 10cm, 높이 15cm의 손잡이가 끝에 달려 있는 국방색의 군대 야전용 전화기로 전류를 통하게 했으며, 경찰 일부가 한 번에 3~4회씩 손잡이를 돌렸고, 피의자는 몹시 괴로워했다."

인혁당재건위사건을 담당했던 경북도경 소속 수사관 이아무개의 진술에 따르면 하재완·여정남 등이 초기에 고문을 심하게 당했고, 대구 남부서에서 조사를 받고 올라온 강창덕의 손은 심하게 맞아서 부어 터져 있었다. 그리고 고문 전용 장소인 중정 지하 보일러실에서 피의자를 물고문하는 것을 목격했다. 당시 피의자의 양손과 양발을 묶고 무릎을 팔 사이에 넣고 그 사이에 봉을 끼워 넣은 다음, 양 책상에 봉을 얹어서 피의자가 대롱대롱 매달리게 한 채, 얼굴에 수건을 덮고 물을 붓는 방식으로 고문이 이루어졌다.

당시 수사경찰은 검찰조사 때도 직접현장에 입회해서 피의자들이 고문 받으면서 했던 진술을 부인이나 번복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만약에 검사 앞에서 피의자들이 혐의를 부인하거나 번복하면 중정요원들은 검찰조사를 중단시키고 피의자들을 다시 중정 지하 보일러실로 끌고 가서 협박했다. 또한 서울구치소에서 중정 수사관 없이 조사를 하다가 피의자들이 협의를 부인하면 다음 날 이들은 다시 중정으로 끌려가서 추가로 고문을 받고 그 후에 다시 혐의를 인정하고 검찰 조서를 작성해야 했다.

이렇게 가혹한 조사를 받다보니 고문조사를 받을 당시 공포심으로 대인공포증, 협심증이 발생하는 사람이 많았다. 피의자 김종대는 신경이 예민해지고 대인공포증이 발생해서 석방 이후까지 고생했다. 이창복 역시 고문실을 갔다 온 다음부터 불면증과 대인공포증에 시달렸고 간수가 감옥의 문을 열면 심장이 막 뛰는 협심증이 생겼다. 이런 후유증은 8년의 형을 살고 석방된 이후에도 계속되어서 잠을 자는 동안은 악몽에 시달렸고 그의 가족들도 이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황현승 역시 협심증으로 석방 이후까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또한 고문구타로 인한 후유증도 남아서 피의자 이재형은 석방 후에도 왼쪽다리를 저는 영구적인 절름발이가 되었다. 강창덕은 석방된 이후에 구타 당한 무릎, 발목, 허리에 어혈이 생겨서 계속해서 한방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임구호는 몽둥이로 허리를 맞아서 척수에 붙어 있는 작은 뼈가 두 개 부러지는 디스크에 걸렸고, 결국 척추이탈 판정과 장애5급 판정을 받았다. 전창일 역시 허리를 맞아서 척추를 감싸는 근육이 죽어서, 석방 후에도 허리가 좋지 않아서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다. 박중기는 전기고문 후유증으로 인해서 왼쪽 눈이 실명되었다.

"간첩이다, 죽여라"
  

당시 기사 ⓒ 의문사위 자료사진

 
이렇게 전반적으로 피의자들은 구타를 당한 부위가 시커멓게 변색되고 바로 눕지도 못했다. 황현승과 같이 철봉에 매달려서 통닭구이 고문을 당한 사람은 몇 달간 주먹을 쥔 다음에 손이 펴지지 않게 되었다. 하재완은 창자가 고환으로 빠져나오는 탈홍, 항문으로 빠져나오는 탈장이 되어서 한 손으로 항문으로 흘러나온 창자를 항문으로 집어넣으면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 또한 물고문의 후유증으로 폐농양증이 걸려서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흘러 나왔다.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출소한 15명 중 5명은 각종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머지않아 사망했다. 생존자들도 그 후 지속적인 고문후유증으로 그리고 자녀들은 '빨갱이 자식'이란 누명을 쓴 채 연좌제로 고통에 찬 삶을 연명해야 했다.

피의자 송상진의 아들 2명은 정신적 충격이 커서 공부를 소홀히 하고 학교에서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딸 역시 차별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 컸다. 일례로 경북여고 재학 중 선생이 송상진의 딸에게 "과외 받을 학생을 모아주면 너는 공짜로 과외시켜 주겠다"고 이야기해서 학생들을 소개시켜 주어도 정작 딸에게는 과외를 시켜주지 않고 다른 사람들만 과외교습을 해주는 일이 있었다.

김한덕의 아들·딸은 이 사건발생 이후 친구와 선생님한테 용공주의자의 아들·딸로 몰려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전창일·나경일·도예종·이창복의 자녀들도 정신적인 충격이 크고 부친이 없는 결손 가정에서 경제형편이 어려운 가운데 자라다 보니 교육을 충분히 받기가 어려웠다. 전재권의 자녀들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학교 선생들로부터 심리적인 부담을 많이 받아서 탈선의 위험까지 있었다.

정만진의 아들은 동네 사람들에게 "너희 아버지는 빨갱이다"라고 말해서 충격을 받은 일이 있고 학교에서도 이 문제로 자주 싸웠다. 우홍선의 아들은 대학교에 다닐 때 경찰이 와서 "학생, 공부 열심히 하는 거 아는데 공산주의자들이 접근해 올지 모르니까 조심해라"라고 하면서 심리적 부담감을 주었다. 송상진 집안의 경우 뒷집 사람이 자식들에게 송상진의 막내 애하고 놀지 말라고 했다.

하재완의 막내아들은 네 살 때 동네 아이들이 나무에 묶어 놓고 '간첩새끼'라고 하면서 총살시키는 장난을 했고, 동네 어른들도 이를 막기는커녕 웃으며 방관했으며, 둘째딸은 초등학교 2학년 소풍을 갔을 때 아이들이 '간첩의 딸'이라고 놀리면서 도시락에 개미를 집어넣고 따라다니며 돌을 던지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아들이 맞선을 볼 때에도 상대편 사람이 "너에게 내 자식을 시집보내느니 차라리 김일성과 결혼시키겠다"고 말하는 등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의 자식들은 이루 말할 수없는 고통 속에서 세월을 보내야 했다.

특별히 이 사건에 연루돼 1974년 5월부터 8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이창복(1938- ) 선생의 아들 이송우(1970- )씨는 아버지가 중정에 강제연행 돼 '간첩'으로 몰려 수감생활을 할 동안, 그야말로 '아비 없는 빨갱이 자식'으로 살아야 했다. 1982년 이창복 선생이 특별사면으로 8년 만에 출소한 이후에도 그의 가족은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에 시달려야 했다.

이외에도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들은 동네이웃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고, 친척들과도 왕래가 끊어졌다. 피의자 나경일의 경우 이웃들이 "여기에 왕빨갱이가 사는 줄 몰랐다"고 하면서 가족들을 피해 다녔고 가까운 친척들도 불이익을 받을 것 같아서 아예 방문을 꺼려했다.

이런 일은 도예종·하재완 등 억울하게 사형 당한 이들의 가족들에게도 일어났다. 특히 하재완 가족의 경우 이 사건 직후에 집 담벼락에 "간첩이다. 죽여라"라는 낙서가 끊임없이 계속 적혔다. 우홍선의 가족은 새로 이사를 갔을 때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집 앞 여관 주인이 "이 집이 간첩의 집"이라고 하면서 따돌렸다.

국가란 무엇인가
 

사형선고 직후 오열하는 가족들 ⓒ 의문사위 자료사진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인한 가족들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임구호의 동생들은 이 사건 이후 임구호의 석방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모두 옥고를 치렀는데 임구호의 부친은 "일제 치하 아래 살아도 이것보다 더 혹독하지는 않았다"고 씁쓸하게 술회하기도 했다. 이것이 박정희 정권 시절 우리나라의 모습이었으나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지난해 10월 26일 박정희 40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이렇게 평가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독보적인 성취와 성공의 기적을 일구어낸 분이다. (우리는) 박정희 정신을 배워야 한다."

한편, 이러한 인혁당재건위사건에 대해서 한때 필자가 몸담았던 의문사위에서는 지난 2002년 중정의 고문에 의해서 이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진상을 규명했다. 하지만 의문사위의 진상규명에도 인혁당재건위사건 피의자들의 경제적 피해는 대단히 컸다.

생계를 유지하던 가장들이 당시 모두 구속되자 가족들은 수입원이 모두 끊겼고 양봉업, 메추리업, 나사점, 목욕업 등 사업을 하던 집안은 사업이 망했다. 건설회사 간부, 명예회장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받던 집안들은 그만큼 타격이 더 컸다. 특히 유기수, 무기수의 경우는 석방된 이후에도 아예 취직이 안 되어 끊임없이 최저빈곤에 허덕였다.

더욱이 지난 2009년 국가로부터 받은 손해배상금으로 여생을 보내고자 마련한 이창복 선생의 집은 현재 강제경매 위기에 놓여 있다. 지난 2013년 박근혜 정권의 국가정보원이 대법원의 '배상금 감액' 판결(2011년)을 근거로 "부당이득금을 반환하라"고 요구하며 이창복 선생의 재산을 압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재 이창복 선생의 채무는 11억 원 대에 이른다.

박근혜 정권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창복 선생은 '부동산강제경매', '채권압류' 등 수년간 법원에서 강제집행 관련 문서를 받으며 빚고문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과연 오늘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국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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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이창복 씨가 8일 오후 경기도 양평군 자택에서 지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2008년 재심에서 무죄판결로 피해자들의 명예는 회복됐지만, 최근 대법원이 배상금을 반환하라는 판결에 그들은 또 다시 채무자로 벼랑 끝으로 내몰린 신세가 됐다. 2014.4.9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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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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