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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관련 첫 저서 '상례사전' 집필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37회] 조선시대에 상례 문제는 심각한 사회적 이슈였다

등록 2020.10.06 18:00수정 2020.10.0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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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 초상화

 
강진 유배 초기에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쇠약해졌다.

당시 40대 초반은 중늙은이에 속한 나이였다. 억울한 추방과 셋째 형의 죽임, 흑산도로 쫓겨간 둘째 형의 고초, 여기에 막내 아들의 참척까지 당하면서 심신이 편할 리 없었다.

1803년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특명으로 정약용을 석방하고자 했으나 서용보 무리가 반대하여 풀려날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은 아픔을 더해 주었다.

틈틈히 인근의 보은산방에 올라가 무료함을 달래고 기운을 차렸다. 「보은산원」이란 시에서 당시의 어려운 정황이 엿보인다.

 눈이 침침한 지 벌써 반 년이나 지났고
 근육은 시큰거려 한쪽 손을 쓰지도 못하네
 아직도 바라는 것이야 더 늦기 전에
 돌아가서 강물을 떠도는 어부되는 것이요
 책 속에 온 힘을 다 쏟아부어
 백세 이후를 기다려 보자는 것이지.

요즘의 유행어라면 '이생망'의 처지에서 오직 '백세 이후'를 내다보면서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쉬지 않고 글을 썼다. 무엇 하나 허투루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열정을 바쳐 유배지의 첫 학술서인 『단궁잠오(檀弓箴誤)』를 1803년에 지었다. '단궁'은 육경(六經)의 하나인 『예기(禮記)』라는 고례(古禮)에 관한 책의 편명이다. (주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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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이 18년 강진 유배생활 가운데 10년을 거처했던 다산초당. 훗날 다산유적보존회에서 기와집으로 지어놓았다. 초당 앞 넓은 바위가 차 부뚜막인 ‘다조'다. ⓒ 이돈삼

 
사람이 죽었을 때 초상을 치르고 장례, 제사를 지내는 옛날 예법에 관한 내용으로, 뒷날 이를 크게 보완하여 거질 『상례사전』에 편입하였다. 그는 왜 유배생활의 참담한 처지에서 학술 관련 첫 저술로 '상례'에 관한 책을 썼을까.

유배 초기 시절 정약용은 예기(禮記)와 상례(喪禮), 특히 상례를 집중 연구했다. 이런 연구결과는 나중 『상례사전(喪禮四箋)』으로 집대성되는데, 정약용이 상례를 집중 연구한 이유는 천주교도들이 부모의 신주를 불태우거나 제사를 폐지한 것에 대한 자기변호의 성격이 강했다. 즉 자신은 천주교와 절연한 유학자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석 2)


조선시대에 상례 문제는 심각한 사회적 이슈였다. 효종의 국상 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착용기간을 두고 두 차례 '예송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 일부 천주교도들의 조상 신주 소각과 제사폐지 문제가 국가의 핫 이슈가 되고 정약용 자신도 천주쟁이로 몰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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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강진에 처음 유배오셔서 사셨던 곳을 기리는 기념비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강진에 처음 유배오셔서 사셨던 곳을 기리는 기념비 ⓒ 장생주

 
실제로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쓴 편지에서 자기의 책이 후세에 전해졌으면 하는 두 권의 책 중에 하나로 『상례사전(喪禮四箋)』을 꼽을 만큼 중요시하였다.

『상례사전(喪禮四箋)』은 내가 성인(聖人)의 글을 독실하게 믿고서 만든 것으로, 내 입장에서는 엉터리 학문이 거센 물결처럼 흐르는 판국에 그걸 흐르지 못하도록 모두 냇물을 막아 수사(洙泗)의 참된 학문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뜻에서 저술한 책이다.

정밀하게 사고하고 꼼꼼히 살펴 그 오묘한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게 된다면 죽은 뼈에 새 살을 나게 하고 죽을 목숨을 살려주는 일이다. 나에게 천금(千金)의 대가를 주지 않더라도 감지덕지하겠다. 만약 내가 사면을 받게 되어 이 두 가지 책만이라도 후세에 전해진다면 나머지 책들은 없애버렸다 해도 괜찮겠다.

나는 임술년(1802) 봄부터 책을 저술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고 붓과 벼루를 옆에 두고 밤낮으로 쉬지 않으며 일해왔다. 그래서 왼쪽 팔이 마비되어 마침내 폐인이 다 되어가고 시력이 아주 형편없이 나빠져 오직 안경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는 일이 무엇 때문이겠느냐? 이는 너희들과 조카 학초(學樵)가 전술(傳述)해내며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주석 3)


주석
1> 박석무, 『다산 정약용 평전』, 416쪽.
2> 이덕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2)』, 162쪽, 김영사, 2004.
3> 박석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138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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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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