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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중국군 동원 진압책략 막아내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 24회] "최진동의 동생 최운산과 최치홍 등 3형제의 업적은 당시 대일 항전에 절대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등록 2021.01.30 12:21수정 2021.01.30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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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봉오골 반일 전적지 2018년 8월 3일 충남교육청 창의융합형 인문학기행 평화통일단 일행이 봉오동전투 전적지를 방문하여 헌화와 묵념을 하고 있다. ⓒ 이정희

 
봉오동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일본군은 전의를 잃고 두만강을 건너 유원진으로 퇴각하였다.

강화도조약 이래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해온 이래 최초로 겪은 대규모의 패전이었다. 패전 후 일본군의 「봉오동부근 전투상보」에서 독립군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적은 전부 소련식 소총을 갖고 탄약도 상당히 휴대하였으며 사격도 상당히 훈련되어 있다. 거리 측량이 불확실한 700~800미터 거리에서도 사격을 하며 지형을 이용해서 방어할 때는 상당한 전투력을 가지고 또 용감하게 싸운다. (중략) 
 
금회 다음의 사실을 확인하였다. 대안불령선인단은 정식의 군복을 사용하고 그 임명 등에 사령을 쓰며 예장을 제정하고 있는 등 전적으로 통일된 군대조직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지나측은 이를 묵인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이제 경고를 줄 필요가 있다. (주석 1)

 

최운산·최진동 형제 ⓒ 최성주

 
일제는 패전의 설욕을 다짐하는 한편 전략을 바꾸었다. 중국 측에 한국독립군 진압을 제기한  것이다.

"중국 측의 만주군벌 장작림에게 중국군이 한국독립군을 토벌하지 않으면 일본군이 만주에 직접 출병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겠다는 일제 측의 대대적인 위협에 굴복하여, 일본군 파견 감시하에 중국군을 출동시켜 한국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1920년 7월 24일 일본군에게 통지하였다. 일본군이 8월 15일 이에 동의하자, 중국측은 주연길 중국육군 제2혼성여단 보병 15단장 맹부덕(孟富德)을 사령관으로 하여 한국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출동시키게 되었다." (주석 2)

그러나 맹부덕과 중국군 간부들 가운데에는 일본군의 강요에 굴복한 중국군의 한국 독립군 토벌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으며, 중국 관헌의 간부들 가운데에는 한국인들과 친분이 있고 한국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동정자가 많이 있었다. 이에 간도의 대한국민회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의 간부들은 중국군 토벌대 편성의 정보를 입수하자 맹부덕의 중국군 측과 비밀리에 교섭한 결과 양측의 비밀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주석 3)


중국군측과 비밀 교섭을 벌인 사람은 최운산이었을 것이다. 일찍이 장작림 부대에서 복무하였고, 그를 생명의 위기에서 구해줬던 일이 있었기에 '합리적 추론'이 가능한 부문이 아닐까 싶다. 맹부덕은 장작림의 예하 부대장이었다. 최운산이 나서서 한ㆍ중 간에 원만한 타협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타협의 요지는, 독립군은 중국측 입장을 고려하여 현재 일본측에 잘 알려진 근거지를 일본측 눈에 잘 띄지 않는 삼림지대로 옮기는 근거지 이동을 단행하고, 중국군은 독립군의 이동행군과 삼림지대에서 새 근거지 건설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주석 4)
 

중국 길림성 도문시 봉오동전적지인 봉오동 상촌마을의 초모정자산. ⓒ 박도

 
이에 따라 최진동과 최운산이 지휘하는 군무도독부는 대오를 정비하여 북방의 나자구(羅子溝)방면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봉오동대첩과 관련 연합부대 내의 불협화음이 따랐다. 홍범도 부대와 최진동 부대의 갈등설을 비롯 전투과정을 둘러싼 문제제기였다. 이와 관련 역사학자 윤병석 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이 강력한 전투력을 갖고 있고 안무의 국민회군이 정비된 독립군이었지만 정규군인 일군과 싸우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670명의 강력하고 완전무장한 최진동장군의 군무도독부와 통합은 1.200여 명에 이르는 단합된 무장력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독립군이 결성됨으로 봉오동 전투의 승리도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석 5)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항일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최운산 장군은 북만주 제1의 거부이자 무장투쟁을 전개한 항일독립투사였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빛나는 승리를 전취한 제1의 요인은 수년 간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양성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실이었다.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독립운동사에 금자탑을 이룬 봉오동대첩은 연합부대가 함께 이룬 전승이다. 일본군에 비해 무기ㆍ병참ㆍ훈련 등 모든 면에서 열악했던 독립군이 투절한 애국심과 연대를 통해 왜군을 토멸한 것이다. 독립운동가 이강훈의 기록이다. 

군무도독부는 최진동 최운산 최치홍 3형제가 왕청현 봉오동을 근거지로 하고 풍부한 경제력을 선용하여, 거의 개인적인 힘으로 양성한 수백 명의 사병을 기간으로 일개 전투군단(대한북로독군부를 가리킴)을 편성하였으며, 최진동 사령관과 그의 동생들의 참모와 경제적 뒷받침(간도 제일의 거부였던 최운산이 군자금을 제공했음을 의미함)으로 전투태세를 완비하고…. 봉오동 전투에서 흉적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줌으로써 독립전사에 불후의 이름을 남긴 기관으로 되었다. (주석 6)
 
일찍이 정착하여 생활기반을 굳혀 놓고 그 토대 위에서 독립 전쟁의 장비며 군량 등을 보급하여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한 최진동의 동생 최운산과 최치홍 등 3형제의 업적은 봉오동 전투 등을 비롯하여 당시(경신년) 대일 항전에 절대적으로 이바지하였다. (주석 7)
 

주석
1>> 안천추격대,「봉오동부근 전투상보」,『한국독립운동사연구』5, 578~579쪽, 1991. 
2> 신용하, 앞의 책, 209쪽.
3> 앞과 같음.
4> 앞의 책, 209쪽.
5> 한국일보사 편,『재발굴 한국독립운동사』제1편, 1987.
6> 이강훈, 앞의 책, 67쪽.
7> 앞의 책, 84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최운산 # 최운산장군평전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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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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