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우리는 많은 것을 잊었다

1991년을 다시 봄

등록 2021.05.20 08:40수정 2021.05.20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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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 들라크루아

 
1991년 5월의 기억들이 올해로 30년째 돌아온다. 여러 해를 살았고, 많은 것을 잊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가능해진 그해 대통령 직접선거가 또 다른 신군부 정권의 출현은 막지 못했다는 사실, 뒤이어 한국 사회에 물밀 듯 제기됐던 학원 비리 척결과 전국적 노동조합 조직, 위안부 증언 등 실질적 난제들이 종로나 서면이 아닌, 각자 서 있는 삶의 현장에 던져졌기에 더욱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3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1991년에 고여 있는 수많은 죽음들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1789년 그해, 절대 권력의 폭정을 스스로 끊고 모두에게 타고난 존엄이 있음을 선언했던 프랑스 혁명을 기억한다. 반면, 그 이후 왕정이 복고되었으며, 그 반동 정치에 다시 봉기한 1830년 7월 혁명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프랑스 혁명을 이야기할 때마다 떠올리는 들라크루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바로 그 7월 혁명을 묘사한 것이라는 사실도 종종 잊는다. 

영화 〈레 미제라블〉이 "대혁명으로부터 26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나아지지 않은 상황"이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는 사실도, 이 영화가 프랑스 사람들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는 1832년 6월 혁명의 좌절을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레 미제라블〉의 뮤지컬 넘버 '민중의 노래'를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와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어색한 일은 아닌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부터 1871년 파리 코뮌까지 장장 100년에 걸쳐 일어난 일이었다는 사실은, 기억과 망각이 알고 보면 한 몸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조망하는 파리와 페흐 라쉐즈 묘지 '파리코뮌 전사들의 벽' 앞에서 조망하는 파리는 다르다.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라는 웹툰 〈송곳〉의 명대사는 그 문장이 함의하는 공간적 위계를 뒤집어만 놓아도 또 다른 진리가 된다. 
      
망각의 벼랑에서 소중한 죽음들을 끌어올리는 일 

4년 전, 1988년 열여섯 나이에 수은중독으로 숨졌던 동년배 문송면의 이야기를 기고한 것을 시작으로 격월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사회적 죽음에 대한 기록들을 <참여사회>에 송고해 왔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왜 이렇게 힘든 이야기를 거듭 쓰고 있느냐는, 질문의 외피를 두른 질타를 많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미안함 반, 의기소침 반으로 그에 대한 진지한 답을 만들어볼 틈을 놓쳐왔는데, 이 기회를 빌려 그 이유를 굳이 글로 풀어보자면, 삶의 한복판에서 머뭇대고 있는 나를 그들의 죽음이 대신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난 30년 내내 떨쳐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더 낫게 만들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한 존재, 죽음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스스로 직면하고 숙고할 수 있는 존재가 이 땅에 살기 시작한 것은 우주의 지난한 역사와 비교할 때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삶의 한복판에 팽개쳐진 채 노동의 수고로부터 한시도 벗어날 길 없는 그 대부분의 개별 존재들에겐 불과 1년 전의 일을 기억하기도 버거운 긴 시간이 흐를 뿐이다.


그러다 보니 억지를 부려서라도 망각의 벼랑에 있는 작고 소중한 죽음들을 별 볼 일 없는 솜씨로라도 기록하고 싶었다. 아직도 해석을 필요로 하는 작고 역사적인 죽음들은 내가 지닌 서툰 희망 그리고 반복되는 절망들과 어디선가 만날 것이고 결국 우리들이 살고 있던 역사의 실존을 구성할 것이라는 믿음이 내게는 있다.

1991년 당시 거리에서 국가폭력과 동료들의 죽음에 포위돼 있던 젊은이들은 이제 그때 자신의 나이만큼 훌쩍 큰 자녀들의 부모가 되었다. 자신과 별반 다름없던 이들의 가슴 아픈 희생을 기억하는 이들, 우연한 생존의 시간을 감내해 온 이들은 죽음이 상실감과 무력감만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의 큰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1991년 5월이 특정 사람들의 선별된 기억만으로 봉인되지 않기를 바란다. 역사가 현실을 가둬버리는 곤경에 빠지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역사가 되어 나아가기 위해, 승리나 패배라는 단어로 환원되는 찰나적 논리를 벗어나 그들의 죽음들이 다시 돌이켜질 수 있기를 바란다.
 

김귀정 열사(1966~1991)의 생전 일기. 오는 25일, 김귀정 열사 추모 30주기를 맞아 열사와 그 어머니에 관한 다큐멘터리 〈왕십리 김종분〉이 선보일 예정이다 ⓒ 제공 권경원

 

1991년, 국가 폭력 앞에 몸을 던져 저항한 젊은이들과 그 후 30년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 <1991, 봄>(2021) ⓒ 너머북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권경원님은 다큐멘터리 영화 <1991, 봄> 감독입니다. 이 글을 <월간참여사회> 2021년 5월호에 실렸습니다.

#참여사회 #1991년열사투쟁 #1991봄 #강경대 #김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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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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