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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압구정 맞는데, 그 압구정은 아니에요

포도가 익어가는 충북 옥천 금암1리... 생채기에도 변함 없는 인심

등록 2021.06.27 16:21수정 2021.06.2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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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 압구정마을 ⓒ 월간 옥이네

  

충북 옥천 압구정마을 ⓒ 월간 옥이네


압구정(狎鷗亭). 고층 건물과 아파트가 빽빽한, 번화한 도시가 떠오르는 지명이다. 그러나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글자를 들여다보면, 그 뜻은 전혀 다르다.

압구정의 본래 의미는 '갈매기를 벗 삼아 지내는 정자'다. 조선시대 한명회가 직접 짓고 사랑한 정자의 이름이자, 자신의 호로 쓰기도 했던 '압구정'. 수많은 선비가 이곳을 출입하며 지은 시만 수백 편이다. 그때의 '압구정'은 도시화 물결에 휩쓸려 사라졌지만, 그때의 지명만은 남아있다.


사라진 압구정은 서울에만 있지 않다. 충북 옥천군 동이면 금암1리, 이곳에 또 하나의 '압구정'이 있다.

압구정 마을 이름의 유래

금암1리의 본래 이름은 '압구정 마을'. 마을로 향하는 길 입구에 자리 잡은 커다란 비석에는 마을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는 한시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평생 살아온 오교탁(79) 씨가 직접 지은 한시다.
 
용두산하 압구정 龍頭山下 鴨鷗亭
정무흔적 전설유 亭無痕迹 傳說遺
금강청수 불변류 錦江淸水 不變流
전야고금 비조락 前野古今 飛鳥樂

용두산 아래 압구정 정자
정자는 없어지고 전설만 남았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금강물은 변함없이 흐르고
앞길에는 새가 노니는구나

전설부(傳說賦) - 오교탁(吳敎鐸)
 
"정확한 때는 모르지만, 고려시대라고 추정을 하는 게지. 그때 여기에 '압구정' 정자가 있었다는 거여. 오리가 놀고 갈매기가 난다는 뜻이지. 뜻이 얼마나 아름다워. 그러다 150년 전쯤, 대수가 났다지. 그 홍수가 어찌나 엄청났던지, 정자가 그만 휩쓸려 사라졌다는 거야." (오교탁씨)
   
압구정동이 그랬듯, 이곳 압구정 마을에도 '압구정'이 있었다. 오교탁씨가 가리킨, 압구정 터는 이제 나무가 무성하고 앞에는 도로가 생겼다. 그 옛날의 풍경과는 다르겠지만 그의 한시 그대로, 건너편에는 금강이 도도히 흐르고 그 위로는 새가 난다. 압구정 터 가까이에는 이제 카페 겸 펜션 '밀'이 자리 잡았다. 변함없는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마치 사라진 압구정의 명맥을 잇는 듯하다.


서울 압구정동과 압구정 마을, 그 지명의 유래가 이렇게 비슷하다 보니 1994년, 한때 마을에서는 '압구정동과 자매결연을 맺자'는 목소리가 나온 적도 있다. 실제로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흥미로운 인연이다.
  

예전 압구정 정자에서 봤을 풍경 ⓒ 월간 옥이네


마을 앞에 생긴 고속도로

산업화가 한창이던 1970년대. 서울 압구정동에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생기던 무렵, 압구정 마을 앞에는 고속도로가 놓였다. 부산에서 서울을 잇는 경부고속도로였다. 마을 사람들은 평당 4만~5만 원 정도의 보상금을 받고 논과 밭을 내놓아야 했다. 같은 가격으로는 다른 곳에 동일 평수의 논밭을 살 수 없는,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당시에는 "정부에서 뭐 한다면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알았다.

"천칠백 평 정도 내놨지. 문전옥답이 도로 밑으로 들어간겨."

충분치 못한 가격에 1700평(5620㎡) 땅을 넘겨야 했던 것도 문제였지만 더 억울했던 것은, 고속도로 소음이었다. 당시 도로가 오교탁씨의 주택 10미터가량 앞,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어 이들 가족은 소음에 밤낮 시달렸다.

"텔레비전을 볼래도 밖이 너무 시끄러워서, 텔레비전 소리가 다 묻혀버렸다니까요. 차가 지나가면 방바닥이 들썩들썩할 정도였지."

고속도로가 개통될 무렵 이곳에 시집왔다는 오교탁씨의 아내 손정애(73)씨는 그때의 소음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 가족은 소음을 못 이기고 얼마 뒤 정든 집을 떠나, 마을 내 도로에서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집을 새로 지었다. 소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보다는 나았다.
 

오교탁씨와 손정애씨 ⓒ 월간 옥이네

 
경부고속도로 위의 차들은 주민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밤낮 쌩쌩 달렸다. 차라리 소리가 줄곧 들리면 좀 나았다. 밤중에 조용하다 별안간 자동차 소리가 왱, 울리면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그뿐일까, 도로에서는 종종 크고 작은 교통사고가 났다. 마을 앞 고속도로는 운전자 사이에서 '마(魔)의 도로'라고 불릴 정도로 사고가 잦은 구간이었다. 2002년 6월 16일 <동아일보>에서는 이 구간을 "금강을 횡단하는 금강2, 3교와 옥천터널을 지나는 이 구간은 급경사에 급커브인 데다 도로 모양도 '갈지(之) 자 형'이어서 조금만 방심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당시 30여 명이 사상을 입는 대형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사고 때문이었을까, 마을 앞 고속도로는 선형개량공사로 2003년 폐고속도로가 됐다. 금암1리 김연용 이장은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소음이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말한다.

술 남는 마을
 

공덕비 내용을 소개하는 오교탁씨 ⓒ 월간 옥이네

 
들이닥친 산업화 파도로 압구정 마을에는 이곳저곳 생채기가 났지만, 마을을 사랑하는 주민들의 마음만은 변함없다. 포도 농사, 벼농사, 각종 밭농사를 정성스럽게 일궈나가며 주민들은 각자 주어진 땅에 땀을 흘리고 서로 도와 살아간다.

"우리 마을만큼 인심 좋은 곳 없지."

압구정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오교탁씨의 '전설부' 시비 옆에 나란히 세워진 공덕비와 송덕비는 마을 인심을 보여주는 듯하다. 두 비에는 과거 200호가량 되던 마을에서 한 사람과도 등 돌리지 않았을 정도로 성품이 어질고, 베풀며 살아간 고(故) 오형렬 어른, 그리고 평생 마을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 봉사했던 고(故) 오재익 어른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모두 마을 주민들이 직접 세운 비석이다.

"시아버님이 참 점잖고 나쁜 소리 한번 없었어. 이것저것 잘하시는 것도 많아서, 마을 사람들 집도 지어주고 묫자리 봐주고 다 하셨지. 그러면서도 돈이라면 일절 사절하고 손해를 보면 봤지, 이득 보려 하지를 않으셨지."

손정애씨는 시아버지 고(故) 오재익 어른을 떠올리며 말했다. 멀리 담양에서 떠나온 시집살이였지만,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이 참 좋았더라고.

김연용 이장은 지금까지 오랜 시간 마을 일을 했지만, 자신도 신기할 만큼 지금껏 마을 사람들 사이에 싸움하는 모습을 본 일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술, 담배, 노름하는 이들도 별로 없다. 여름 초복에 마을 행사가 있을 때면, 술을 사다 놓기는 하지만 두세 병 정도가 빈 병으로 나오는 정도. 하는 수 없이 남은 술을 그대로 마을 창고에 넣어둔단다.

주민과 손님 위해 만든 포도터널

60호 정도로 이전에 비하면 인구수는 많이 줄었지만, 압구정 마을은 꾸준히 내일을 준비한다. 2015년 창조적 마을 만들기 사업, 2019년 농산어촌개발사업에 연이어 선정돼 특색있는 마을로 탈바꿈해나가고 있다. 포도 농가가 많다는 점을 살려 회색빛 칙칙했던 굴다리에는 포도를 그려 넣고, 마을 입구에는 아름드리 포도가 열리도록 터널을 조성했다. 새로 건설하는 경로당은 올해 공사가 마무리될 예정이다.

"인구가 자꾸 줄어드니까, 새로 경로당을 새로 지으면서도 걱정은 되지요. 한 10년 후에,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이렇게 포도 터널도 가꾸고 마을을 보살펴야지."
 

충북 옥천 압구정마을 김연용 이장 ⓒ 월간 옥이네

 
김연용 이장은 오늘에 최선을 다하며 마을을 살뜰히 돌보고 있었다. 압구정 마을 입구에서부터 있던 포도 터널은 그의 집 마당에도 아름드리 드리워져 있었다. 본래 그의 집 마당에 가꾸던 것을 시작으로, "포도 터널이 보기 좋다"고 말하는 주민들의 의견을 듣고 마을 입구에도 가꾸어보기로 했다고. 그의 집 마당 포도 터널에는 자그마한 그네 하나가 걸려있었다.

"우리 손자, 손녀들 오면 타라고 만든 그네지. 아직 포도알이 작은데 이제 금방 보기 좋아진다고. 자식이나 외지인들이 우리 마을을 찾아와주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포도 터널을 만들어요."

압구정 마을에서는 오늘도 주민들의 마음이 담긴 포도가 알알이 익어간다.

월간옥이네 통권 48호(2021년 6월호)
글·사진 한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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