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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생에게 에어프라이어는 '사치'일까요?

음식을 데우고 살 수만은 없어서 15만 원짜리 기계를 들이고 생긴 일

등록 2022.11.29 18:08수정 2022.11.2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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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나의 자취 식탁이 조금이라도 멋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테이크나 광어회는 아닐지라도, 조금은 따뜻하고 풍미 있는 음식을 즐기고 싶다. 살기 바쁘다고 항상 전자레인지에 2분 30초 데운 즉석밥만 먹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 이유에서 에어프라이어를 샀다. '16L 대용량 스텐 오븐형'이다. 가전제품은 거거익선이라는 말에 홀리고 말았다. 전기밥솥보다 더 큰 크기의 에어프라이어가 도착했다. 자취생에겐 제법 큰 사치다. 전자레인지처럼 없으면 냉동식품을 못 데우는 것도 아니요, 전기밥솥처럼 밥을 못 짓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단순히 '더 맛있게' 먹고 싶어서 약 15만 원을 투자한 것이다.

에어프라이어의 뜨거운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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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프라이어 ⓒ 정누리

 
이렇게 된 이상, 이 친구의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신입사원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온갖 일을 도맡아 하듯. 맨 처음은 돼지 안심 스테이크다. 사람들이 꼭 굽기 전에 종이 호일을 깔라는데, 고기 밑을 말하는 건지, 기계 하부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내 선택은 후자다. 고기를 스텐망에 깔고, 기계 하부에 종이 호일을 넣는다. 열풍이 불면서 종이 호일이 팔랑팔랑 날아다닌다. 이래서는 쓸모가 없어 보인다. 다시 문을 열고 호일을 뺀다. 기름 받침대에 돼지 기름이 뚝뚝 떨어진다.

정신 차려보니 기름이 넘쳐 연기가 피어 오른다. 화재경보가 켜지기 전에 후다닥 문을 연다. 앗 뜨거. 손 데였다. 돼지고기는 다 타버렸다. 질겅질겅. 껍데기가 폐타이어보다 딱딱하다.

그 뒤로 다양한 요리를 망쳤다. 라따뚜이, 연어 스테이크, 라자냐…. 설익거나 까맣게 타버린 채소와 생선을 보니 화가 난다. 기계 쓰기가 뭐 이렇게 어렵나. 내 손이 문제인 건가. 난 이렇게 까다로운 조리 도구를 달랠 만큼 여유로운 자취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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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프라이어에 구운 새우깡 ⓒ 정누리

 
씩씩거리며 주방에 있던 새우깡을 에어프라이어에 넣어버렸다. 아무거나 대충 구워보라지. 180도에 5분. 정성도 투자도 없는 메뉴. 뜨거운 새우깡이 됐다. 입에 넣자마자 씹는 소리가 다르다. '바삭'이 아니라 '와자작'이다. 난 번개 맞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CF에서나 듣던 소리인데.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새우가 30마리는 든 맛이다. 뭐지? 이 풍미는?

엄마가 사다 준 버터 쿠키도 데워 본다. 느끼해서 하나 먹고 구석에 넣어 놨던 것이다. 이건 180도에 7~8분. 이야, 봉주르. 갑자기 프랑스에 온 느낌이 든다. 바삭하고 따뜻하고 깊은 맛. 우와, 이거 정말 요술 상자네.

인생이 고달픈 건 나 때문이 아닐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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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 정누리

 
하지만 난 과자나 데우자고 15만 원짜리 기계를 산 것이 아니다. 다시 한 번 해보자. 내가 요리를 망친 이유는 너무 빨리 결과를 보려고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자레인지형 사고방식'에서 '오븐형 사고방식'으로 바꿔보자. 겉에서부터 차근차근, 속까지 은근히 스며들게.

그날 나는 손질된 생닭을 사왔다. 우유에 2시간 정도 푹 담가 잡내를 없앤다. 올리브유와 소금으로 정성스럽게 염지한다. 20분 정도 재운 뒤 스텐망에 종이호일을 깔고, 그 위에 차곡차곡 염지 닭을 올린다. 후추를 솔솔솔, 그 다음 180도에 15분씩 뒤적거리며 반복. 완성! 완벽한 치킨이다.

프랜차이즈점보다 풍미 있는 치킨이다. 식탁에 올려놓고 사진을 찍는다. 집에서 해먹는 로스트 치킨이라니, 정말 근사하다. 단톡방 친구들은 이젠 닭집까지 차렸냐며 박수를 쳐준다.

어쩐지 가슴이 찡해진다. 내가 원하던 그림이다. 최고급 재료를 쓴 것도, 요리 실력이 늘어난 것도 아닌데, 조리 도구 하나 들였다고 식탁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생고구마도, 잔기지떡도, 먹다 남은 족발도 에어프라이어만 들어가면 새것이 된다. 이 도구의 매력은 '소생'이다.

어쩌면 우리도 새우깡 아닐까. 지금은 비록 세월을 좀먹어 흐물흐물하지만, 언제든 환경만 바뀐다면 곧바로 뜨겁고 풋풋해질 존재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를 탓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답은 재료가 아니라 환경에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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