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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백마탄 여장군' 김명시 기림일, 독립영웅 기억해야"

열린사회희망연대, 윤석열 정부 서훈한 지난해 부터 '사망 날짜'에 기려

등록 2023.10.10 13:57수정 2023.10.10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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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열린사회희망연대 회원들이 창원마산에 있는 김명시 장군 생가 표지석을 찾았다. ⓒ 윤성효

 
윤석열 정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건국훈장을 추서했던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1907~1949) 선생의 기림일을 맞아 시민들이 생가터 표지석에 꽃을 놓고 기렸다.

열린사회희망연대가 10일 오전 창원 마산합포구 창동 문화광장 옆에 있는 '김명시 장군 생가터 표지석'에서 '김명시 기림일' 행사를 열었다. 이 단체는 지난해 서훈 이후부터 김명시 선생이 사망한 1949년 10월 10일을 '김명시 기림일'로 정해 추모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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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열린사회희망연대 회원들이 창원마산에 있는 김명시 장군 생가 표지석을 찾았다. ⓒ 윤성효


마산에서 태어나 옛 마산공립보통학교(1924년, 지금의 성호초교)를 나온 김명시 선생은 나이 19살이던 1925년 모스크바에 유학했고, 1927년 상하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김명시 선생은 1930년 하얼빈 일본영사관 공격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1932년에는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혹독한 심문을 받고 7년간 옥고를 치렀고, 이후 출옥하여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다.

1942년 조선의용군 여성부대를 지휘했던 김명시 선생은 '여장군' 호칭을 얻었고, 두 손에 총과 확성기를 들고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모습에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리었다.

김명시 선생은 해방 이후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극렬한 이념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부평경찰서에서 사망했다. 올해로 74주기를 맞았다.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23일자 기사에서 "조선의 잔 다르크 현대의 부랑(夫娘), 연안서 온 김명시 여장군 담(談)"이라고, <독립신보>는 "백마 탄 여장군"으로 표현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묻힐 뻔한 여성 항일독립영웅 김명시>를 펴내고 오는 25일 출판기념회를 연다. 이춘 작가가 쓴 이 책은 400쪽 분량으로, 김명시 장군의 출생과 성장기, 항일무장투쟁과 투옥, 해방후 활동, 잠적기 뿐만 아니라 서훈 추서 등 과정이 담겨 있다.


기림일 행사에 함께 한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고문은 "조촐하게 김명시 장군을 기리며 헌화했다"라며 "최근 홍범도 장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김명시 장군 이야기를 하면 마음이 새삼 아프다. 윤석열 정부는 느닷없는 이념전쟁을 일삼고 있다. 더 이상 역사가 왜곡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이순일 상임공동대표는 "김명시 장군의 기림일을 맞아 생가터에 헌화하며 조촐하게 기렸다"라며 "오는 25일 책 출판기념회를 앞두고 있어 더 의미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고호진 공동대표는 "이념 대립 속에, 김명시 장군이 부평경찰서 돌아가셨을 때 직업란에 '무직'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친일 조두남 기념관에 반대하며 밀가루를 던졌을 때 언론은 김영만 고문의 직업을 '무직'이라고 했다"라고 기억했다.

그는 "해방 직후만 해도 언론은 김명시 선생은 '백마 탄 여장군'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좌우 대립 속에 돌아가셨을 때는 무직이라고 했다. 돌아가신 상황도 석연치 않았지만 우리 사회가 목숨 걸고 독립운동한 사람을 무직으로 표현했다. 우스꽝스럽다"라며 "독립영웅에 대해 우리 사회가 제대로 대우하고 기렸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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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에서 온 유학생 비테 사니타(Bite Sanita)씨와 김영만 고문. ⓒ 윤성효


이날 헌화 행사에는 라트비아에서 온 유학생 비테 사니타(Bite Sanita)씨도 함께했다. 베테 사니타씨는 현재 부산대 사학과(2년)에 재학 중이다.

그녀는 "원래 해방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최근에는 사회주의 여성의 해방운동에 관심이 많아졌다"라며 "김명시 선생을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더 깊은 연구가 없는 것이 큰 아쉬움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베테 사니타씨는 "라트비아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는 게 꿈이다"라며 "김명시 선생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춘 작가는 "오늘은 74년 전 김명시 장군이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날이다"라며 "당시 신문들이 일제히 단신으로 김명시의 부고를 전했다. '조선의 잔다르크'도 부족해 조선의 자랑이라던 김명시가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명시의 피검 날짜와 사유, 자살 방법, 사망 시간이 각기 달랐다. 김명시의 신분을 북로당 정치위원이라 밝혔지만 그런 직책은 있지도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이 작가는 "74년이 지났다. 작년에서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고, 10월 7일 첫 기림일을 가졌다"라며 "이번 책 출판에 대해 기자들이 묻는다. 소설이냐? 김명시 평전이냐? 솔직히 둘 다 아니다. 첫 출발이 자료집이었다. 김명시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추적했다. 김명시에 관련된 많은 기사를 서일범씨의 노력으로 발굴할 수 있었다"라고 부연했다.

여러 자료를 모아 정리한 이 작가는 "김명시 연설문과 인터뷰 기사를 통해 당대 최고 투사였을 뿐 아니라 대단한 선동가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김명시 평전을 쓰기엔 자료나 무엇보다 역량이 부족했다. 겸손해도 너무 겸손해 해방 후 김명시 기사에 따라다니는 평은 이채(異彩)롭다는 것이었다"라며 "두드러진 경력과 연설에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던 그녀가 무엇을 기억해 주길 원할까? 답은 명확했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가 아니라 그 시대를 써달라고 할 것 같았다"라고 했다.

이춘 작가는 "김명시를 비롯해 형제와 동지들 누구도 자신들이 목숨 걸고 싸운 조국의 독립이 분단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일제하에서 핍박받던 자신들의 신념이 해방된 조국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폄하되고 왜곡되고 죄가 될지 몰랐을 것이다. 그랬기에 '왜 내가 그 형극의 삶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나보다 형제와 동지를 잊지 말라'고 할 것 같았다"라고 했다.

이어 "그래서 김명시와 한 시대를 함께 헤쳐 나갔던 형제와 동지들의 삶을 기록했다. 그리고 김명시 장군이 어떻게 고향의 품으로 돌아오고, 김명시를 역사에 소환시킨 1945년생이 겪은 한국 현대사를 적었다"라며 "불의의 시대에 저항이 의무임을 상기시키고 싶었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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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열린사회희망연대 회원들이 창원마산에 있는 김명시 장군 생가 표지석을 찾았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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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시 장군 생가 표지석. ⓒ 윤성효

#김명시 장군 #독립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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