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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 또래 위의 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의 첫 외식메뉴는 자장면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괜찮은 성적표라도 받아든 날이거나, 아니면 지레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지 않던 무료한 어린이날 오후라도 외식을 하자고 칭얼거렸다면 대개는 자장면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 더 학년이 올라가고, 집안 살림도 조금 나아지면서 '자장면'이란 '외식'과 동의어라는 등식을 깨버린 음식이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돈가스였다.

자장면의 매력이라면 뭐니뭐니해도 그 고소하고 달콤한 맛에 있다. 김치 대신 나오는 단무지도 그랬고, 부모님의 기분이 아주 좋았다거나 해서 추가되는 탕수육이나 군만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도대체 맵거나 짜거나 쓰거나 한 흠이라고는 전혀 없이 오로지 달고 고소한 맛. 자장면이 거의 모든 꼬마녀석들의 입맛을 단 한 번에 사로잡는 비결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돈가스가 가지는 매력이라는 것은 조금 다르다. 물론 빵가루를 묻힌 채 기름에 튀겨진 돼지고기의 고소한 맛을 제쳐둘 수야 없겠지만, 돈가스라는 이름이 내 가슴 속에서 가졌던 울림은 자장면의 그것과는 성격이 분명히 다르다.

음식이란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먹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마저 뒤집히는, 그래서 과일 깎을 때 어머니만 만져볼 수 있지 나 같은 꼬마들은 되도록 멀리해야 할 칼을 들고 식사를 한다는 신기한 체험. 그리고 밝은 곳에서 조용히 먹어야 한다는 할머니 말씀도 무색케 하는 침침한 조명과 음악소리.

'어서 옵쇼', '짜곱 둘, 탕슉 하나'하는 자장면집 카운터의 신명나는 번잡함과는 영 딴판의 조곤조곤하고 착 가라앉은 공기. 말하자면 돈가스는 그 자체의 맛보다는 그것을 담은 접시, 그것을 자르고 찍는 나이프와 포크, 그리고 그것을 감싸는 조명과 음악과 웨이터의 나직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와 묶인 하나의 문화체험이며 소꿉놀이였다.

1.

초등학교 삼학년쯤 되었을 것이다. 그 날은 아마 오전반이었나보다. 평일인데도 그 날은 대낮에 방에서 빈둥거리고 있다가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테레비 밑에 서랍에 보면 빨간 아빠 도장 있을 거야. 찾아봐."
"빨간… 도장? 없는데?"
"왜 없어? 잘 봐. 도장 주머니에"
"아, 도장 주머니에? 음… 아, 여기 있다."
"그래 있지? 그거 들고 지금 부평 역으로 나와."
"부평역? 동암역이 아니고?"
"그래, 부평역. 전철 타고 와."
"응, 알았어."

은행에서 다른 볼일을 보다가 버리려던 빈 통장 하나에 남아 있는 칠 천원을 발견한 엄마는 당장 나에게 전화를 했고, 나는 당장 전철 두 정거장을 달려 도장을 들고 나갔다. 그리고 단김에 뺀 쇠뿔처럼 손에 넣어진 그 '공돈 같은' 칠천 원을, 엄마는 즉석에서 다 써버리기로 결심했었나보다.

"우리 은식이, 맛있는 거 뭘 사줄까?"
"쪼꼬렛."
"아니, 그런 거 말구 더 맛있는 거. 점심 대신 먹을 거."
"점심 대신?"
"응, 식당에서 파는 거."

아마 식당에서 파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또 어쩌면 식당에서 파는 음식보다도 쵸콜렛이 더 맛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식당에서 파는, 쵸콜렛보다도 더 맛있는 것'을 떠올리려니 머리 속은 가닥도 없이 막막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버거운 상상에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사이, 엄마는 벌써 괜찮은 생각을 떠올렸다는 듯이 한창 들뜬 목소리로 물어왔다.

"너 양식 안 먹어봤지?"
"양식이 뭔데?"
"돈가스, 스테이크 이런 거."
"그게 뭔데?"
"아무튼 그런 거 있어. 맛있는 거. 오늘 은식이 양식 한 번 먹여야겠구나."

그래서 그 날 부평역 앞 어느 경양식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돈가스를 맛볼 수 있었다. '돼지 돈(豚)'자에 '얇게 저민 고기'라는 뜻의 영어 '커틀렛(cutlet)'을 갖다붙인 일본식 짬뽕 영어 '돈가스'. 사연을 알고 나서는 아무래도 조잡스런 이름이라 굳이 '포크 커틀렛'이라고 부르지만, 그때만 해도 왠지 멋진 이름의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바이올린 연주곡이 울리는 은은한 실내조명의 그 경양식집 높은 의자에서 나는 두 다리를 달랑거리며 고기를 썰어먹고 있었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양 손에 나눠 쥐고 밥상에 앉으면 장난치지 말라고 야단을 맞곤 했지만, 양 손에 칼과 포크를 나눠 쥐고 먹으라는 것도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다. 나이프 앞쪽엔 톱처럼 엇선 날이 있는 것이 재미있어, 아주 톱질을 해서 자르기도 했다.

"엄마. 이건 양손으로 먹는다고 해서 양식이야?"
"아니, 서양 음식이라고 해서 양식이야."
"그럼 서양식이라고 하지 왜 양식이라구 그래?"
"그냥 그렇게 불러. 얼른 먹기나 해."

요즘에도 가끔 돈가스 한 접시를 다 못 비울 때가 있다. 그런데 그 날은 바삭바삭하고 달콤한 이 고기요리 한 접시를 금세 다 비울 수 있었다. 납작한 접시에 깔린 밥을 뜨기가 어려워 좀 흘리기도 했고, 좀 질긴 힘줄이 지나는 부분이었는지 칼질에 힘을 너무 많이 주었다가 물 잔을 엎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즐거운 식사였다. 돈가스 먹기는 그렇게 '맛있는 일'이기 이전에 '신나는 일'이었다.

2.

그런데 거창하던 자장면이 지금은 동석할 친구도 없는 길거리에서의 궁색한 한 끼니 거리로 전락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보다 몇 배 화려하던 이 돈가스마저 별다를 바 없이 심상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요즘에도 돈가스 접시를 대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한 순간 숙연해지기도 한다.

십여년 전, 대학 이학년 여름방학 동안 나는 반월공단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흔히 공활(공장활동)이라고 부르는 것이었고, 취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대입 삼수 실패생'이라는 조작된 이력을 달고 있어야 했다.

중소기업들이 주로 들어선 반월공단이라는 곳이 워낙 노동자들의 이동이 잦은 곳이어선지, 그곳에서 만난 것은 한평생 기름밥에 찌들며 다져진 노동자계급의 거친 생명력이기보다는 고졸 학력의 자기 한계 속에서 꿈틀거리며 삶을 키워가는 또래의 젊은이들이었다.

기껏 공장이라는 곳을 배우려고 들어갔으면, 기숙사까지 따라가서 그들과 축구도 하고, 비디오도 보고, 짤짤이도 하면서 살았어야 했다. 그런데 작업시간만 끝나면 냉큼 자취방으로 돌아와 주변의 다른 공장에 취직한 몇몇 동료와 총화를 하고 세미나를 한답시고 나는 공장에서 '아웃사이더'가 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나마 이유를 알 수 없는 친밀감으로 동생 취급을 해주던 '박기사'라는 사람 덕분에 끼어들 수 있었던 월급날의 회식자리가 그나마 그곳 젊은이들과 가졌던 몇 안 되는 소통의 기억이다.

"어이, 은식아. 오늘 저녁에 삼겹살이나 먹으러 가자."
"오늘이요? 오늘도... 들어가봐야 되는데."
"얌마, 오늘 월급 타잖어. 기숙사 형들이랑 소주 한 잔 해야지."
"소주요?"
"그래. 그리고 1반 이쁜이도 온다구 그랬으니까, 꼭 와."
"1반 이쁜이요?"

나는 작업 2반, 그 '이쁜이'라고 불리는 여자는 작업 1반이었다. 기분 좋은 고양이같은 인상을 가진, 동그란 얼굴의 귀여운 여자였다. 나보다 한 살 아래였고, 점심시간에라도 마주치거나 간단한 이야기라도 나눠야 할 경우에는 존칭을 쓰기도, 반말을 쓰기도 어색해하던 사이였다. 그저 나이도 비슷한데다 가끔 마주치면 둘이 민망해하는 꼴이 재미있었던지 사람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우리 둘을 묶어대기 시작했고, 그 날도 그 비슷한 호기심과 짖궂음으로 우리는 안산 시내 어느 삼겹살집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히게 되었다.

그렇게 어색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시간이 흘렀고, 주저주저하며 받아 마신 소주도 꽤 한 병 가까이 오르고 있었을 것이다. 왁자지껄하던 말소리와 웃음소리도 조금씩 잦아들고, 우리 테이블의 대화는 두 개로, 네 개로 세포분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쁜이가 나에게 말을 붙였다. 공장 안에서 듣던 '이거 가져가세요, 저쪽이에요'하는 식의 짤막한 말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대구 근처 어딘가일 듯도 한 사투리의 억양이 약간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

"공장 오기 전에 뭐했어요?"
"대학에 갈려구요, 공부하다가... 안 돼서 돈이나 벌려구요."
"어디서요? 서울에서요?"
"네."
"그러면, 하루 종일 학원에서 공부하고 그랬겠네요."
"음... 하루 종일 공부했으면 대학에 갔겠죠. 시내도 돌아다니고, 당구도 치고..."
한 자락 누그러뜨리느라 던진 한마디에 이쁜이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럼 명동에도 가봤겠네요."
"명동이요? 네, 물론 가봤죠."
"거기 사람 되게 많죠?"
"많죠."
"저도 거기 한 번 가봤거든요. 그 때, 머한다고 그랬는가는 모르겠는데, 월차 내고 거길 갔는데 평일 낮인데도 사람들이 억수로 많은 거예요. 그래서 '와, 이 사람들도 다 월차 내고 나왔는가' 싶데요. 그 사람들은 다 뭐 하는 사람들이래요?"

언제 떴는지는 모르지만 술을 마실수록, 그리고 말을 할수록 조금씩 짙어지는 고향 말씨. 이쁜이는 아마도 한적하다 못해 반월공단만큼이나 답답했던 시골 어디선가 학교를 마치는 대로 이곳 공장으로 흘러들었던지, 평일 근무시간에도 끊임없이 어깨를 부딪쳐오는 명동거리의 사람들이 신기했던 것이다.

"평일 낮이래도... 명동에는 서비스업종, 그러니까 식당이나 미용실이나 그런 데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리고 성당이 있으니까 신부님이나 수녀님도 있고... 또 저 같은 재수생도 있고..."

생각치도 못한 급소 어딘가를 찔린 것처럼, 나는 성당의 신부님까지 끌어다대며 그 수천 명의 알리바이를 대기 위해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되는대로 싱글거리며 듣던 이쁜이는 마저 마침표를 찍었다.

"그 때, 명동 가서 돈가스 먹어봤거든요. 근데 고기는 이따만한 거 주고 밥은 한 두 숟갈 주더라구요. 그래서 '이거 밥 다 준 거예요?'하니까 종업원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 서울 사람들이 이런 거 먹고 사는구나 했어요. 뭐 고기가 좀 맛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거 한 접시에 칠천 원 하더라구요. 삼겹살 구워먹는 게 낫지..."

지하철 4호선을 타면, 일직선으로 한 시간 반을 넘지 않을 안산과 명동. 그 사이에는 이쁜이가 넘기 어려운 강이 가로놓여 있었다. 한 달 사십여 만원을 벌기 위해 매일 잔업 한두 시간을 보태느라 퇴근하고 방으로 돌아온 아홉 시, 주말이면 대여섯 시부터는 잠을 자고 편지를 쓰고 하이틴로맨스를 읽느라 이쁜이는 딱히 볼 사람도 없는 서울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가끔 이 돼지고기튀김 접시를 마주하고, 어쩌면 즐겨 읽는 로맨스 소설 속 풍경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을지, 이쁜이가 딱 한 번 경험해본 돈가스의 생경함이 가끔 떠오른다. 그리고 나도 느꼈던 그 신기한 화려함이 또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못 오를 나무 위 외계인들의 음식'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생각한다.

길지 않았던 인연으로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이쁜이, 그도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어쩌면 일찌감치 좋은 짝을 만났으면, 연휴 뒤끝에라도 아이에게 치마꼬리 잡혀 자장면집을 드나들고 있을지. 혹 아직 그곳 공단 어딘가에서 호봉 쌓는 즐거움에 살고 있다면, 주 5일 근무제라도 빨리 시행되면 가끔 명동나들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요즘엔 명동보다 훨씬 신기한 강남역 거리나 압구정동 거리도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한 번 원정을 계획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김은식의 홈페이지 : http://www.kes.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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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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