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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방'은 없었다. 제17대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정동영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헌정사상 최초의 '정권 재탈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선 정국 내내 나라를 온통 혼란에 빠뜨린 BBK 사건 여파는 이른바 '이명박 특검'의 이름으로 이명박 당선자를 계속해서 괴롭힐 태세다. 진실과 거짓의 문제는 압도적인 지지와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번 대선을 최악의 대선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온갖 의혹이 대선 막판까지 난무하면서 정책선거가 실종된 것은 물론, 그 결과로 찍을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나 또한 이번 대선이 최악이라는 데에 동의하지만 그 이유는 좀 다르다. 이번 대선에서는 정말로 중요한 질문 하나가 빠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좌파정권 종식·정권교체' 구호는 옳았나

 

혹자는 이명박 당선자가 내세운 '좌파정권 종식'이나 '정권교체'가 그 답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전혀 좌파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좌파정권 종식'이라는 구호는 그 설정 자체에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기업들이 관행적으로 해오던 분식회계를 못하게 하는 것을 두고 '좌파정권의 반기업 정책'으로 규정하는 것은 오류다. 선진국에서는 이런 식의 이중장부가 당연히 범죄행위에 해당한다. 대북 퍼주기 논란도 비슷하다. 김대중-노무현 10년 동안 북한에 들어간 정부-민간의 모든 물자가 기껏해야 연평균 5천억원 수준인데 반해 이명박 당선자가 준비 중인 대북 퍼주기는 적어도 연간 수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또한 경제파탄의 책임을 물어 정권을 심판한다고 하지만 불과 10년 전에 나라를 절단낸 당사자가 바로 한나라당이고 그에 대한 책임이 제대로 지워지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정권을 교체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경제파탄에 대한 진단과 책임 또한 상당히 자의적이다. 예컨대 대형할인점 때문에 재래시장이 죽어가는 것을 두고 "이게 다 노무현 탓"이라고 하는 것은 다분히 정략적이다.

 

경제대통령으로 포장된 이명박 당선자의 능력이 대선과정에서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고 오히려 각종 의혹과 의구심만 커졌다는 점도 이것이 잘 된 정권교체인가 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이렇듯 한나라당과 이명박 당선자가 이번 대선에서 내세운 정권교체와 경제 살리기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냉정하고 과학적인 분석에 기초해서 나온 결과물이라기보다 다분히 정권탈환을 위해서 기획된 정략적 산물에 가깝다. 여기에는 조중동 같은 보수언론도 큰 몫을 했다.(지난 기사 참고) 그러다보니 다른 중요한 국가적인 이슈들은 대선 기간 내내 거의 다 묻히고 말았다.

 

대선은 한 나라의 권력구조를 통째로 바꾸는 행사다. 그렇기 때문에 한 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대중적으로 고민하고 그 답을 구하는 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을 맞이하는 우리의 질문은 무엇이어야 했으며 어떤 해답을 찾아야 했을까.

 

국방과 외교 빼놓고 경제에 올인? '사기'에 가깝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나라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국방과 외교다. 한국처럼 강대국에 빙 둘러싸인 약소국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얼마 전 일본에서 최신예 F-22 전투기 구매의사를 밝힌 것만으로도 동북아가 발칵 뒤집혔다. 한반도는 지금 세계 유일의 냉전지역이면서도 급속하게 탈냉전의 기류를 타고 있다. 전통적인 북중 관계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고 무엇보다 북미수교는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다. 남북한은 반세기 넘게 지속된 정전상태를 곧 종식시킬 태세다.

 

우리는 남한이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닌 것을 매우 부끄럽게, 그리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전쟁의 당사자이고 가장 많은 희생을 감수했으면서도 정작 그 판에서 주인노릇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당선자는 자신의 임기 중 종전 선언의 일주체로 참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종전선언의 일주체가 되는 것도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종전선언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동북아에 거대한 지각변동을 몰고 올 것이며 새로운 힘의 균형점을 찾아 나서는 시발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이에 어떤 입장과 계획을 가지고 임할 것인가는 대한민국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는 이에 대한 전략적인 고민과 토론이 전무했다. 당장에 종전선언이 되면 '휴전선'이라는 개념 자체가 의미를 상실한다. 155마일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방어선이 이제는 무의미해진다는 뜻이다.

 

동북아의 탈냉전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국방의 개념(단순히 군사적인 개념을 넘어 선)을 요구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다. 지역 내 새로운 군비경쟁에 대한 우리의 대처방안은 무엇인지, 힘의 공백을 메울 새로운 균형점은 어디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번 대선에서 누락됐다. 원유 전량을 수입하며 대외 무역 의존도가 매우 높은 우리 실정에서 국방과 외교를 빼 놓고서 경제문제에 올인한다는 것은 사실상 '사기'에 가깝다.

 

외교는 국방과 동전의 양면이다. 이명박 당선자의 외교역량은 후보 시절의 이른바 '꼼수 외교'에서 선보인 바 있다. 4강 정상과의 회담이 줄줄이 무산되자 경제실리 외교를 한다고 말했지만, 외교에는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문제들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 이명박 당선자와 한나라당이 우려스러운 이유는 그들의 단순한 외교역량이 걱정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외교 자체를 바라보는 관점이 천박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와 주변 상황에 대한 명확한 사태인식과 이를 돌파할 철학이 굳건하지 않으면 100여 년 전처럼 강대국들이 짜 놓은 판에 이리저리 끌려만 다니다가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명박 정권의 등장... 돈으로 안되는 것은 없다?

 

시선을 국내문제로 돌려 보더라도 우려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 당선자가 경제회생에 대한 부담감으로 무리하게 경기부양책을 쓰다가 심각한 부작용에 직면할 것을 경고한다.

 

이명박 당선자와 한나라당이 조중동의 도움을 받아 이번 대선에서 구축한 '경제프레임'은 매우 훌륭하게 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유권자들은 그 뒤에 가려진 진실을 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제시된 경제문제 자체가 올바르고 공정하게 정의된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이 우선 중요하다.

 

이명박 후보의 당선으로 말미암아 한국 정치는 친일 정권과 군사독재 정권, 민주화 정권을 거쳐 '재벌정권'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15년 전 정주영 전 회장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 혹은 2002년 대선에서 정몽준 의원이 출마했을 때 재벌가의 노골적인 정계진출을 경계하던 눈초리도 이번 대선에서는 이미 사라졌다. "세상엔 돈으로도 안 되는 게 있다"에서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다"로 바뀌었다. 이명박 당선자가 비록 혈연적으로는 재벌가 출신은 아니지만 그의 화려한 경력과 대선 막판 정몽준과의 결합은 새 정권을 재벌정권으로 봐도 무방하게 해 준다.

 

이미 그의 친재벌 정책들이 법인세 인하나 금산법(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 완화에서처럼 줄줄이 예고돼 있다. 일각에서는 삼성-이명박-검찰의 3각 커넥션을 거론하며 삼성 비자금 수사와 BBK 수사 등에서 검찰이 이명박과 삼성의 손을 들어 줄 것이라는 관측이 이미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권력구조가 사회의 힘 있는 세력들 중심으로 구축되면 그 구조는 바뀌기 어렵다. 사회 계층 간의 수직적 이동이 원활하지 못했던 것이 로마 멸망의 한 원인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언론권력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10년간 야당노릇을 해 온 것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사실상 조중동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사즉생의 각오로 정권에 맞서왔을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다수의 조중동 인사들이 이명박 캠프에 합류해서 정권창출을 도왔으니 지난 5년, 10년 간 그들의 노고를 더해서 생각해 보면 이들이 정말 정권의 주인라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니지 않을까.

 

이렇게 되면 결국 국민의 눈과 귀까지 새로운 체제가 모조리 장악하게 된다. 한국판 빅브라더, 혹은 <매트릭스>가 이명박 시대에 출현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것이다.

 

앞으로의 5년... 반대자들, '이명박의 실패' 증거보다 비전 먼저 찾아야

 

마지막으로 걱정스러운 점은 새로운 부패 고리의 탄생 가능성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문민정부를 연 이래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지난 15년간 최고 권력자가 직접 비리에 연루되거나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은 적은 없었다. 고위 공직자의 청렴도가 눈에 띄게 향상되었고 부당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은 큰 대가를 감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명박 당선자는 이미 위장전입과 자녀들 위장취업의 경력에 더해 각종 부정비리 의혹이 현재진행형이다. 그 때문에 이명박 당선자를 중심으로 얽힌 인맥, 학맥이 새로운 부패의 축을 형성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더 나아가 당선자의 친 재벌 정책으로 인해, 관행으로 치부된 비리가 제도적으로 합리화될지도 모른다는 점도 극히 우려스럽다.

 

일각에서 예상하듯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선자의 반대자들은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치 지난 5년간 노무현의 반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 나라가 망해가는 증거를 수집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진다.

 

하지만 어쨌든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고 성공적인 민주화의 역사를 가진 나라라면,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국가 전체로서의 안정성과 항상성을 가질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그 속에서 새로운 비전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반이명박 진영'은 5년 후에도 그 지리멸렬함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태그:#이명박,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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