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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와 쌈채소 씨앗을 조밀하게 뿌렸더니 빼곡하게 자랐다.
 상추와 쌈채소 씨앗을 조밀하게 뿌렸더니 빼곡하게 자랐다.
ⓒ 조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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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작물의 재배가 아니라 인간의 수양과 완성에 있다."(후쿠오카 마사노부)

우리에게도 텃밭이 생겼다. 지난 3월, 충남 금산군 남이면 활골마을로 귀촌 후 생긴 가장 큰 변화다. 비유하자면, 오래 전 운전면허를 취득한 '장롱면허'에게 갑자기 자동차가 생긴 기분이랄까. 물론, 내게 무슨 면허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낯설고 어색하지만 반갑다는 뜻이다.

사무실의 작은 화분 하나조차 죽일까 봐 전전긍긍했던 내게 10평 남짓의 텃밭은 '장롱면허'가 5톤 트럭을 몰게 된 형국이었다. 그러나 마을에는 온통 '베스트 드라이버' 천지였다. 혼자서라면 씨를 뿌리기조차 조심스러웠으나 동네 어르신들의 지도편달로 인해 무사히 도로주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한번 텃밭에 발을 들여놓으니 계속해서 뭔가를 심게 됐다. 지난달에 재물조사를 해보니 심어놓은 작물의 모종수가 상당했다. 가지 2, 감자 44, 강낭콩 4, 고구마 29, 고추 55, 곰취 13, 대추토마토 4, 부추 15, 상추 다수, 쌈채소 다수, 옥수수 35, 완두콩 31, 토마토 4, 파 다수, 파프리카 2, 호박 4.

누군가의 말처럼 "이것저것 많이 심어서 부자"가 된 듯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닥치는 대로 심어 가능한 한 많이 거두려는 욕심처럼 느껴졌다. 두고 온 줄 알았던 도시의 탐욕이 시골의 텃밭에서 발현된 듯했다. 아는 게 없으니 계획을 세우기 어려웠고 해본 적이 없으니 적정선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는 게 변명이라면 변명이다.

호박을 수확하다

올해 처음으로 수확한 호박
 올해 처음으로 수확한 호박
ⓒ 조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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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첫 호박을 수확했다. 읍내에서 모종 4개를 사서 5월 4일에 심었으니 거의 두 달 만이다. 퇴비나 비료도 없이 척박한 텃밭 뒤쪽에서 소리 없이 잘 자랐다. 며칠에 한 번 물 뿌린 게 전부인데 사방으로 뻗친 줄기에 호박이 달리는 게 신기했다.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데 언제 수확하는 게 좋을지 몰랐다.

동네 어르신께 여쭤봤더니 지금 크기를 물으셨다. 두 뼘쯤 된다고 했더니 너무 크다면서 바로 따라고 하셨다. 호박이 너무 크면 속에 씨앗이 차서 좋지 않고 주먹보다 약간 큰 게 부드럽고 맛있다고. 클수록 먹을 게 많아 좋은 걸로 착각했다. 이 역시 욕심이었다. 사진 속 호박이 그날 바로 수확한 것들이다. 서너 개 더 달려 있는데 한꺼번에 따면 너무 많을 듯해 우선 제일 큰 녀석들만 골랐다.

이번에 수확한 호박은 거의 유기농이다. '거의'라 함은 동네 어르신께서 한 차례 제초제를 뿌리셨기 때문이다. 어느 날 찾아오셔서 텃밭을 소독한 적 있는지 물으시더니 무언가를 쭉 뿌리고 가셨다. 그때는 '소독'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다. 설사 알았다고 해도 애써 도와주러 오신 호의를 거절하기 쉽지 않았을 듯하다.

텃밭은 아니지만 자의로 마당에 제초제를 뿌린 적도 있다. 지난봄, 서울에 일이 있어 일 주일 정도 집을 비웠더니 마당에 풀이 수두룩했다. 동네 어르신들께서는 이미 씨를 맺었으니 '풀약'을 한 번 해야 한다고 하셨다. 마침 앞집 어르신이 풀약통까지 빌려주신 터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살포에 나섰다.

뭐든 최소한 한 번씩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 이후론 아무런 소독도 하지 않고 어떻게든 우리식으로 풀과 씨름하고 있다. 유기농이 좋다는 것을, 약을 치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누구라도 땡볕에 땀을 비 오듯 쏟아가며 풀을 뽑아보면 유기농 채소의 값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우리는 어떤 희망을 해설할 수 있을까

우리가 재배하지 않은 채소는 동네 어르신들께서 주시기도 한다. 사진은 가지, 깻잎, 메밀잎.
 우리가 재배하지 않은 채소는 동네 어르신들께서 주시기도 한다. 사진은 가지, 깻잎, 메밀잎.
ⓒ 조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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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을 따면서 생뚱맞게도 페루의 신학자 구스타보 구띠에레즈가 쓴 책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가 떠올랐다. 해방신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이 책은 구띠에레즈가 내놓은 <해방신학>이 서구신학에 파문을 불러일으키며 정치 이데올로기라고 비판받자 이에 대한 응답으로 나왔다.

구띠에레즈에게 중남미의 가난과 착취, 독재와 불의는 해방돼야 할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가 사회와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발언권을 가지고 자유로이 의사를 표시할 수 있어야 하며, 자기네가 지니고 있는 희망을 해설하며, 그들 스스로가 자기네 해방의 주역이 돼야" 한다고 믿었다.

'해방신학' 하면 불온함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해방신학은 그저 자신의 샘에서 물을 길어 먹자는 운동이었다. 자신의 양식은 자신이 발을 딛고 선 곳, 일하고 기도하는 곳에서 온다는 순전한 믿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영성은 다른 어떤 곳이 아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실존적인 삶에서 시작돼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일본의 농성(農聖)'으로 불린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농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수양과 완성에 있다"라고 했는데 나는 갈 길이 먼 듯하다. 동이 틀 때부터 저물녘까지 땀 흘려 일하는 농부를 보면, 자급자족을 위해 가꾸는 텃밭이라도 감히 그 비슷한 단어를 입에 올리기 어렵다. 그저 텃밭에서 나오는 호박 몇 개에 만족한다.

동네 어르신들의 도움으로 겨우 텃밭을 가꾸고 있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다. 호박을 어디에 어떻게 심을지도 몰랐는데 자라고 나니 언제 수확하는 게 좋은지도 모르겠다. 유기농인지 무기농인지, 유농약인지 무농약인지, 쉽지 않고 어렵다. 혼자 유기농 무농약 채소를 먹자고 이곳에 온 것도 아닌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삶은 어떻게 살아갈까. 자본주의 급행열차에서 내려 시골로 들어왔는데 우리는 어떤 희망을 해설할 수 있을까. 우리의 샘에서 생수를 어떻게 길어 올릴 수 있을까. 오늘은 우선 우리 텃밭에서 호박을 먹으련다.

덧붙이는 글 | '활골닷컴'(hwalgol.com)에도 비슷한 내용이 연재됩니다.



태그:#활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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