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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저녁 운동 시간에 촬영한 활골의 하늘. 태풍 '나크리'의 영향인지 바람과 함께 하늘을 물들인 노을이 아름답다.
 지난 1일 저녁 운동 시간에 촬영한 활골의 하늘. 태풍 '나크리'의 영향인지 바람과 함께 하늘을 물들인 노을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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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생활이 몸 건강에 좋다면 정신에도 그렇다."(조반니 루피니)

8월이다. 충남 금산군 남이면 활골마을로 이사 온 지 6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마을의 삶 속으로 천천히 조금씩 걸어 들어가고 있다. 이제는 닭 우는 소리가 아무렇지 않고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는 풀도 익숙하다. 시골생활은 폭이 좁은 진자의 움직임 같다. 큰 변화 없이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는 무수한 일의 집합이다. 그럴수록 페이스 조절과 자기 관리가 중요하다. 마치 마라톤처럼.

단조로운 시골 일상에서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은 저녁 '운동'이다. 복장이나 형식을 갖춰 하는 스포츠는 아니다. 그저 마을 분들과 함께 마을을 순례하듯 걷는다. 7시 10분쯤 시작한다. 활 모양의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7~8분, 보통 너덧 바퀴를 돈다. 시작 지점은 없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편한 시간에 자신의 집 앞에서 합류하면 된다. 딱히 무엇을 어떻게 하자고 정한 것이 없으니 모든 면에서 자유롭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노동과 운동은 엄연히 다른데, 작은 시골 마을에는 딱히 '운동'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각자 건강을 위해 운동 삼아 하던 걷기가 같은 시간대로 수렴하면서 자연스럽게 집단 순례로 발전한 듯하다. 함께 걸으면 서로 동기부여도 되고 재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밭일이 늦게 끝나면 식사도 미루고 걷는 분이 계실 정도다. 폭우가 아니라면 비가 오더라도 우산을 들고 걷는다.

참여인원은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들쭉날쭉하다. 우리 부부를 비롯해 적으면 4명, 많으면 10명이 함께 걷는다. 대부분 할머니들이 주요 참석자들이고 간혹 할아버지들도 나오신다.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운동복이나 조깅화는 없다. 몸뻬도 좋고 슬리퍼도 괜찮다. 걷기에 불편하지 않다면 복장은 아무래도 좋다. 누구의 눈을 의식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걷는 것이다, 함께.

무용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마을 삼거리

활골마을의 일반적인 저녁 운동 풍경. 편안한 복장으로 마을을 순례하듯 걷는다.
 활골마을의 일반적인 저녁 운동 풍경. 편안한 복장으로 마을을 순례하듯 걷는다.
ⓒ 조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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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운동은 속도가 일정하지 않다. 기분에 따라 빠르게 걷기도 하고 유람하듯 천천히 걷기도 한다. 이 순례길에 빠지지 않는 것은 '이야기'다. 주로 그날 있었던 일이 화제에 오른다. 무슨 일을 했는지, 곧 무엇을 심어야 하는지를 거쳐 언제 비가 온다거나 어디에 고라니가 출몰했다는 등의 정보 교환이 이루어진다. 눈앞에 보이는 작물의 품평회가 되기도 하고 밭에서 경험한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법이 나오기도 한다.

우리 같은 초보에게는 더없이 좋은 산교육장이다. 어르신들의 대화를 듣는 것만도 큰 도움이 된다. 억양이나 사투리, 또한 생소한 용어 탓에 알아듣기 쉽지 않았으나 지금은 거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모르는 작물이 눈에 띄면 먼저 묻기도 하고 이런저런 질의응답 시간도 갖는다.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순례길에서 배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르신들의 조언에 따라 고추에 줄을 맸고 호박을 땄으며 메밀을 심었다.

'운동'은 곧잘 뒤풀이로 이어진다. 장소는 마을 안 삼거리. 더운 날에도 더없이 시원한 곳이다. 바닥에 차광막을 깔고 앉아 다리를 풀어주고 잠시 쉬어간다. 도란도란 목소리가 나면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분들도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가끔은 새내기인 우리를 위해 옛 마을의 모습을 설명해 주시기도 한다. 십 대에 이 마을로 시집온 사연이나 앞 산꼭대기까지 올라 인삼 농사를 짓던 무용담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대부분 칠십 대이신 어르신들은 '죽음' 같은 주제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꺼내신다. 이야기를 들으며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가감 없는 솔직함이 주는 묵직한 여운이 있으나 심각하지는 않다. 개그 콘서트와는 또 다른 유머도 살아 있다. 누군가 수박이나 참외를 내오면 함께 나누며 웃음소리가 높아진다. 산에 뻐꾸기가 울고 개구리나 귀뚜라미가 합창한다. 어둠이 깔리고 외등에 불이 들어오면 활골의 여름밤이 깊어간다.

어르신들과 시골길 걸으며 힐링을

활골마을 삼거리에 서있는 느티나무. 이 앞에 차광막을 깔고 앉아 담소를 나눈다.
 활골마을 삼거리에 서있는 느티나무. 이 앞에 차광막을 깔고 앉아 담소를 나눈다.
ⓒ 조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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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두 번째로 돈이 많은 갑부인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은 80대 노인이다. 시골인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 살면서 시장의 흐름을 꿰뚫은 탓에 '오마하의 현인'이라 불리기도 하고, 기업 가치를 보고 주식을 사들여 장기 보유를 통해 수익을 낸 터라 '가치투자의 귀재'라고도 불린다. 이런 그와 점심을 함께 먹기 위해서는 23억 원(미화 220만 달러)이 든다. 올해 경매된 '버핏과의 점심식사' 낙찰액이 그렇다.

버핏은 온라인 경매 사이트 '이베이'를 통해 자신과의 점심식사를 경매에 부쳐 그 수익금을 어려운 이들을 돕는 단체에 기부해 왔다. 이렇게 값비싼 점심에 돈을 낸 이들은 아마도 자선경매의 의미에 더해 투자 고수와 인맥도 쌓고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기회를 노렸을 것이다. 어쩌면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이면서도 40여 년 전에 구입한 시골집에 살며 검소하게 생활하는 그의 가치관이 궁금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현인이 오마하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게다. 내가 금산군수라면 활골마을 순례길을 관광상품으로 개발해 보고 싶다. 한동안 도시에서 힐링이 유행했는데 힐링이 별건가. 맑은 공기 마시며 시골길을 걸으면 잡념이 사라진다. 어르신들과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듣노라면 꼭 농사법이 아니더라도 인생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걸어서 몸이 건강해지고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보다 더 뛰어난 힐링이 어디 있으랴.

물론, 그곳이 꼭 활골일 필요는 없다. 두고 온 고향이 시골에 있다면 그곳으로 가보시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면 그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시라. 돈 몇 푼 벌 수 있는 시장보다 더 의미 있는 인생에 대한 투자가 될지도 모른다. 올여름은, 이번 휴가는 어르신들과 함께 마을을 걷는 것으로 시작해 보시라. 버핏과의 점심식사 못지않은 값진 자리가 될 것이다. 물론 그보다 훨씬 싼 값에!

덧붙이는 글 | '활골닷컴'(hwalgol.com)에도 비슷한 내용이 연재됩니다.



태그:#활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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