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천년을 살아 온 나무

누군가에게 가슴 아픈 밤이거나 말거나, 간 밤에 호스텔에서는 늦게까지 맥주파티가 이어졌다. 남녀가 뒤섞인 도미토리방의 이불 밑으로 삐져 나온 털투성이 다리들은 아침이 한참인데도 움직일 줄을 모른다. 시트가 흘러내려 가슴이 다 드러난 줄도 모르고 골아 떨어진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건물 내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나 하나뿐인 듯 고요한 아침을 가르고 시외곽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을 찾았다. 어지간하면 여행사를 기웃거리며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 만한 투어를 찾겠지만 투어를 할 때는 그만큼의 열정이 필요하다.

당시의 나는 그저 인적이 드문 곳에서 뜨거운 햇볕 아래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인 여행자였다. 그토록 뜨거운 햇볕을 가진 멕시코 와하카에서 말이다. 무엇이든 간밤의 편지로부터 관심을 돌릴 것이 필요했던 나는 사람이 드문 시 외곽의 볼거리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마주치게 된 엘 툴레(El Tule Tree) 나무는 시야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놀라웠다.

 - 엘 툴레 마을에 있는 이 나무는 전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나무라지만, 바로 옆의 교회가 미니어처로 보일만큼 충분히 거대하다.
▲ 엘툴레 나무(El Tule Tree) - 엘 툴레 마을에 있는 이 나무는 전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나무라지만, 바로 옆의 교회가 미니어처로 보일만큼 충분히 거대하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멀리서 봤을 때는 그 크기에 대한 실감이 나지 않았던 엘 툴레 나무는 무려 2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고 추정된다. 둘레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며 전체 크기로는 두 번째인 엘 툴레는 편백나무라고 하는데 가까이서 보면 기둥 자체가 다른 모습이다. 워낙 덩치가 커서 바로 옆의 성당 건물이 미니어처처럼 보일 정도니 말이다.

편백나무과의 엘툴레 나무는 몸통의 직경만 14미터며, 높이 42미터, 둘레 58미터에 달해, 성인 서른명이 손을 뻗어야 두를 수 있다.
 편백나무과의 엘툴레 나무는 몸통의 직경만 14미터며, 높이 42미터, 둘레 58미터에 달해, 성인 서른명이 손을 뻗어야 두를 수 있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가까이에서 본 녀석의 맨살은 투박하지만 아름다웠다. 풀이 자라고 나무 뿌리가 굳게 자리잡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 딱딱한 바닥에서 군데군데 파인 자국을 주름처럼 드러낸 채 홀로 우뚝 선 모습은 가히 경이롭다. 2천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뭍은 그 그늘 아래에 서서 그 푸르고 신성한 기운을 온 몸에 받아들였다.

서른 명의 사람이 손을 잡아야만 둘레를 감쌀 수 있는 거대한 생명체와 마주치고도 할 수 있는 일이 그뿐인 것이 너무나 안타까울 정도다. 무게만 630톤에 달하는, 그 경이로운 모습에 나는 세계에서 제일 큰 나무는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일조차 잊었다.

망자의 신전

다음 목적지인 미틀라(Mitla)로 가는 길에 한 멕시코 남자를 만났다. 차에서 내려 유적지를 찾아가는 길을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 말을 걸어온 것이다. 내심 불편하긴 했지만 내가 가려고 하는 미틀라까지 동행해 준다는 호의를 거절하진 않았다.

"한국에서? 세계 일주를? 세상에, 너 제정신이니?"

학생이라는 그는 긴 여행의 끝에 달해 있는 나를 보고 연신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이곳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들렀다고 했다. 당시의 나는 그저 질문에 간단히 대답 정도만 할 뿐이었는데 그는 그런 내가 신기했던지, 유적지까지 동행해 사진을 찍어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 붉은 지붕이 인상적이지만 이는 스페인 침략자가 기본의 신전을 허물고 지은 것이고 실제 유적은 그 앞에 위치한 돌무덤이다.
▲ 미틀라(Mitla) - 붉은 지붕이 인상적이지만 이는 스페인 침략자가 기본의 신전을 허물고 지은 것이고 실제 유적은 그 앞에 위치한 돌무덤이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살짝 황폐해진 듯한 벽 위로 올려진 붉은 돔 지붕이 인상적인 미틀라는 이 땅의 고대 원주민인 사포텍(Zapotec)인이 종교의 중심지로서 제사를 지내는 데 사용했던 주거유적이다. '죽은 자의 장소'라는 뜻처럼, 이곳에서는 수많은 분묘와 제물로 희생된 유골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미틀라 유적의 내외부에는 온통 기하학적인 모자이크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하늘, 땅, 뱀 등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손으로 한 것치고는 한 치 오차도 없이 너무나 정교한데 이들에게 사후세계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셈이다.

 건물안밖으로 빼곡하게 새겨진 정교한 모자이크 무늬는 사포텍인들이 사후세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건물안밖으로 빼곡하게 새겨진 정교한 모자이크 무늬는 사포텍인들이 사후세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왕의 무덤까지 살펴보고 나오는 길에 늘어선 돌기둥 앞에서 문득 그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고대의 멕시코인들은 '아치 구조'를 몰랐다. 그래서 돌기둥 위의 지붕은 온통 나뭇잎 등으로 평평하게 덮여 있었고, 때문에 멕시코의 옛 유적은 대부분 지붕이 남아 있지 않다. 저 붉은 돔 지붕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스페인 침략자들이 신전을 허물고 세운 교회란다. 남의 것은 파괴하고 자신의 것을 귀히 여기는 그들 종교의 오만함은 정말이지 세계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유적지를 빠져나오는 길, 이제 다음 목적지로 가야겠다며 그에게 작별의 말을 꺼냈다. 이번에도 그는 친절하게 차(콜렉티보)를 타는 곳까지 안내해 주었다.

"있잖아. 그러니까, 니가 괜찮으면 저녁에 내 친구랑 같이 식사라도 하지 않을래?"

참으로 어렵게 꺼냈을 것이다. 몇 시간 동안 나는 그저 무미건조했으니. 만나자마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지금에야 꺼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일 떠날 예정이었다. 오늘 가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는 말로 거절하니,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안녕을 고했다.

차에 타고 나서야 나는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필 망자의 장소에서 이름을 묻는 것을 잊다니. 그렇게 미틀라를 벗어나는 내내 휑한 겨울마당을 한 바퀴 둘러보며 나오는 것처럼 허한 느낌이었다.

절벽 위의 오아시스

이름도 모르는 친구 덕분에 쉽게 구한 콜렉티보는 너무나도 힘겹게 창 밖 가득 흙먼지를 날리며 선인장이 가득한 황무지, 듬성듬성 잡초가 돋아난 메마른 산길을 오른다. 이따금 차가 하늘 위로 높이올라 마치 롤러코스터가 선로 위를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팽이처럼 깎아진 길을 따라 산 봉우리는 넘는 동안 풍경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여전히 선인장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 와하카 주는 멕시코 전역에서 가장 건조한 곳으로, 도심을 벗어난 길가에는 어디서나 삼지창 모양의 선인장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 기생하는 애벌레를 넣고 증류시켜서 술을 만든다.
▲ 와하카의 선인장 - 와하카 주는 멕시코 전역에서 가장 건조한 곳으로, 도심을 벗어난 길가에는 어디서나 삼지창 모양의 선인장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 기생하는 애벌레를 넣고 증류시켜서 술을 만든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잎이 없고 줄기가 긴 녹색 선인장은 풀 대신 흙이 자리잡은 헐벗은 산을 채워주는 유일한 녹색이다. 이곳이야말로 판초 위에 솜브레로(챙이 넓고 끝이 말려 올라간 멕시칸 전통 모자)를 쓰고 말을 달리던 바로 그 진짜 멕시코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마침내 하늘색 간판으로 '이에르베 엘 아구아(Hierve el Agua)'라고 써진 곳에 닿았다. 다시 산비탈 길을 걸어 내려가 도착한 그곳에는 딱딱하게 굳은 바닥 위로 원인 모를 물이 솟아 나고 있었는데, 오랜 세월 동안 파인 자국을 따라 흘러간 끝에는 커다란 수영장이 생겨났다.

 - 지하에서 부터 자연적으로 뿜어져 나온 용천수가 모여 이룬 수영장.
▲ 이에르베엘아구아(Hierve el Agua) - 지하에서 부터 자연적으로 뿜어져 나온 용천수가 모여 이룬 수영장.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목까지 물이 차오를 정도로 생각보다 깊은 수영장 너머로는 바위 절벽 뒤로 탁 트인 전망이 펼쳐졌다. 셀 수도 없을 만큼 긴 세월간 뿜어져 나온 용천수는 절벽을 타고 흘러 침전을 이루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한 겨울에 얼어버린 폭포수 같다.

 - 석회암 지대에서 솟아난 지하수가 다시 석회암을 녹여생겨난 종유 기둥.
 - 석회암 지대에서 솟아난 지하수가 다시 석회암을 녹여생겨난 종유 기둥.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이번에는 수영장을 두고 반대편의 절벽 아래로 향해본다. 기다랗게 늘어트린 코끼리 코 같은 모습의 중유 기둥에서는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진다. 자연이 빚어놓은 예술작품은 앞으로 수십 년 후에 또 다시 모습을 바꿀 것이다. 바위 절벽 위에 올라서 바라본 반대편에는 아직도 물에 몸을 담그고 앉아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한창이다. 그 낯선 풍경에는 이국적이라는 말도 감미로운 울림 때문에 해당이 안 된다.

 - 절벽 아래로 석회수가 흘러내렸던 자리가 오랜세월에 걸쳐 굳어져 마치 파도거품과 같은 모습을 띄고 있다.
▲ 멀리서 바라 본 이에르베엘아구아의 풍경 - 절벽 아래로 석회수가 흘러내렸던 자리가 오랜세월에 걸쳐 굳어져 마치 파도거품과 같은 모습을 띄고 있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시원한 오후 바람이 불어왔다. 창 밖으로는 누군가 계속 부어대고 있는 와인 거품 같은 모습의 하얀 곡선 너머로 찬란한 햇살이 쏟아지고 눈앞에서는 흔들리는 추처럼 한 무리의 새들이 선회한다.

"괜찮아, 다 괜찮아. 돌아갈 곳이 없어도 괜찮아. 그까짓 것 술 한잔이면 다 괜찮아."

새들이 내게 속삭였다. 지금 이 순간 메스칼(Mezcal, 선인장 애벌레를 넣고 만든 멕시코 증류주) 한 병이 간절하다. 이런 곳에서 마시는 술이라면 결코 취하지 않을 것만 같다. 다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그 화려한 자리로 돌아가야 했으나 더 이상 그리워해 줄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도 나는 돌아가야만 한다. 아직도 남은 인생은 모두 나의 것이고, 그게 외로움이라고 해도 말이다. 단지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내 삶도 저 만큼만 높고 아름다웠으면 했다.

간략여행정보
이에르베 엘 아구아를 비롯한 와하카 근처의 관광지들을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투어를 신청하는 것이다. 와하카의 모든 숙소 및 시내 여행사에서 엘 툴레, 야굴, 미틀라, 이에르베 엘 아구아 등등을 하루 다녀오는 교통편을 제공하는 투어를 운영한다. 단 하루만에 인근의 모든 관광지를 둘러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굳이 직접 가겠다면 크레스포 거리에서 출발하는 시내버스를 타고 외곽으로 간 뒤, 택시나 콜렉티보(승합차)를 이용해야 하는데 불편하고 가격도 결코 투어보다 싸지 않다.

위 일정을 포함한 투어가격은 200페소(한화 약 2만원)이며, 입장료는 제외다.(2012년 1월기준)

좀 더 자세한 와하카 근교여행 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6912299



태그:#이에르베엘아구아, #엘툴레, #와하카여행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