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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현재 87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와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 편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훈련소에 입대하니 23연대 17중대라고 했다. 우리가 12기생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날부터 훈련에 들어갔다. 50명씩 한 내무반을 편성하여 일등중사가 선임하사가 되고 훈련병 중 한 사람을 '향도'라고 반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4개 분대를 편성했다. 그날 밤 우리는 총과 대검, 탄띠와 순통을 지급 받고 직급상관 관등성명과 소속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조교가 국방장관 손원일, 참모총장 백선엽, 훈련소장 심원봉,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아무개를 선창하면 우리는 큰 소리로 복창하였다.

다음 날 아침, 5시 반 식사 당번이 교대로 밥을 타러 가고 난 후 6시에 기상을 했다. 불침번이 "기상!" 하고 외치면 우리 모두는 재빨리 침상에서 일어나 담요를 정돈하고 복장을 단정히 한 후 마당에 나가 정렬 후 점호를 받았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예외는 없었다. 제대로 못하면 따귀를 세차게 얻어맞았다. 그리고 총을 "앞에 총!, 세워 총!, 어깨 총!" 하며 몇 번이고 반복해서 거총 훈련을 했다.

그런 후 주변 청소를 간단히 하고 식사하러 들어갔다. 당번들은 밥을 항고(반합)의 따까리(뚜껑)에 밥알을 곤두세워가며 하나하나 배식을 하고, 국은 따로 항고에 담아서 보내면 앞사람이 뒤로 전달했다. 이렇게 해서 밥을 먹는데 나중 사람이 먹기도 전에 "전원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밥을 채 먹기도 전해 조교들이 빨리 나가라고 재촉했다. 손으로 밥알을 집어 먹고 따까리는 내무반에 내던졌다. 마당에 집합하는데 늦게 나온 사람은 마구 얻어터졌다.

집합이 끝나면 훈련장까지 "구보!" 소리에 뛰어갔다. 총을 '앞에 총' 하고 마구 뛰었다. 조교의 선창에 따라 '하나 둘, 하나 둘' 하며 구령을 외쳤다. 대열을 조금이라도 이탈하거나 낙오된 자는 또 얻어맞았다. 훈련장에 도착하면 현장 조교들의 지시를 받아 훈련을 했다. '차렷! 쉬어! 앞으로 가! 뒤로 가! 좌로 봐! 우로 봐!' 등 제식 훈련을 받고 점심을 먹은 후 오후에는 훈련 장소를 옮겨 총을 분해조립하며 부위별 명칭을 배웠다. 

저녁에 부대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뛰어왔다. 내무반에 도착해선 내무반을 정돈하고 각자 무기를 손질하는 교육을 받았다. 식사 후에는 군가를 배웠다. 제일 먼저 훈련소 노래를 배웠다. 

'백제의 옛 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고 관창의 어린 넋이 지하에 혼연하니 웅장한 황산벌에 연무대 높이 솟고 대한의 건아들이 모인 이 곳이 오 젊은이의 자랑, 육군훈련소.'

하고 노래를 열심히 불렀다. 그냥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마룻바닥을 병으로 문지르며 노래에 장단을 맞추곤 하였다. 이렇게 얼마를 하고 난 뒤 점호 후에 취침에 들어갔다. 그날부터 이런 식으로 반복하면서 훈련 과정을 밟아가는 것이었다. 청소가 철저하지 않다고 땅바닥에 떨어진 밥을 입으로 핥기도 하고 밥통을 머리에 이기도 하고 때로는 반복해서 글씨를 쓰는 기합도 받았다.

훈련 도중 일어난 에피소드도 많았다. 하루는 내가 식사 당번이 되었다. 아침 일찍 다른 전우와 같이 식당에 가서 밥을 타 가지고 와서 배식을 마쳤다. 수돗가에 가서 그릇을 닦는데 나는 갑자기 똥이 마려 변소에 가고 수돗가에는 동료 한 사람만 남아있었다. 갑자기 "송씨" 하는 다급한 외침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볼일을 다 마치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달려가니 그는 울상이 되어 양동이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웬 놈 서넛이 나타나 갑자기 밀치고 뺏어갔다는 것이다. 쫓아 갈래도 나머지마저 잃어 버릴까봐 못 따라 갔다고 하였다. 우리는 국 양동이를 잃어버리고 내무반에 가서 향도에게 이실직고했다. 선임하사가 오더니 다짜고짜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녁까지 보충해" 하고는 가버렸다. 우리는 훈련장에 가서 일과를 마치고 내무반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이었다. 향도는 우리 분대 전원을 세워 놓고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양동이를 채워놓으라고 엄포를 놓았다. 우리 분대원 대여섯 명이 양동이를 구하려고 밖으로 나섰다. 구하는 길은 뾰족한 수가 없고 단지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것밖에 없었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나갔다. 마침 한 사병이 국 양동이를 들고 가는 것을 발견하고는 모두 달려들어 양동이를 발로 찼다. 양동이가 멀리 굴러가는 것을 낚아채가지고 냅다 뛰었다.

며칠 후 일요일에는 영내교회에서 신발을 벗어 놓고 예배를 보고 나오니 신발이 없어졌다. 나는 다 헤진 신발을 얻어 신고 내무반으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

아침마다 훈련장으로 가는 길이면 길가에서 이동주보라고 불리는 행인 상인들을 자주 만났다. 고구마, 떡, 과일, 엿, 과자 등 주전부리를 우리가 가는 곳마다 팔러 다녔다. 대부분이 피난민이나 전쟁 난민들로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행상을 하며 고생하는 불쌍한 사람들이었는데 대부분 젊은 여자들이었다. 돈이 있는 병사들은 가다가도 사먹고 훈련장에서 조교들과 기관병에게도 사주면서 눈치껏 먹었다.

매일 어김없는 나팔소리와 함께 새벽에 일어났다. 군복을 부지런히 입고 나가 점호를 취하고 돌아와 무기 점검을 받았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후 훈련장으로 구보를 해 갔다. 훈련장에서는 박격포 연습 훈련을 받았다. 포탄의 성능과 장약(화약)을 넣는 계산법도 배웠다. 돌아오는 길에는 부대 보수용으로 돌을 하나씩 주워들고 와 영내 주변에 깔기도 하고 산에서 나무도 캐어다가 훈련소에 심기도 했다.

훈련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훈련장에서는 훈련을 하고 휴식 시간에는 쉬지도 못하고 훈련장 보수 작업을 하고 돌아오면 다시 저녁 휴식 시간에도 훈련소 보수 작업을 하느라고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정말 휴식 시간이나 자유 시간이 조금도 없었다. 고된 훈련에 도망병이 속출하여 변소를 가더라도 혼자서는 절대 갈 수 없었다. 불침번 근무가 되면 제일 고달펐다. 동초 근무를 서다 교대근무를 하게 되어 동료를 깨워도 제때에 일어나지 않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일요일이면 면회장으로 가서 면회 온 가족들을 만났지만 나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사실 올 사람이 없었다. 면회 갔다 가져 온 음식을 먹는 사람들과 돈으로 주보에 가서 음식을 사가지고 와 먹는 사람들을 주린 배를 움켜잡고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판문점에 있던 반공포로들이 입소를 했다. 나는 광주포로수용소에 있던 친구들을 만났다. 한 사람이 내게 "김봉운 집사님이 죽었어요. 수용소에서 반공포로를 석방한다고 탈출시켰을 때 총에 맞아 죽었어요"라고 말해 주었다. 자기네들은 미처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마을 뒷산에 숨어 있다가 미군에게 붙잡혀 판문점까지 갔다 왔다고 했다. 김 집사님은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이었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매우 애통했다.

하루는 소대장 하는 말이 "여기 서울 성동구에서 온 사람과 광주에서 온 사람은 나오라고 해"하여 갔더니 훈련소 본부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신익회씨와 국회의원 몇 명이 와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는 수고한다며 격려해주고 선물도 주었다. 나는 말로만 듣던 신익회씨를 직접 만났다. 

훈련소에는 여군들도 있었다. 모두들 여군을 보면 좋아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대화를 할 기회는 전혀 없었다. 하루는 교관이 하는 말이 김일성에게 한 방 먹어 상이군인이 되었는데 사실은 불구자라고 하였다. 그런 몸으로 힘겨운 군 생활을 하다니 그가 매우 훌륭하게 생각되었다.

16주가 지나고 봄이 되었다. 전반기 교육을 마치고 후반기 16주 교육을 마치게 되었는데 이때는 주로 공용화기, 소대공격, 중대공격, 대대공격 등 군사훈련을 했다. 여산을 지나 후반기 훈련을 받으러 갔다. 그곳에서 공용화기 훈련을 받으며 고지에 올라가면 멀리 금강이 바라보이고 호남평야도 바라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삼례를 지나 여러 곳으로 이동하였다. 호남평야의 지평선이 아득히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이곳이 참으로 넓은 평야로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논산에서 82밀리 박격포 훈련을 받을 때였다. 논산 일대에는 좌익이 많다고 소문나 논산군에서만 수백 명이 좌익으로 몰려 죽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한 사람이 말하길 "나도 그때 여기에 있었다면 나라고 별 재간이 있었겠나? 다 운이 나빠서 그렇게 죽은 것이지. 죽을죄로 죽은 자가 과연 몇이나 됐겠어?"하며 세상을 탓하는 것을 보았다.

어느 날 숲으로 작업을 나가 동료들을 찾으러 두리번거리는데 군인 여러 명이 갑자기 나타나 나를 밀어 제치는 통에 탄띠에 있는 대검을 도난당했다. 그 때는 정신이 없어 누가 내 검을 빼앗아 가는 것도 몰랐다. 나중에 '큰일 났다' 생각하여 어떻게 할까 골몰하다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검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결심하고 탄띠를 매지 않고 다니며 기회를 노렸다.

마침 다른 중대의 한 사병이 도랑 옆에서 야전삽을 닦고 있었다. 나는 살그머니 뒤로 가서 대검을 낚아챈 후 그의 엉덩이를 발로 차서 한 길 되는 도랑으로 굴러 넘어뜨렸다. 그리고는 재빨리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쳐왔다. 뒤에서 "저놈 잡아라!" 하는 외침과 함께 여럿이 쫒아왔다.

나는 우리 막사 앞문으로 뛰어 들어가 뒷문으로 빠져나온 후 다시 옆 텐트로 뛰어 들어가 몸을 숨겼다. 우리 막사에 도달한 패들은 "이 내무반 대원이 우리 전우의 대검을 빼앗아 가서 찾으러 왔다"하며 소리쳤다. 우리 소대 사람들은 "그런 사람은 없다"하고 딱 잡아뗐다. 서로 "있다! 아니다!" 옥신각신하다가 그럼 "그 사람을 찾아 봐라"하였으나 옆 천막으로 감쪽같이 숨어 버린 나를 찾지 못하고 결국 그냥 돌아갔다. 나는 그렇게 해서 대검을 보충하였다.

훈련소에서 다들 훈련을 나가고 내무반이 비어 있으면 총도 없어지고 담요, 밥그릇 등이 종종 없어졌는데 알고 보니 이는 일부 기관병이 용돈을 벌기 위해 저지른 짓이라고 했다. 훈련병들이 배급받은 관물이 없어졌을 때 돈을 주면 없어진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훈련소에서 매도 많이 맞았지만 재미있는 일도 겪으면서 5월 20일경 훈련소를 마치고 일등병 계급을 달고 보충대로 나가게 되었다. 주특기에 따라 각 병과대로 배정된다고 하였다.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궁금했다.

병과 배정소를 우리는 갈매기 시장이라고 불렀는데 동료들이 전출되는 동안 반공포로 출신들만 따로 추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나는 거기서 10일간 대기하였는데 얼마 후 남은 사람 150명이 따로 차출되었다. 일등중사와 소위인 두 사람이 우리를 공병으로 인솔한다고 하여 우리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기차로 강경역으로 갔다. 화물 방통 하나에 150명이나 들어가니 매우 좁았다. 강경역에서 탈 때 일행이 먹을 쌀과 된장, 부식도 같이 싣고 떠났다. 기차 안에서 멀리 사라지는 훈련소와 그동안 정든 산들을 바라보니 무척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넓고 넓은 호남벌과 계룡산도 앞으로는 다시 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며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때 갑자기 "개새끼들!"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이 "우리가 공병이 아니라 보병이래! 우리는 춘천보충대로 가는 거래!"하고 외쳤다. 깜짝 놀란 우리들 사이에서는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황한 소대장이 "나도 이북사람, 선임하사도 이북 사람, 당신들도 이북사람, 그러니 우리 이북사람의 사정을 누가 알아주겠소? 귀관들이나 나나 같지 않소? 여기서 우리끼리 분통을 터뜨려봐야 무슨 소용 있소?"하고 하소연했다. 그 말을 들은 한 사람이 일어나 "훈련소 그 놈들이 나쁜 놈이군. 인솔자를 이북 사람을 시켜 보내는 것을 보니 야단을 쳐도 이남 사람보다 나을 것이라 계산하고 이렇게 했구나! 분해도 참읍시다"라고 말했다. 사실이 그랬다. 우리는 분을 삭히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달리는 기차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아침 24시간 만에 영등포에 도착했다. 기관차는 우리 방통을 떼어놓고 갔다. 영등포역에 멈춰 있을 때 미군 열차가 지나가며 우리 옆에 화물 한 칸을 떼어 놓고 갔다. 화물칸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레이션(전투식량)이 많이 있었다. 먹다 남은 것과 먹지 않은 것 그리고 상자가 포장채로 많이 있었다. 우리는 '횡재다'하며 그것들을 우리 방통 안으로 잔뜩 가져와 실컷 먹었다. 얼마를 먹고 나니 배가 불렀다. 남아 있는 양을 보니 앞으로 사흘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리쿼터로 한 차는 충분히 남아 있었다.

우리는 인솔 장교인 소대장에게 영등포에 나가서 놀고 오자고 졸랐다. 소대장은 "시내에 지인이 있으면 만나보고 오고, 놀고 싶은 사람은 놀다 와라. 귀관들의 양심만 믿는다"하였다. 훈련소를 마치고 일선으로 향하는 군인으로서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소대장이 전방으로 가는 우리에게 최대한 자유를 주며 대우를 해준 것이었다.

나는 갈 데가 없어 영등포역과 근처를 배회하며 한강변에서 여의도비행장의 비행기를 바라보다 저녁에 역으로 돌아갔다. 시내로 나간 사람들은 이튿날 열시까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돌아왔다.

영등포역을 출발한 열차는 서빙고역에서 우리가 탄 방통을 떼어 놓았다. 춘천에서 온 화물열차에 장작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을 본 우리 일행은 장작을 한아름씩 가져다 우리 기차 화물칸 안으로 옮겼다. '얼마나 실었을까?' 사람들은 모두 좋아했지만 나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우리의 행실이 민폐를 끼치는 것이라 생각이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서빙고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역에 설 때마다 소대장이 쌀과 부식을 근방에서 얻어와 한 번도 끼니를 놓치게 하는 일이 없었다. 식사만큼은 철저히 시켜주는 것이었다. 불편한 것은 잠자리였으나 그것도 날씨가 춥지 않아 참을 만했다.

우리는 다시 춘천으로 향했다. 경기도의 자연 풍광은 매우 평화롭고 아름다웠지만 어디를  가더라도 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나마 제대로 남은 집들은 작은 초가집뿐이었다.

기차가 마석을 지나 대성리역에 섰을 때 역 옆에 잔치집이 있었다. 손님들이 들락날락 하는 것을 보고 잔치음식을 얻어먹고 온다며 몇 명이 내려갔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오기도 전에 기차가 출발했다.

"우리끼리 춘천보충대에 가도 괜찮을까요?"하고 물었더니 소대장은 아무 말 없이 태연하게 "나는 귀관들만 믿는다"하는 것이었다. 

저녁에 춘천에 도착했다. 우리는 레이션(전투식량)과 나무뭉치를 팔았다. 소대장은 우리더러 춘천보충대로 바로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민가에서 하룻밤 자유롭게 놀고 내일 들어갈 것인지 의향을 물었다. 부대에 들어가기 전 하룻밤이라도 재미있게 놀고 싶다고 하니 승낙을 해주었다.

우리는 춘천시내 민가에 들어가 밤새도록 놀았고 일부는 시내 색시집에 가서 놀고 오기도 하였다. 오전 10시가 되니 보충대 앞에 150명 전원이 모였다. 어제 대성리에서 잔칫집에 갔다 낙오되었던 친구들도 모두 다 돌아왔다. 소대장은 매우 기뻐하며 "오느라 고생했다. 너희들이 신용을 지킬 줄 알고 내가 자유를 준 것이다. 질서를 지켜줘서 고맙다"하며 우리를 칭찬했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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