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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같지 않던 며칠간의 따듯함을 뒤로하고 또다시 매서운 추위가 몰아친다. 지난달 29일 오랜만에 대학로에 갔는데, 거리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전국을 집어삼킬 듯하던 코로나가 진정세에 들어서나 싶었는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로니에 공원을 중심으로 곳곳마다 '창작산실' 소식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잠시 멈췄던 공연계에도 꿋꿋함을 유지해온 '올해의신작' 덕분에 몇몇은 위로를 받았다.
 
지난 29일, 대학로예술극장에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우수 창작 레퍼토리를 발굴하는 '공연예술창작산실' 선정작인 '신노이'의 <신 심방곡>이 개막했다.
 지난 29일, 대학로예술극장에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우수 창작 레퍼토리를 발굴하는 "공연예술창작산실" 선정작인 "신노이"의 <신 심방곡>이 개막했다.
ⓒ 이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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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에 들어서자 체온과 온라인 문진표를 작성하고 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매표소 앞은 기대감을 품은 관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졸업한 지 오래된 동창들 마냥 서로의 손을 붙잡고 안부를 묻는다.

오래간만에 대면하는 것에 대한 기대감. 마스크를 썼지만 반가움은 숨길 수 없다. 멀리서도 대번에 알아볼 패셔니스타 윤중강부터 후배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현경채까지 국악계의 내로라하는 평론가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입장을 허락하는 안내에 따라 객석에 들어섰다. 뮤지컬에서나 보는 가림천이 내려져 있다. 실루엣 사이 빈틈을 비집고 들여다보니 배치된 악기들이 다양하다. 규모를 보면 유명 가수의 콘서트 현장을 방불케 한다.

오른편엔 베이스, 왼편엔 노트북과 콘솔이 자리 잡았다. 뒤편으로는 건반을 비롯해 거문고와 2대의 기타가 보인다. 천장에서 내려온 세 개의 기둥도 특이하다. 음향뿐 아니라 다른 볼거리까지 보여주려 한다. 형형색색 천을 겹겹이 쌓아 올린 기둥에 무지갯빛 조명이 비춘다 마치 스피커 음량조절 장치처럼 눈이 호강한다.

전통음악인 소리부터 재즈와 일렉트로닉 사운드까지. 도저히 어울릴 거 같지 않은 악기들이 한무대에 올랐다. 물과 기름 같은 재료 구성이 낯설다. 하지만 연주가 시작되자 이런 근심이 괜한 기우였음을 느끼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객석에 들어서자 무대에 배치된 악기의 구성이 다양하다. 규모를 보면 유명 가수의 콘서트 현장을 방불케 한다.
 객석에 들어서자 무대에 배치된 악기의 구성이 다양하다. 규모를 보면 유명 가수의 콘서트 현장을 방불케 한다.
ⓒ 이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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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섦조차 완벽하게 하나로 이끈 트리오 밴드 '신노이(SINNOI)'가 <신(新) 심방곡>(29~30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을 공개하며 이렇게 되묻는다.

"21세기 전통음악은 다의적이며, 다양하며 무엇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요?"

연주자들과 관객들 사이를 관통하는 영상이 인상적이다. 투명한 물에 파란색 잉크를 떨어트리자 성분이 다른 물과 기름이 뒤섞이지 않고 제각각 춤을 춘다. 서로를 밀어내듯 여기저기 흘러가는 분위기. 연주 사이 간혹 들리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꾼의 지버리시가 흥을 배가시킨다.

리듬을 타면서 합을 맞추는 그들은 서로를 견제하듯 타인의 영역을 넘지 않으려 자제한다. 중저음을 장악하는 베이스와 손으로 튕기는 거문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호흡을 맞춘다. 마치 다른 장르에 예의를 지키는 배려처럼.

언제 들어봤을까. 오래 전에 경험했던 데쟈뷰를 강하게 직감했다. 1990년대 사춘기 시절, 한때 심취했던 독일의 전자 프로젝트 그룹 이니그마(Enigma)가 떠오른다. 당시 팀의 리더가 환청을 듣고 시작한 프로젝트였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환청의 주인을 '이니그마'라 불렀단 뜻에서 시작한 이 음악은 꿈과 현실을 넘나든다.

그레고리안 성가, 인디안, 인도, 아프리카 음악이 접목된 음악의 정체성을 논하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마약같은 분위기가 압권이다. 어쩌면 서로 다른 장르의 결합과 음악이 내뿜는 몽환적 분위기만으로도 한국의 이니그마라 부르고 싶다.
 
신노이에서 보컬을 맡고 있는 김보라, 왼쪽에는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하임이 공연 중이다.
 신노이에서 보컬을 맡고 있는 김보라, 왼쪽에는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하임이 공연 중이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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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색다른 음악을 들려주는 '신노이'는 국내 재즈계에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낸 베이시스트 '이원술', 한국전통 정가인 경기민요를 섭렵한 '김보라', 가인·아이유 등의 프로듀서로 한계를 넓힌 일렉트로닉 사운드 '하임'이 뭉친 트리오 밴드다.

하지만 그동안 선보였던 세 장르를 중심으로 이번엔 더 많은 협연자들이 참여했다. 70분을 채운 여러 곡엔 조연과 주연의 경계가 없다. 오히려 키보드와 거문고, 기타의 선율이 클라이막스를 장식할 정도다.

앞선 세 악기의 이음(異音)에 교집합이 없는 구성은 무대를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 하지만 눈을 감고 들었을 때, 이질감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이유는 하나가 되려는 목표 아래 서로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소리에 뿌리를 두고 서양과 현대의 완벽한 조화. 거기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초월까지.

각 악기가 지닌 특성이 제각각일지라도 합쳐진 변주는 또 다른 결과물을 탄생시킨다. 실제로 지난해 발매한 1집 'The New Path'는 영국의 한 라디오 방송에서 "드디어 한국 전통음악은 21세기 도심 풍경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는 호평을 들었다.

서로 다른 악기와 '신노이'엔 어떤 연관이 있을까. 공연 중간에 마이크를 잡은 김보라가 곡에 대한 소개를 이어나갔다.

"원래 심방곡은 여러 장르의 음악이에요. 가곡의 전신이기도 하고, 신라시대 음악을 심방곡이라 부르기도 해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해석은 시나위의 다른 말이기도 하고요. 이처럼 신노이는 심방곡과 지향하는 바가 같아요. 결국 신노이가 할 수 있고, 우리가 가장 잘하는 음악을 1년 넘게 준비했습니다."

경기민요 명창인 이춘희 선생으로부터 이수 받고, 지금은 강권순 선생 문하에서 정가를 수학한 국악계의 기대주 김보라. 의미를 알 수 없는 추임새, 연신 흥얼거리는 스타일과 가사만 들어도 보컬의 정체성이 경기민요임을 숨길 수 없다. 마치 "이 음악의 뿌리는 전통에 있다"라는 메시지를 들려주고 싶은 것처럼 심방곡이 국악에서 뻗어 나옴을 강조하고 있다.

코로나의 여파로 이들도 1년 넘게 무대에 오르지 못했단다. 오랜 동면을 깨고 관객들 앞에 다시 선 하임은 공연을 시작하며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작년 이맘때쯤 쇼케이스를 했어요. 1년 만에 공연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몰랐죠. 많은 공연이 없어지고 무대에 설 기회가 줄었는데, 이렇게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어서 감사해요."

예전이었으면 몰랐을 고마움이 연주자뿐 아니라 자리를 메운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다. 랜선을 타고 듣는 음악이 아니라 라이브로 보는 기쁨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을까. 
 
공연을 마치고 무대 인사하는 신노이 팀원들
 공연을 마치고 무대 인사하는 신노이 팀원들
ⓒ 이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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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에서 중심 역할을 맡고 있는 베이시스트 이원술이 마지막 한 곡을 남겨두고 참여한 스태프들을 소개했다. 자신과 오랜 친분을 가진 유태성(기타), 드러머와 음악감독을 거쳐 이제는 건반까지 장악한 한웅원(키보드), 합주의 마지막 퍼즐을 끼워줬다는 황진아(거문고), 공연의 시작과 함께 몽환적 분위기에 일조한 유탁규(영상), 세 개의 기둥에 형형색색의 비단 천을 설치한 최종운까지. 특히, 제각각 음악을 하나로 이은 신노이의 의도를 파악한 최 작가의 작품(작품명: '빛은 결국 무지개가 된다')은 신노이가 바라는 바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덧붙이는 글 | 본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산실' 홈페이지에 동시에 게재됩니다.


태그:#창작산실, #신노이, #신심방곡,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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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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