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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19일부터 3월 1일까지 다녀온 쿠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행 직후 전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으로 싣지 못했던 여행기를 1년을 맞아 공유하고자 합니다.[기자말]
아듀! 아바나

오늘은 아바나를 떠나 시엔푸에고스로 떠나는 날. 새벽부터 일어나 한국에서 가지고 온 라면 하나를 뚝딱 끓여 먹었다. 어젯밤에 마신 술을 위한 해장이기도 했지만, 짐을 가볍게 할 필요가 있었다. 아바나를 돌아다니면서 산 선물용 기념품들이 벌써 캐리어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호텔을 나섰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아바나항까지 가는 길. 쿠바에서의 첫날 밤만 해도 꽤나 낯설었는데, 이제는 그 길이 3일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정답고 푸근했다. 마치 중세 유럽에 온 것 같은 기분. 과연 쿠바 아바나는 그 분위기를 계속 간직할 수 있을까?

길 끝에서 마주친 아바나항의 푸른 바다는 반짝이고 있었다. 이 항구를 통해 얼마나 많은 배들이 대서양을 오고 갔을까. 가이드에 따르면 오바마의 등장 이후 미국과의 수교와 함께 미국 크루즈들이 자주 들어오기 시작했다는데, 트럼프의 집권으로 다시 그 빈도가 줄었다고 했다. 어딜 가나 트럼프가 문제구나.

버스에 올라 다음 목적지인 시엔푸에고스로 출발했다. 다시는 오지 못할 곳이라고 생각하니 창밖 풍경이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아듀! 아바나. 너무 많이 변하진 말기를.

광활한 사탕수수 밭
 
쿠바의 흔한 사탕수수 밭
 쿠바의 흔한 사탕수수 밭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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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를 벗어나니 창밖 풍경이 금세 바뀌었다. 도심지가 사라졌고 끝도 없는 광활한 녹색의 농장지대가 펼쳐졌다. 가이드는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설탕을 만들어내는, 바로 그 유명한 쿠바의 사탕수수 밭이라고 했다.

쿠바의 역사에 있어 사탕수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식민시대 당시 스페인은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 쿠바의 다른 농작물들을 모두 밀어버리고 오로지 사탕수수 하나만 심었는데, 이는 쿠바 사회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우선 쿠바의 인종 분포가 바뀌었다. 쿠바의 기존 원주민들은 스페인의 혹독한 착취와 유럽에서 들어온 질병 등으로 대부분 사라졌다. 대신 그 공백을 스페인이 사탕수수 재배를 목적으로 데리고 온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 쿠바에서 만나는 흑인들은 바로 그 노예들의 후손이다.

또한 단일작물로서의 사탕수수 재배는 쿠바의 설탕에 대한 의존도를 기형적으로 심화시켰다. 현재까지도 설탕산업부가 따로 존재할 정도다. 이는 쿠바 경제를 근본적으로 취약하게 만들었다. 세계 시장에서 설탕 가격이 높으면 경기가 흥하지만, 설탕 수요가 줄어들 경우 경제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쿠바의 설탕 산업은 스페인이 물러가고 미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엄청난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미국의 설탕 수요는 근 20년 동안 매년 5%씩 증가하였는데 미국은 이를 쿠바 산 설탕으로 해결했다. 게다가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설탕 수요를 세계적으로 급증시켰고, 덕분에 쿠바의 설탕 산업은 절정을 찍었다.

그러나 이런 경기는 전후 폭락하기 시작했다.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설탕을 생산, 유통하기 시작했으며, 결정적으로 미국에 대공항이 닥쳤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쿠바의 경제는 무너졌고 많은 국민들이 피폐해졌다. 잦은 쿠데타와 정권 교체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에 성공한 이후에도 설탕 산업과 관련된 기형적인 의존도는 계속 되었다. 카스트로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고민은 미국과의 교역이 금지되면서 그 많은 설탕을 팔 수 있는 시장을 잃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소련이 미국을 대신해 그 설탕을 구입했지만, 80년대 말 동구권의 붕괴 이후 쿠바는 똑같은 위기를 겪게 된다. 단일작물만을 재배한 결과를 톡톡히 치르게 된 것이다.
 
사탕수수 주스 만들기
 사탕수수 주스 만들기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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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배경지식과 함께 창밖 사탕수수 밭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궁금해졌다. 쿠바인들에게 저 사탕수수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럼주를 만드는 주요 원료이자, 자신들의 주요 산업기반이지만 정작 그것만으로 먹고살 수 없는 사탕수수. 약인 동시에 독도 될 수 있는 그것들을 보면서 쿠바인들은 애증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고속도로에서 잠깐 쉬게 된 휴게소에서는 현지인들이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사탕수수 주스 만드는 법을 시연해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사탕수수를 으깨어 즙을 내는 단순한 기계였는데 어쨌든 적도의 더운 날씨에 그만큼의 노동도 만만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런 퍼포먼스로 돈을 벌 수 있는 게 어딘가. 사탕수수는 또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쿠바인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쿠바 안의 프랑스, 시엔푸에고스
 
시엔푸에고스의 올드카
 시엔푸에고스의 올드카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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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 만에 도착한 시엔푸에고스. 콜럼버스가 첫 항해 때 도착했다는 시엔푸에고스는 쿠바의 중남부 카리브 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도시계획으로 지어진 최초로 도시라고 했다.

자칫하면 북한의 김책시처럼 쿠바 혁명의 영웅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이름을 따서 도시명이 지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1825년 폭풍으로 도시가 파괴된 후, 성을 재건한 스페인 장군 시엔푸에고스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했다. 그만큼 시엔푸에고스란 이름이 흔하다는 뜻이려니.

우선 점심을 먹기 위해 시엔푸에고스 해안가 바로 옆에 위치한 레스토랑으로 갔다. 식사를 하지 않고서는 따로 돈을 내고 올라가야할 만큼 끝내주는 전망을 자랑하는 곳이라고 하더니 역시나 옥상에서 바라본 바다는 아바나에서 보던 그것과 또 다른 느낌의 풍광을 선사하고 있었다. 뭐랄까. 말로만 듣고 상상만 하던 바로 그 카리브 해라고나 할까? 일행 모두 그 아름다운 전경에 넋을 잃었다.
 
카리브 해
 카리브 해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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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모두 먹은 뒤 우리는 다시 도시의 다운타운으로 갔다. 가이드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체 게바라의 초상이라며 어느 건물 위 간판 위에 그려진 체 게바라를 보여주었다. 아바나에서 봤던 그 어떤 초상보다도 잘 그린 것 같긴 했다.

"Caballero sin tacha y sin miedo"(오점과 두려움이 없는 신사)

오점과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라. 이곳에서도 체 게바라에 대한 사랑은 여전하구나. 혹자들은 이런 쿠바사람들을 두고 공산주의의 잘못된 개인숭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보름 동안 쿠바를 돌아다니면서 느낀 것은 그것이 강요된 숭배라기보다는 진정 그들이 체 게바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베트남에서 느낀 호치민에 대한 감정과 비슷했다.
 
오점과 두려움이 없는 신사
 오점과 두려움이 없는 신사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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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를 따라 다운타운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바나와 달리 사람들이 붐비지 않았고, 주위의 건물들은 밝고 고색창연했다. 시엔푸에고스는 1819년 프랑스인들이 건설한 도시로서 '쿠바 안의 프랑스'라고도 불리는데 그 당시의 건축물과 시가지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했다.

어쩐지 뭔가 좀 다르더라니. 아바나가 약간 혼잡하고 어지러운 대도시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면 시엔푸에고스는 파스텔 톤의 가볍게 경쾌한 중소도시의 느낌이었다. 높은 빌딩 하나 없이 완만한 시가지에 누구나 비슷하게 사는 일상. 시엔푸에고스는 쿠바 여행 중 내가 본 가장 평화로운 그들의 일상의 공간이었다.
 
파스텔 톤의 시엔푸에고스
 파스텔 톤의 시엔푸에고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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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쿠바, #사탕수수, #시엔푸에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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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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