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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국씨는 경남 통영에 거주하며 여전히 기관장으로 조업에 나서고 있다. 한 번 조업을 나가면 보통 15일 후에 돌아와 육지에서 2~3일 머물다 다시 조업에 나서기 때문에 이성국씨와는 연락이 닿지 않을 때가 많다. 그 때문에 그와의 연락은 강원도 주문진에 사는 조카를 통해서 해야 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인터뷰 일정을 잡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업 후에 입항하더라도 육지에 머무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어렵사리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이성국씨와 만난 것은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내의 한 카페였다. 말을 조리 있게 할 자신이 없다며 조카와 함께 만나길 원했다. 결국 조카와 이성국씨가 함께할 중간 지점을 찾다 보니 서울의 버스터미널이 적당했다.

카페 구석에서 만난 이씨의 얼굴은 벌에 쏘인 듯 퉁퉁 부어 있었다. 조업 중에 생선에 얼굴을 쏘였다는 그는 상처에 대해 대수롭지 않아 했다. 그러나 정작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1971년 명성호라는 선박을 타고 조업 중 납북되었다가 다음 해인 1972년 9월 7일 귀환한 그는 귀환 직후 자행된 고문 수사로 '반공법' 위반자가 되었다. 이 전과로 인해 1981년 서산경찰서로 불법연행, 감금되어 수십 일간 고문 피해를 받고, 간첩으로 조작되어 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다행히 지난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통해서 1981년 서산경찰서에서의 수사가 고문을 동반한 불법 수사였고, 이로 인해 작성·수집된 증거 역시 불법이라는 진실 규명 결정이 남에 따라 재심 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고의 월북'은 여전히 유죄
 
1981년 이성국 씨가 서산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작된 간첩혐의에 대해 재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한 기사
 1981년 이성국 씨가 서산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작된 간첩혐의에 대해 재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한 기사
ⓒ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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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여전히 전과자라며 한탄한다.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받았지만 고의 월북을 시도했다는 것은 여전히 유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 후 8월 9일 고의 월북에 대해 재심을 신청한 춘천지방법원에서 첫 심문이 열렸다. 올해 납북귀환어부 문제가 공론화 된 뒤 춘천지방법원에 재심을 신청한 사건 중 처음 심문이 열리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이러한 심문기일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이성국씨 역시 매우 긴장한 모습으로 법원 청사에 들어섰다. 

이날 진행된 심문에서 이성국씨는 재판부를 향해 납북 귀환 상황에서 벌어진 국가의 폭력, 이후 지속적인 국가의 통제와 감시 피해에 대해 억울함을 토로하였다. 심문을 마치고 나온 후에는 조금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이 재판의 결과를 알 수는 없으나 국가를 향해 한 번은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했다며 속이 후련하다는 그를 보며 이 재판 결과가 수천 명의 납북귀환어부 문제를 향한 첫걸음이라는 점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대했다. 

이성국씨의 고향은 부산 영도다. 그러나 2살 때 속초로 이사 왔기 때문에 부산에서의 기억은 전혀 없다고 한다. 이씨가 선원 생활을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만 14세부터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동력선의 연안 배 선원으로 능숙하게 일해냈고, 그 점을 눈여겨보던 외조부가 자신이 기관장으로 있던 명성호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명성호는 오징어잡이 배로 연안이 아닌 먼바다까지 나가 조업하는 배였다.

나이가 어린 이씨는 선원으로 일하지 못하고 임시 선원인 '가고쟁이'로 외조부와 함께 배를 탔다고 한다. 운항 장비라고는 오직 컴퍼스(나침반)가 전부였던 명성호의 선장은 선박의 방향을 주로 산이나 지형을 살펴 파악했고, 항구마다 위치한 등대의 깜빡임 차이로 지역을 판별했다.

그런 명성호가 납북된 것은 이씨가 승선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저는 선실에서 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우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나가보니 이미 북한 경비정이 딱 붙어 있더라고요. 어른들이 북한 경비정을 '까질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잠시 후에 총을 든 인민군들이 몇 명 올라오더라고요. 그리고 북한 경비정에 명성호를 밧줄로 엮어서 끌고 갔어요. 시동을 끄라고 해서 시동을 끄고, 나머지 선원들은 선실에 전부 있었어요. 우리가 그때 20명 이상 있었어요.

나는 기관실에 있어서 밖의 사정은 전혀 몰랐어요. '까질이'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명성호 스크루가 돌아갈 정도로 속도가 엄청 빨랐어요. 납북되던 날 날씨가 썩 좋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북한 항구에 들어갈 때까지 몇 시간 걸려서 들어갔어요. 들어가서 보니 거기가 장전항이라고 하더라고요. 나이 든 선원 분 중에 이북에서 온 분들이 많아서 대번 장전항을 알더라고요."

납북된 뒤 다른 선원들과 함께 억류된 곳은 평양 근처의 석암휴양소라는 곳이었다. 평소 몸이 좋지 않았던 외조부는 억류되어 있는 동안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아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외조부의 입원 치료는 1981년 서산경찰서 조사 때 특수지령을 받기 위해 공작교육을 받은 기간으로 조작되기까지 했다. 오래된 억류 생활과 외조부의 건강 악화에도 북한 군인들에게 적극적으로 항의하지 못한 것은 부친의 과거 경력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북한 신포 분이셨는데 한국전쟁 때 해군정보부에서 근무했습니다. 아버지가 월남할 때 북쪽에서 막내 고모, 막냇삼촌이 남한으로 못 내려오셨거든요. 그래서 저는 북에 억류되어 있을 때 아버지가 해군정보대에 근무했던 것이 탄로 나면 북한에 남아 있는 친척들에게 불이익이 갈까 봐 가족관계를 숨겼어요. 결국 탄로가 났죠. 탄로 난 후에 북한 군인들이 추가로 집중 추궁을 했어요. 그 뒤로 저에 대한 감시가 심해졌던 것 같아요."

남한으로의 귀환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누군가로부터 귀환한다는 말이 나온 뒤 곧바로 원산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납북되었던 선박 7척이 함께 원산항을 출발해 속초로 돌아왔다고 한다. 속초, 고성 선적 5척 선원들은 속초시청 대회의실에 수감되었고, 탁성호 등 다른 지역 배 선원들은 시청 옆 건물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몸만 밖에 있을 뿐 감옥에 있는 것과 똑같아
 
납북됐다가 귀환하는 어부 1980.11.12
 납북됐다가 귀환하는 어부 1980.11.12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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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기록에 따르면 이씨는 속초시청 회의실에서 대략 한 달 정도 머물며 조사받았다. 당시 집이 중앙동이었던 이씨는 시청 주변을 잘 알았다. 그곳 여인숙들 위치 역시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조사받았던 여인숙을 해동여인숙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도대체 수사관들에게는 부모·형제가 없는지 무조건 선원들을 조져놓고 물어보는 거예요. 들어가자마자 개 패듯 패는 거예요. 개새끼도 그렇게 때리지는 않을 겁니다. 오금 사이에 장작을 끼우고 꿇어앉혀놓고 허벅지를 막 밟아요. 북한에서 지령 받은 내용을 이야기하라는 겁니다. 없는 걸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나중에는 물고문까지 하더라고요. 손발을 묶어놓고 그 줄을 엉덩이 사이로 줄을 묶어서 딱 댕기고 나서 얼굴에 수건을 씌워서 물을 부어요."

이씨는 검찰 조사 시 경찰에서 고문받았다고 검사에게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경찰과 한통속일 것이라 또다시 고문당하지 않겠느냐는 두려움이 생겨 군사분계선 월선 사실을 경찰 수사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결국 이씨는 법원에서 군사분계선을 고의로 월선했다는 사실로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인정되어 집행유예 처벌을 받고 나서야 풀려났다.

연좌제로 인해 가족들 역시 이씨와 마찬가지의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이동과 취업, 감시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씨는 속초 시내를 벗어나려면 경찰서에 신고해야 했다. 신고 내용에는 일정, 장소, 사람, 모두 다 기재해야 했다. 그리고 속초로 돌아온 뒤에 다시 경찰서를 찾아 보고해야 했다. 이씨가 가장 불편한 점이 바로 이와 같은 일상적인 보고라고 했다. 이씨는 이러한 생활을 10년 이상 계속했다고 한다.

감시는 경찰뿐만 아니라 보안사에서도 있었다고 한다.
 
"보안사 애들이 한 달에 한두 번 집으로 옵니다. 잘 지내고 있느냐, 어디 갔다 왔느냐 질문을 하고 가요. 그러니까 사람이 밖에 나와 있을 뿐이지 감옥에 있는 것과 똑같아요. 지금 생각해도 그 수사관 놈도 참 할 일이 없었나 봅니다. 사람을 꼼짝을 못하게 해요. 한 번은 1975년도에 용성호라는 배를 타고 멸치잡이차 부산에 간 적이 있습니다. 배가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사복 입은 수사관이 미리 와 있더라고요. 이건 창살 없는 감옥이에요.

나는 납북어부니까 그렇다고 하지만, 막내 같은 경우 경찰대학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나 때문에 못 갔습니다. 연좌제 때문에요. 그리고 실제 우리 같은 사람은 공무원 시험 칠 엄두도 못 냈습니다. 똑똑하면 뭐 하고 배우면 뭐 합니까. 연좌제 때문에 아무것도 안 되는데 그런 꿈을 뭐 하러 꾸겠습니까."

이성국씨는 지금까지도 결혼하지 않은 채 혼자 살고 있다. 결혼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묻자, '매일 경찰이 찾아오는 남자를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결혼이라는 것은 꿈도 꾸지 않고 포기한 채 살았다고 했다.

최근에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문 후유증이 조금씩 나타난다고 한다. 날이 흐리기라도 하면 기상청보다 먼저 알 정도로 몸이 아프다고 한다. 기관장 일이라는 것이 엔진을 다루는 것이라 배를 타더라도 앉아서 근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국씨의 재심 재판 심문이 열리는 춘천지방법원 앞에서 이성국씨(왼쪽)와 또다른 납북귀환어부 김춘삼씨가 함께했다.
 이성국씨의 재심 재판 심문이 열리는 춘천지방법원 앞에서 이성국씨(왼쪽)와 또다른 납북귀환어부 김춘삼씨가 함께했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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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50년 만에 열린 심문기일에 검찰 측 검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변호인으로 참여하고 있는 최정규 변호사(원곡법률사무소)는 "어렵게 열린 재심 개시 전 심문에 검찰 측은 참여하지 않았을뿐더러 재심에 대한 의견 역시 제출하지 않았다"라며 "국가폭력 피해자를 대하는 국가 측이 조금 더 성실히 임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이 든다"라고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아쉬움은 이성국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날 재판부는 납북귀환어부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결정을 지켜보며 재심을 진행할 뜻을 내비쳤다. 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이 시급하다는 이씨는 올해 안에 꼭 재심이 열리기를 바란다며 다시 생계를 위해 바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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