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월드컵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인 지난 2002년 11월의 어느 날, 군생활을 하고 있던 나에게 비보가 날아들었다. 말을 하지 않고 흐느끼기만 하는 동생의 전화로 보아 뭔가 큰 일이 벌어진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불안감이 극에 달하자 오히려 동생이 말을 하지 않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잠시 후, 동생은 울음을 멈추고는 놀라지 말라며 말을 이었다. 동생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바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것.

'설마, 설마!' 눈물을 흘리며 급히 병원으로 바쁜 발걸음을 옮겼다. 이동하는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고, 제발 잘못된 소식이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설마 설마했는데... 갑작스레 돌아가신 어머니

지금은 비록 행정도시 개발로 인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시골집의 모습.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집에 와 보니 내가 선물했던 마지막 선물인 신발이 한번도 신지 않은 채 그대로 놓여있었다. 아직도 그 생각만하면 가슴이 메어온다.
▲ 어머니와 함께 살던 고향집 지금은 비록 행정도시 개발로 인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시골집의 모습.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집에 와 보니 내가 선물했던 마지막 선물인 신발이 한번도 신지 않은 채 그대로 놓여있었다. 아직도 그 생각만하면 가슴이 메어온다.
ⓒ 김동이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병원에 도착해 보니 나의 바람과는 달리 어머니의 죽음은 현실이 되어 있었다. 병원 장례식장에는 이미 어머니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었고, 먼저 도착한 동생과 친척들이 빈소를 지키며 울음을 참지 못하고 대성통곡하고 있었다.

빈소에 도착한 난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상주로서 문상객을 맞이해야 했고, 또 정신없는 가운데서도 많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장례를 마치게 되었다.

삼일장을 치른 터라 시골집에도 사흘만에 도착한 난 빈소를 지키는 내내 밤을 꼬박 새워 피곤한 몸이었지만,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집안 곳곳에 있는 어머니의 흔적을 찾았다.

유품을 찾던 중 발견한 가족 앨범을 펼쳐보며 환하게 웃음을 보이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나의 메마른 눈물을 다시금 샘솟게 만들었고, 가족들 몰래 뒷방으로 건너가 혼자서 흐느껴 울기도 했다. 그때, 같이 어머니의 유품을 찾던 동생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가슴에 품고 있던 앨범을 놓고 동생이 있는 곳으로 갔다.

"왜? 무슨 일 있어?"
"오빠, 이거 봐."

동생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그곳에는 작은 종이박스 위에 새 신발 한 켤레가 마치 신발가게에서 신발을 전시하듯 곱게 놓여져 있었다. 순간 난 울컥하는 마음에 또 한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신발 오빠가 일년 전에 엄마 생일선물로 사준 거 아냐?"

맏아들이 사준 신발, 아까워서...

때는 일년 전 직업군인의 길을 가고 있던 난 진급의 기쁨을 안고 어머니의 생신을 맞아 휴가를 나오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시골집까지 세 시간이 넘는 거리를 이동하면서 이동하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무슨 생일 선물을 해드려야 하지?'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다시 시골로 들어가는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걸어가는데 마침 대형신발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낡은 신발을 신고 밭에 나가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나서 어머니 생신선물로 신발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결심하고는 신발가게로 들어가서 신중하게 신발 한 켤레를 골라 예쁘게 포장도 했다.

선물도 샀겠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골집으로 들어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군복을 입고 있던 터라 눈에 잘 띄었던지 많은 마을 어르신들이 반갑게 맞아 주셨지만, 이미 나의 마음은 시골집에 계신 어머니한테로 가 있었다.

시골집에 도착하자 동생들은 이미 도착해 있었고,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식사를 하며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이어서 준비해 온 선물을 어머니께 드렸다. 그 중에서도 맏아들이라서 그런지 나의 선물을 받아 본 어머니께서는 무척이나 기뻐하셨고, "아까워서 어떻게 신지?"하며 몇 번이나 신발을 쓰다듬으며 바라보셨다.

"나중에 떨어지면 또 사드릴 테니까 아까워하지 말고 신으세요."

한번도 신지 않은 신발, 어머니 곁으로 훨훨

어머니의 삼우제 때 유품과 함께 한번도 신지 않은 새신발을 어머니의 품으로 같이 보내드렸다.
▲ 인생무상(人生無常) 어머니의 삼우제 때 유품과 함께 한번도 신지 않은 새신발을 어머니의 품으로 같이 보내드렸다.
ⓒ 김동이

관련사진보기


신발 선물을 받고 너무나 좋아하셨던 어머니였기에 한 번도 신지 않고 신발을 쌌던 신발케이스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는 어머니의 새 신발은 나를 두 번 울릴 수밖에 없었다.

새 신발을 부여잡고 대성통곡을 하자 가족과 친척들은 나에게 와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삼우제 할 때 그 신발도 같이 보내드려. 여기서는 신지 못했지만 그곳에서나마 신으시라고..."

그날 밤, 난 한번도 신지 않은 어머니의 새신발을 보며 너무나 가슴이 아픈 나머지 그 신발을 끌어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삼우제 날이 돌아오고 가족과 친척들은 인근의 사찰을 찾았다. 탈상을 하기 위한 어머니 영정사진과 유품, 그리고 나를 두 번 울린 가슴아픈 사연을 간직한 새 신발까지 든 채 진행된 삼우제는 가족들을 또 한 번 울음바다로 만들어버렸다.

특히, 사찰 안에서의 모든 절차를 마치고 나와서 한 켠에 준비된 곳에서 어머니의 유품을 태워서 날려 보낼 때에는 감정이 최고조로 북받쳐 올랐다. 내가 품안에 꼬옥 품고 있던 새 신발을 떠나보낼 때에는 아깝다고 하여 한 번도 신어보지도 못한 어머니의 가슴 아픈 사연때문인지 가족 모두가 아무런 말없이 연신 눈물을 훔쳐댔다.

나를 두 번 울린 어머니의 새 신발. 삼우제를 마치면서 난 그렇게 어머니께 드린 마지막 선물을 가슴 속에 깊이 묻었다.

덧붙이는 글 | <잊을 수 없는 선물> 응모글



태그:#선물, #어머니, #신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