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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농약이라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지난 10년간 4000원짜리 밥장사 해서 악착같이 모은 돈 2000만원을 고스란히 넘겨줬다. 그것도 모자라 마이너스 통장에서 1300만원을 더 내줬다."

충남 아산시 인주면의 인주 RPC(미곡종합처리장, Rice Processing Complex)에 보관 중이던 공공비축미 340톤이 불법 반출된 것으로 확인된 후, 인주RPC에 돈을 빌려준 식당 주인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그는 인주RPC 대표 K씨 아내가 다급하게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평생 모은 돈을 빌려 주었다고 한다. 그는 지난 10년간 식당을 꾸려가며 남편도 없이 자식 둘을 키우는 여성 가장이다.

사라진 340톤 공공비축미... 피해자들 고통 호소

인주RPC에 남은 원료곡 잔량이 모두 농협RPC로 옮겨졌다. 이로써 아산시는 인주RPC와의 채무관계를 모두 정리했다. 그러나 힘없는 농민들은 인주RPC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더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인주RPC에 남은 원료곡 잔량이 모두 농협RPC로 옮겨졌다. 이로써 아산시는 인주RPC와의 채무관계를 모두 정리했다. 그러나 힘없는 농민들은 인주RPC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더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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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인주RPC는 3000톤의 저장능력을 갖춘 개인 업체로 지난해 정부가 사들인 470여만톤을 보관 중인 곳이지만, 340톤가량이 사라졌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4억8000여만 원 어치에 해당한다.

공공비축미는 전쟁, 재난발생 등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해 정부가 농민들에게 사들여 전국 각지 RPC에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한 국민들의 비상식량이 사전에 유용된 것이다.

돈을 빌려줬던 식당 주인은 돈을 돌려받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고급외제차에 수백만원짜리 명품을 사용하는 그 사람들이 그깟 돈 떼먹을까 싶었다. 또 이자는 은행보다 많이 쳐 줄 것이며, 급한 돈 해결하는 대로 바로 돌려준다는 말을 의심 없이 믿었다. 우리같이 없는 사람에게는 큰돈이고 전 재산이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언제든지 내줄 수 있는 푼돈이라 생각했다." 그는 인주RPC를 원망하고 자신을 책망했다.

"칠십 넘은 늙은이가 뼈 빠지게 고생해서 농사지은 벼를 팔았는데 돈 한 푼 받지 못했다. 이를 어디 가서 하소연해야 하는가. 몇 년 전 교통사고 당한 자식 놈은 누워 있다. 이제 굶어 죽는 일만 남았다."

칠순이 넘은 한 할머니는 교통사고로 몸져누운 아들을 거두며, 남의 땅을 임대해 혼자 농사를 지어왔다. 그렇게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던 이 할머니는 작년에 농사지은 벼를 모두 인주RPC에 넘겼는데, 대금 지불은커녕 아무런 소식이 없다고 했다.

처음에는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던 주민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피해 농민들은 "인주RPC가 정상화돼야 돈도 받을 수 있다"며 말을 아꼈었지만 "결국 정상화 의지도, 채무변제 의지도 없어 보인다"며 대책 마련에 나섰다.

공공비축미 관리주체 아산시, 농민들 고통 외면

아산시는 인주RPC에 남아있는 원료곡 잔량을 모두 회수해 농협창고로 옮겼다고 밝혔다.

인주RPC에 원료곡을 납품한 후 대금을 못 받은 농민들의 눈을 피해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원료곡 이동작전이 벌어진 것이다. 작업은 5월 19~20일, 25~26일 4일에 걸쳐 이뤄졌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인주RPC 피해 농민들은 몸서리치며 분노하고 있다.

한 농민은 "인주RPC에 보관 중인 미곡엔 공공비축미도 있었지만 농민들이 개별적으로 납품한 미곡이 더 많았다. 아산시가 농협창고로 옮긴 미곡이 공공비축미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인주RPC는 공공비축미 문제를 해결하면서 면죄부를 얻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 아산시도 농민은 죽건 말건 인주RPC에 맡겼던 공공비축미만을 챙긴 후, 발뺌하려는 속셈이 드러났다. 그렇다고 정부의 각종 정책자금을 지원받아 사업하던 인주RPC를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못한 책임까지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주RPC 대표 K씨는 정부재산인 2008년산 공공비축미 470톤을 보관하던 중, 340톤을 빼돌려 5억원 상당(1톤당 147만원)을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잔량 조사 결과 부족분이 발생해 현찰로 정부에 변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K씨에게는 채무를 변제할 수 있는 자금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자신에게 원료곡을 납품하고 대금을 받지 못해 파산 직전까지 몰린 농민들을 외면했다.

이에 앞서 농민들은 5월 7일 아산시의 원료곡 이동을 저지한 바 있지만, 이후 은밀하게 추진된 두 번째 시도에서는 큰 저항 없이 원료곡이 옮겨졌다.

농민회, 인주RPC 피해현황 진상조사 나서

"인주 RPC의 부도덕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처음부터 힘 있고 강한 상대의 돈은 갚으면서도 어렵고 힘든 농민들의 돈은 갚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공공비축미를 농협창고로 옮기는 과정에서 부족한 잔량에 대한 대금을 아산시에 모두 정산했다. 반면 주민들의 눈은 철저히 피해 다니며 생활하고 있다."

아산농민회 김종환 감사의 말이다. 그는 또 인주RPC가 거칠고 강하게 채무변제를 요구하며 압박하는 채권자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갚으면서, 항의할 힘조차 없는 약자들의 돈은 갚을 생각조차 않고 있다며 분개했다.

김 감사는 "농민의 피해규모가 얼마인지, 인주RPC가 숨겨둔 재산은 없는지, 채무변제 능력은 얼마나 되는지 등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지 않고 있다. 특히 아산시는 공공비축미 챙기기에만 열을 올리고, 농민들의 피해 실상은 외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또 "인주RPC 대표 K씨가 구속되자 암암리에 힘있는 채권자들을 중심으로 구명운동까지 전개됐다. 그들은 K로부터 확실하게 무엇인가를 받을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아산시를 포함한 힘있는 채권자들은 자신들의 채무관계를 정리한 후 하나씩 빠져나갔다. 이젠 힘없는 채권자들만 남아서 인주RPC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처지로 전락됐다. K는 사과 한마디 없고, 오히려 불쌍한 채권자들을 기만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아산농민회는 우선 농민들의 정확한 피해규모를 조사하고 공동대책위를 구성한 후, 법적 대응을 해 나갈 방침이라고 전했다.

덧붙이는 글 | <충남시사><교차로>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공공비축미, #아산시, #인주R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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