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20 15:38최종 업데이트 24.07.21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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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요동치던 전선을 좇아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단계는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밀어붙인 것이고,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맥아더의 대역전이 두 번째 단계다. 세 번째는 압록강에서 오산-충주-제천-삼척 저지선까지 중국군의 승리이자 맥아더의 대참패. 마지막은 유엔군이 남진을 주저한 중국군을 오산 저지선에서부터 반격하여 서울을 재수복하고 휴전선까지 밀고 올라간 것이다.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오는 데 한 달 반 걸렸고, 유엔군은 두 달 만에 압록강까지 몰아붙였으나, 압록강을 넘어온 중국군이 두 달 만에 오산까지 전세를 뒤집고 내려왔으니 전선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였다. 역사를 읽어가는 내 심정도 기복이 심하다. 인민군의 남침개전에 원죄를 묻지만 국군의 패전은 황망하기 그지없었고, 유엔군의 북진 대목에서는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안도의 한숨과 통일의 희망이 교차한다. 이제 유엔군이 또다시 후퇴하는 대목에서는 무너진 기대감에 속이 탈 뿐이다.

맥아더의 참패는 서부전선에서는 초산의 실패(앞의 글)에서, 동부전선에서는 장진호 철수에서 동시에 봇물 터지듯 시작됐다. 장진호 전투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미국 양국에서 지금도 계속 소환하는 역사의 한 단원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단일 전투로서는 가장 많은 훈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지금도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장진호 전투를 실전의 중요한 교본으로 가르치고 있다. 장진호 전투 기념비가 2017년 버지니아주의 해병대박물관 경내에 세워졌고, 그해 대통령 문재인의 미국방문에서 첫 번째 방문지였다.  
 

중국 영화 <장진호> 포스터. ⓒ 장진호 포스터

 
중국에서는 2021년 <장진호>라는 영화가 개봉됐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천카이거와 쉬커가 공동으로 감독했고 이양첸시와 우징 등 스타급 배우들이 출연했다. 이 영화는 13억 위안(현재 환율로 약 2470억 원)이라는 당시로는 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들였고 개봉 11일 만에 40억 위안(약 7600억 원)이 넘는 흥행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이 미국에 맞선 승리를 강조하며 만들어진 소위 '국뽕' 영화의 하나다.

맥아더의 완벽한 실패
 

미국 버지니아 주 콴티코에 있는 미 해병대 박물관에 제막된 장진호 전투 기념비. 8각 모양의 각면에 장전 장면이 새겨졌고, 꼭대기에는 '고토리의 별'이 올려져 있다. ⓒ 연합뉴스

 
장진호 전투는 동부전선을 담당했던 미10군단 예하 미해병1사단이 압록강을 향해 개마고원 쪽으로 북진하다가 장진호 동안 서안에서 중국군과 치른 전투다. 이 전투에 투입된 유엔군과 중국군은 3만 대 12만, 1:4로 정도라는 게 통설인 것 같다.

장진호 전투의 전개는 간명하다. 맥아더가 저지른 정보와 작전의 완벽한 실패로 인해 유엔군이 중국군의 함정에 빠져들었고, 중국군이 공격을 시작하자 유엔군은 큰 손실을 당하면서 사투를 벌인 끝에 흥남으로 철수한 것이다. 장진호 전투의 상황을 요약한 지도를 보면 유엔군은 중국군에게 완전히 포위돼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장진호에서 첫 총성이 울릴 때 이미 유엔군이 패전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영하 40℃의 혹한 속에 벌인 전투라 양측 모두 참혹한 손실이 발생했다. 미육군의 공간사에 따르면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0일까지 미10군단에서, 미해병1사단은 1만5천의 병력 가운데 2621명(전사 393, 실종 76, 부상 2152)의 손실을 당했다. 미7사단은 2760명(전사 70, 실종 2505, 부상 185), 국군 수도사단은 778명(전사 126, 실종 334, 부상 318) 국군 3사단은 148명(전사 15, 실종 6, 부상 127), 해병1연대는 93명(전사 13, 부상 80)의 손실이 기록돼 있다. 살아 돌아오지 못한 전사와 실종만 합해도 3538명이다. 이와는 별도로 동상으로 인한 비전투손실도 상당하다.

중국군은 승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상자가 유엔군보다 훨씬 많았다. 중국군 당국의 공식 통계는 공개된 게 없지만, 당시 중국군 9병단이 마오쩌둥에게 보고한 숫자는 전사 1만9202명, 부상 2만8954명, 동사 4천여 명이었다. 승패와 별개로 양측은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장진호 전투 이후 미해병1사단은 이듬해 2월 중순에, 중국군 9병단은 3월에야 전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의 승패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중국군은 참전 이후 동부전선 첫 전투에서 미10군단을 패퇴시키고 동부전선의 유엔군 전체를 흥남까지 몰았고, 유엔군은 동해로 완전히 철수하고 말았다. 유엔군은 흥남에서 철수한 이후 일본으로 철수하는 방안까지 강구하면서 오산-삼척 저지선까지 후퇴했다.

전황이 이러한데 전선의 어느 한 부분을 부각시켜 패전을 희석하는 것은 큰 의미는 없다. 정치적으로 논쟁을 벌인다면 모를까, 역사로서 장진호 전투를 운위한다면 중국군의 승전을 깎아내리기보다 맥아더와 유엔군 사령부의 치명적인 실책을 성찰하고, 대참패 속에서 미해병1사단의 철수작전이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조망하는 게 온당하다.

그러나 맥아더가 비판받는다고 해서 예하 부대 모두가 그 비판을 동일하게 나눠 받는 것은 아니다. 후퇴라고 다 같은 후퇴인가. 패잔병으로 흩어져 인간사냥을 당하느냐, 아니면 군대로서의 조직과 기율을 유지한 채 적에게 최대한의 손실을 가하면서 목표지점까지 성공적으로 철수하느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게다가 유엔군을 따라가겠다고 홍수처럼 밀려든 피란민 10만 명을 싣고 나오느냐, 정부와 대통령만 먼저 도망가서는 한강 인도교를 예고도 없이 폭파하듯이 철수하느냐는 천양지차가 있다.

목숨 건 지휘관과 기율 있는 후퇴
 

강추위 속에 유엔군들이 장진호 전투에서 모포를 뒤집어쓰고 후퇴하고 있다(1950. 12. 10.). ⓒ 박도/NARA


장진호 전투의 주인공인 미해병1사단과 사단장 스미스는 애초부터 맥아더의 무모한 낙관론에 취해 압록강을 향한 쾌속북진에 몰두하지 않았다. 11월 10일부터 26일까지 하루 평균 1.5km씩 진격했다. 명령불복종에 가까울 정도로 속도를 늦추면서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에 보급품을 적절하게 쌓아두고 야전 활주로까지 만들며 북진했다. 이 보급품과 활주로는 철수할 때 큰 공을 세웠다.

스미스는 전선의 장병들을 독촉하면서 자신은 편안한 상황실에 앉아 있는 지휘관이 아니었다. 자신이 가장 후미에 남아 지휘하면서 전투와 혹한에 지친 장병들을 독려했다. 장병들은 이러한 사단장의 지휘를 좇아 사투를 벌이며 철수작전을 수행했다. 사단장이 후미였다는 것 한 가지만 보아도 그의 책임감과 지휘력을 알 수 있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안락한 일본의 집무실에서 특급 참모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실패했지만, 사단장 스미스는 영하 40도 혹한의 장진호에서 지친 장병들을 독려하면서 철수작전의 성공을 획득했다.

장진호 동안에 투입된 미7사단 31연대와는 선명하게 대비된다. 위의 병력손실 숫자에서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미해병1사단은 부상 2152명, 실종 76명인데 미7사단은 부상은 185명으로 아주 적고 실종은 자그마치 2505명이나 된다. 스미스는 "우린 해병대로서 우리 장비, 시신, 부상자를 모두 데리고 철수하든지 아니면 철수하지 않겠다"라고 당당하게 공언했다. 스미스는 자신이 공언한 대로 부상병들을 악착같이 챙겨서 끌고 왔으나, 미7사단은 웬만한 부상병은 전부 버리다시피 했으니 철수가 아니라 도주라고 할 만했다.

미7사단 31연대는 처음부터 두서없이 급하게 북진하느라 난로나 막사시설도 제대로 가져오지 못했다. 북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은 개인 방한장구도 없이 혹한에 내던지고 전투력이 급락하자 31연대 간부들이 미해병1사단을 찾아와 방한외투 등의 월동장비를 요청했다. 그러나 미해병대는 이들에게까지 내줄 장비는 없었다. 이런 지경이었으니 미7사단에서 상당수의 부상병이 발생했고 이들은 거의 대부분 실종되고 전사했던 것이다.

흥남 철수 이후 미10군단은 해체돼 미8군에 통합됐고 큰 손실을 당한 미해병1사단은 미8군의 예비대가 됐다. 미8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는 그해 12월 19일, 부임한 지 사흘 만에 미7사단장 데이비드 바를 즉각 해임했다. 2사단장 로버트 매클루어, 24사단장 존 처치, 1기병사단장 호바트 게이도 싹쓸이하듯 모두 해임했다.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하고 퇴각조차 무질서했던 '맥아더의 아이들'이라고나 할까. 엄청난 수의 전사상자와 장성들의 무더기 해임이 맥아더 실패의 뒤풀이가 됐다.

또 한번 뒤집힌 세상, 그리고 대학살
 

흥남, 강추위 속에 남하하는 피란민 행렬(1950. 12. 29.). ⓒ 박도/NARA

 
중국군은 서부전선에서도 유엔군을 격파하며 거침없이 남하했다. 중국군이 평양 동쪽의 성천으로 진출하고, 북한 유격대가 성천-양덕 도로를 점령하자 유엔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한국전쟁 최대의 전리품이었을 북한의 수도 평양을 다시 내주면서 평양의 외항인 진남포에서는 보급물자 2천 톤을 고스란히 파기해야 했다.

유엔군 사령부는 12월 8일 주력부대를 보존하기 위해 38선까지 후퇴하기로 했다. 흥남에도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흥남에서는 병력 10만5천, 차량 1만8422대, 물자 35만 톤 등을 철수시켜야 했다. 게다가 피란민이 목숨을 걸고 모여들었다. 결국 유엔군 장병들이 극한의 노력을 쏟아내 10만 명을 사지에서 구해냈다. 철수작전의 성공을 아무리 칭송해도 피란민들은 이미 삶의 근거를 송두리째 박탈당한 피눈물의 피란이었다. 유엔군은 12월 24일 흥남 부두의 탄약 적재소를 폭파했고 거대한 폭발음을 끝으로 철수작전을 종결했다.

유엔군과 국군은 패배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11월 말부터는 철수부터 하자는 심리에 빠진 것 같다. 12월 15일, 보름 만에 38선 이남까지 썰물처럼 철수했다. 어떻게 반격해서 성공한 북진이었는데, 이 얼마나 허탈한 후퇴인가.

중국군은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고는 1951년 신정부터 3차 공세를 가하자 유엔군은 1월 4일 수도 서울까지 포기했다. 그나마 전쟁 발발 직후와는 달리 국민들에게 대피령을 발령했다. 전국에서 700만 명이 남으로 남으로 피란했다. 곳곳에서 세상은 다시 한 번 뒤집히면서 민간인 학살극이 또 벌어졌다. 앞의 글에서 찾아본 신천의 학살을 비롯해서 생존의 순응이 부역의 대죄가 되어 죽음으로 갚는 비극이 수없이 벌어졌다.

중국군의 남진은 오산 충주 제천 삼척 저지선에서 비로소 멈췄다. 38도 선에서는 계속 남하할 것인지 정치적으로 잠시 주저했고, 37도 선에서는 보급선이 늘어지면서 군사적으로 심각하게 주저했다. 이미 두 번이나 반복된 현상이었다.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몰아갔을 때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유엔군 역시 경주하듯이 쾌속북진만 부르짖다가 늘어진 보급선으로 많은 문제가 야기됐다. 중국군도 같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전열을 재정비한 유엔군이 다시 북진하여 38선을 회복했다.

황당한 국군 사단장 도주사건 

그런데 1.4후퇴의 전술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공간사를 읽다가 어느 대목에서 내 시선과 생각이 멈칫했다. 사실 지금까지 <한 권으로 읽는 한국전쟁>과 <6.25전쟁 주요전투 1,2>를 기본 텍스트로 읽어오면서 전쟁의 팽팽한 긴장감이 한순간 맥없이 풀릴 때가 가끔 있었다. 이번에 그런 대목이 더 강하게 눈에 들어왔다. 유엔군이 후퇴하면서 38선에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대목에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다.
 
"그러나 (1950년 12월 후퇴하는 가운데) 군단의 우전방을 방어할 8사단의 진출이 지연되어 군단의 방어진지 편성에 약간의 차질이 생기게 됐다. 8사단은 시변리-연천간 도로(지금의 군사분계선 북쪽)가 북한군 패잔병들에게 차단됐음에도 불구하고 돌파를 강행하다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후 사단은 연천을 거쳐 원주로 철수한 후...(중략)"
 
갸우뚱했다. 정규군 1개 사단이 겨우 '패잔병'에게 막혀 많은 피해를 입었다니. 전쟁역사 이전에 글쓰기의 문제로 눈길이 멈췄다. 패잔병이라 하면 승전의 뒷정리에서 느긋하게 소탕이나 하는 대상이 아닌가. 그런 패잔병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은 게, 소대나 중대도 아닌 정규군 사단이라니. 이것은 앞뒤가 조응하지 않는 문장이다. 나는 실제 어떤 전투인지 궁금해 다른 자료를 찾았다. 그런데 '많은 피해'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는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발생한 전투는 국군 8사단이 인민군 2개 대대의 기습적인 포위공격을 받아 병력과 장비의 1/3이나 상실한 것이다. 사단이라면 9개 대대 규모인데 겨우 2개 대대의 공격에 이렇게 참담하게 패전하다니. 이때의 지휘부 상황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다. 사단장 이성가는, 도보로 이동하는 사단 주력을 16연대장 유의준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차량에 탑승해 연천으로 먼저 후퇴해 버렸다. 지휘관 부재중의 8사단이 황해도 토산의 임진강에서 도강하려다가 매복해 있던 인민군 2개 대대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도강과 같은 중대한 작전에서 사단장은 먼저 가버렸다니. 사단장 도주 사건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안타깝고 한심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구원군으로 등장한 맥아더는 치명적인 오판으로 완전한 승리를 목전에서 날렸고, 철수를 하게 되자 국군 사단장은 차를 타고 선두주자로 가버리고, 주력 장병들은 걸어서 후퇴하다가 '패잔병'에게 궤멸당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미해병1사단장 스미스가 후미에서 자신의 목숨도 걸고 철수작전을 지휘한 것과 잔인하게 대비된다. 적군이지만 인민군 6사단장 방호산과도 비교가 된다. 인민군 6사단은 경남 서부에서 철수지시를 받고는 지리산으로 올라 백두대간을 타고 북으로 철수했다. 이들 역시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손실도 컸으나 조직을 유지한 채 그들의 전쟁지휘부 휘하로 복귀했다.

미해병1사단이 철수작전을 제대로 수행해서 훈장을 받은 것처럼, 인민군 6사단도 같은 이유로 부대 표창과 전장병 일계급 특진의 포상을 받았다. 방호산과 대비하는 게 거북한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대상에는 반면교사의 아군도 있고, 적군의 모범장병도 있다.

지휘관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단장 이성가는 사건 다음 달인 1951년 1월 적전 직무유기와 군무이탈 혐의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전시의 기강을 세우기 위한 엄중한 판결일 것이다. 그러나 국군 2군단장 유재흥을 비롯한 여러 장성들의 탄원으로 무기로 감형됐고, 다시 참모총장 정일권과 국방장관 신성모의 지시로 선고유예로 살아났다. 선고유예는 사실상 재판이 없었던 것과 같은 결과다. 그리고 1년 뒤에 이성가는 국군 7사단장으로 복귀했다. 사형에 해당하는 지휘관의 치명적인 죄과를 유야무야한 것과 마을 인민위원회의 강압에 끌려다녔다고 부역자로 몰려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을 당한 이들을 비교해보라.

또 한 가지, 당시의 역사를 오늘에 기록한 국방부의 공간사도 씁쓸하다. 규모로 봐서 2개 대대를 패잔병이라고 서술하는 것은 상식 밖이다. 아마도 적개심 때문에 인민군을 비하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인민군을 비하하다 보니 자기 얼굴에 오히려 먹칠을 한 꼴이 됐다. '패잔병'에게 치명상을 입은 국군 8사단의 장병은 도대체 정상적인 정규군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지휘관의 이탈과 사형선고라는 중대한 사항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을 읽어오면서 '그래도 공간사는 공간사'일 것이라는 최소한의 상식에 깊은 균열이 일었다. 내 가슴이 서늘해진다. 공간사를 계속 기본 텍스트의 하나로 읽어가야 하는 것일까.

그뿐이 아니다. 스미스와 이성가가 돌출되는 역사를 읽어가는데 옆에서 들려오는 오늘의 뉴스까지도 싸늘하다. 지휘관이 지휘는 하지 않고 지도를 했고, 지휘가 아닌 지도의 결과가 잘못돼 장병이 죽은 것은 지도를 받은 부하의 잘못이라는 오늘의 사단장. 그 사단장이 하필이면 스미스와 같은 해병대라서 더 싸늘하다. 내가 해병대 출신이라서가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 국군의 무기는 무기수출국이 될 정도로 상당히 발전했으나 지휘관의 마인드는 아직도 그때 그 수준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더욱더 싸늘한 것이다.

* 추가 : 국방부 군사연구소는 공간사를 그동안의 전사연구 결과를 반영하여 개정판을 준비중이라고 한다. 담담하면서도 역사의 교훈에 충실한 공간사로 업그레이드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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