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재일대한청년단을 예방한 자리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민간 단체인 대한청년단의 총재를 맡았다. 이후 대한청년단은 민간인 살해와 불법구금을 진두지휘하다 국민방위군 사건에까지 연루된다.
대한뉴스
조직과 인적구성 역시 문제의 소지가 상당했다. 국민방위군의 사령관과 부사령관 모두 사형을 당한 것도 우발적인 일이 아니었다. 국민방위군은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를 기간으로 창설했는데 이것이 조직상의 중대한 문제가 됐다.
대한청년단은 이승만이 해방 후에 난립하던 청년단체들을 통합한 전국 조직으로 남녀 단원이 200만에 달했다. 중앙조직 아래 서울에 9개 구지부, 전국에 10개 도지부가 있었고 가장 하위에는 읍·군·가두의 지부가 4230개나 됐다. 숫자로는 대한민국의 청년 대부분을 포괄하는 초대형 우익단체였다.
한편 병역법에서는 병역에 편입되기 전의 청년들에 대해 군사훈련을 실시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이를 근거로 대한청년단은 각 지부의 간부 720명을 육군보병학교 배속장교교육대에 입교시켰다. 이들은 40일간의 군사훈련을 수료하고 예비역 소위로 임관했다. 이들은 각 지부에 돌아가 인근 군부대 협조를 받아 대한청년단원들을 훈련시켰다. 대한청년단은 청년을 내세운 정치단체였지만 준군사단체의 성격도 갖게 된 것이다.
청년방위대는 이승만 정부가 1949년 11월에는 병역법에 근거해 육군본부 청년방위국이 관장하는 청년방위대를 설치했다. 충남 온양에 청년방위대 간부훈련학교에서 한 달 간의 훈련을 거쳐 방위소위로 임관했다. 청년방위대 편성은 1950년 3월에 완료됐다.
시도별로 사단급인 방위단이 있고 그 아래 지대(군, 연대), 편대(면, 대대), 구대 또는 소대(리, 중대)를 편성했다. 청년방위대의 시도 방위단장은 대부분 대한청년단의 각 지방 단장이었다. 청년방위대는 사실상 사설단체인 대한청년단에게 병역법의 청년방위대란 외피를 입힌 것이었다. 국민방위군은 바로 이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를 기간으로 창설한 것이다.
국민방위군법은 방위군이 군사행동과 훈련 이외에 정치운동 청년운동과 일반치안에 관여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청년단체를 자신의 정치활동에 동원해 온 이승만을 견제하는 장치였다. 국방차관 장경근은 국회에서 법안 취지를 설명하면서 "청년방위대가 후방 예비군 역할을 해온 까닭에 잡음과 부작용이 많았고, 법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국민방위군을 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잡음과 부작용'이 많은 청년방위대를 개선하지 않고 오히려 법적 근거까지 부여했으니, 국민방위군의 부패는 곧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의 잡음과 부작용의 동의어인 셈이었다.
1950년 12월 전선이 다시 밀리는 상황에서 창설된 국민방위군은, 조직과 편제와 예산, 실무조직의 구성과 기간요원의 교육훈련과 같은 기본업무는 일사천리로 처리됐다. 일사천리는 곧 주먹구구였고 '잡음과 부작용'을 새로운 법과 제도에 이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자신의 심복이자 대한청년단 2대 단장이었던 김윤근에게 파격적으로 준장 계급장을 달아주며 방위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김윤근은 자신이 부단장으로 거느리고 있던, 자신을 주군처럼 떠받든다는 윤익헌을 부사령관(대령)에 앉혔다. 그 아래 참모들 역시 청년방위대 간부들로 채웠다.
김윤근은 윤익헌에 대해 "돈을 만들어 내는 재주가 그와 맞먹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추천했다"고 실토할 정도였다. 방위군 수뇌부와 사령부는 신성모가 측근들로 하는 병정놀이처럼 창설된 것이다. 이처럼 잘못된 정책, 문제 있는 조직, 잘못된 인사가 단단하게 결합됐으니 무슨 사건이 일어나도 놀랄 일은 아니었던 상태였다.
약탈과 전염병... 참담한 현장
그 결과 국민방위군의 현장에서 벌어진 일은 참담하기만 하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2010) 일부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국민방위군에 소집된 자들의 주요 목적지인 대구, 경산, 마산, 부산, 통영 등에 도착하면 신체검사가 행해졌다. 일단 신체가 건강한 장정은 현역병이나 국민방위군 기간병으로 선발됐으며, 여기서 불합격 인원은 영천이나 울산, 사천, 진주 등의 교육대로 다시 보내졌다. 거기서도 본부대와 지대로 재편성되어 인근의 수용시설로 보내졌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병약한 자는 자꾸 걸러져서 열악한 환경으로 밀려나 죽음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됐다.
국민방위병의 배급식량은 1인당 4홉으로 전쟁포로들보다 적었다. 의약품은 거의 전무하였다. 그런데 교육대 간부들은 식량을 빼돌려 부정처분을 하거나 횡령하기 일쑤였다. 일부 간부들은 장정들의 주먹밥을 떼어내거나 쌀을 통째로 상인에게 팔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방위군의 조직구성은 청년방위대의 인적 구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애초에 군 경력이 거의 전무한 대한청년단 배속장교나 청년방위대 장교 출신들에게 벼락 진급을 시켜 관리를 맡겼던 것부터 부실의 원인이 됐다. 사령부 자체가 부정을 일삼았으므로 내부 감시체계마저 마비되어 교육대가 해체될 때까지 부정과 횡령은 전면적으로 계속되었다.
배급되는 식사의 양은 갈수록 줄어들어 나중에는 계란 만한 소금 주먹밥이 나왔고, 굶주림에 직면한 국민방위병들은 민가에 뛰어들어 구걸이나 약탈을 하고, 너무나 배가 고파 소나무 껍질, 땅속의 메뿌리, 정미소 벽에 붙은 왕겨, 인분을 뿌린 밭작물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먹었다. 심지어 우물가 수채에 버려진 밥풀을 주워 먹기도 했고, 바닷물을 먹고 사망에 이른 경우도 있었으며, 밥을 훔쳐 먹다 기간사병에게 맞아 죽기도 했다니.
이렇게 열악한 영양공급 상태와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다수의 인원을 집단수용 하게 되자 발진티푸스 등 유행병도 급속히 퍼져 사망자가 속출했으나 교육대는 별 대책이 없었다. 환자가 생기면 닭장, 옹기가마, 창고 등 별도의 장소에 따로 격리했다가 죽으면 들것에 실어 아무 데나 묻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나마 교육대 근처에서 사망하면 암매장지라도 추정할 수 있었으나, 길가에서 죽은 많은 장정들은 사망지점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사망자 명단도 가족에게 통지한 게 없었다. 살아 돌아온 고향 친구가 사망사실을 알려주는 게 고작이었다. 거의 모든 교육대에서 사망사실이 확인됐으며, 많게는 수용 인원의 90% 이상이 죽었다는 증언이 있는 바, 이를 그대로 믿기 어렵지만 당시 처참했던 상황을 인정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국가는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였다. 국방부는 국회에서 유엔 구호물자는 유엔 중앙구호위원회의 정책상 민간이 아니면 배정할 수 없으며, 국민방위군이 정규군이 아니기 때문에 원조물자를 배정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제2국민병에 잘 조치하라는 이승만대통령의 지시(1951.1.11.)에도 불구하고 3월 중순이 돼서야 귀향이 시작됐다. 그동안 교육대에 구호물자가 즉각 지급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두 차례에 걸친 수사와 재판 끝에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을 포함한 5인이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됐으나, 피해를 입은 국민방위병과 그 유족들에게는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정부가 취한 최선의 구호사업이 바로 1951년 4월 15일에 시작된 귀환장정환자 치료사업이다. 이 사업 결과 1만1298명의 국민방위군 환자를 전국 10개 진료소에서 치료해 결국 575명은 치료 도중 사망했고, 퇴원자 1만371명과 환자 352명이 잔류했다.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인민군에게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국민방위군에 자원입대한 5대 국회 민의원 서태원은 "인민군 의용군 시절에는 주먹밥이나마 하루 세 끼를 거른 적은 없었지만 국민방위군으로 남하할 때는 병자와 아사자가 속출해도 아는 체하는 사람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국가는 충분히 반성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