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 학살을 다룬 황석영 작가의 소설 <손님>. 북한을 다섯 차례 방문해 구상하고 집필했다.
창비
역사학자 심재훈(단국대 역사학과)은 <손님>을 '역사보다 역사다운 소설'로 평가한 바 있다. 역사가는 특정한 시간이나 시대를 해설하는 사람이고, 그 해설에 다양한 방식과 경우의 수를 동원한다는 점에서, 황석영이 <손님>에서 시도한 신천 사건에 대한 '기억작업'은 역사가의 그것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손님>이 문학이면서도 한 시대를 해설하는 역사학적 행위라고 본 것이다.
문학작품은 기실(記實)과 우의(寓意)를 나눠 생각할 수 있다. 기실은 실제의 역사나 현실 혹은 그와 유사한 상황의 기술이고, 우의는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소설에서의 기실이란 사실과 유사한 플롯과 가상의 인물들을 통해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다.
<손님>에서 기실은 1950년 그때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이고, 우의는 작가가 사건 당사자들을 소설적인 대화를 통해 화해로 끌어가는 것이다. 소설에서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류요섭 목사이지만, 사건의 주인공은 그의 형인 류요한이다. 소설 속에 펼쳐진 류요한의 시간을 좇아가보면 신천 사건의 전후좌우를 깊숙히 이해할 수 있다.
사건의 전후좌우
류요한의 고향은 황해도 신천의 찬샘골이다. 할아버지 류삼성은 기독교인이 됐고 평양의 성경학교를 나와 목사가 됐다. 아버지 류인덕은 류삼성과 함께 찬샘골 광명교회를 세운 장로로, 아들 이름을 요한과 요섭(요셉)으로 지을 정도로 독실했다. 류삼성에 이어 궁방전 농사를 착실하게 지어오던 류인덕은 일본이 국유지로 분류된 궁방전을 동양척식에 넘기자 그들의 과수원을 관리하는 마름이 돼 포실한 중농으로 재산을 불렸다.
사건의 주인공 류요한은 신천 학살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다. 빨갱이들은 루시퍼의 새끼들이고 계시록의 짐승들이며, 자신은 미가엘 천사와 한편이라고 주장하는, 강고한 기독교인이다. 찬샘골의 그의 집에는 동네머슴 이찌모(박일랑)와 아버지 과수원의 일꾼 순남이 아저씨가 있었다. 이 둘은 동네 사랑에 기거하면서 열 살 아래인 주인장의 맏아들 류요한과도 종종 어울렸다. 겨울엔 동네사랑에 모여 놀았고, 여름에는 서리나 천렵을 다니기도 했다.
순남은 열 살 무렵 그의 아버지가 조선인 마름을 앞세운 동양척식에게 땅과 재산을 전부 빼앗겼다. 가족은 흩어지고 순남이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스무 살에 과수원으로 들어왔다. 그는 야학을 같이 다니던 사람들과 만든 마을의 공제회가 지주조합에 의해 흐지부지되자 마을을 떠나버렸다. 은률로 간 순남은 공제회 일로 연행돼 경을 치고는 금산포 광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노동자회보를 통해 사회주의니 계급이니 하는 말들을 알게 됐다. 일제가 패망하자 광산은 문을 닫았고 그는 찬샘골로 돌아왔다.
박일랑은 산판에서 출생했다. 일본 십장이 지어준 이름이 이찌로였다. 어려서 할머니 손에 지냈다. 열여덟 살에 색시를 얻어 화전을 일궜으나 화전 단속에 걸려 징역 10개월 살았다. 돌아와 보니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아내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박일란은 공사판을 전전하다가 류요한의 마을로 오게 됐다. 1945년 기독교인들이 조선민주당을 만들 때 한쪽에선 조선노동당이 당원들을 늘려갔다. 찬샘골에서는 이찌로와 몇몇 사람이 제일 먼저 입당했다.
류요한이 스물한 살 되던 해에 해방이 됐다. 황해도의 건국운동은 기독교인들이 활발하게 주도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진주하고 신천군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면서 무게중심은 바뀌기 시작했다. 류요한이 보기엔 어중이떠중이, 머슴, 건달, 떠돌이 따위들로 인민위원회가 채워진 것이다. 기독교 세력은 인민위원회와 결별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면서 교회 사이의 연락망을 유지해 나갔다.
찬샘골에서는 순남이 적위대를 꾸리고 보안 책임을 맡았다. 그는 공산당과 교회가 충돌하며 대의원 투표를 거부하는 찬샘골 광명교회에 들어와 류요한의 아버지와 날선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박일랑은 농민위원장이 돼 찬샘골의 토지개혁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박일랑에게 손찌검을 한 류요한의 아버지가 현장에서 체포됐다. 연행된 아버지는 자신의 땅을 포기하는 토지개혁 문서에 도장을 찍고서야 풀려났다. 1만2000평의 농지는 졸지에 5000평으로 쪼그라들었다.
해방 직후 알려진 친일파는 진작 도망갔고, 가을부터는 건준에 참가했던 지주나 사업가, 장로들이 고향을 떠나 월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농에 속하는 류요한 가족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류요한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했다. 뒤집는 그들이 다름아닌 자기네 머슴이고 일꾼이었던 사실에 더욱 분노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본론과 성경, 십자군과 사탄의 싸움이라는 프레임이 철벽처럼 굳어갔다. 한편 류요한의 친구들은 폭탄 사건을 벌이고는 일부는 구월산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월남했다. 이들은 류요한에게 훗날 비밀연락을 하겠다는 약조를 하고 떠났다.
1946년 3월, 3.1절 사건과 토지개혁으로 공산당은 기독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원수가 됐다. 1948년 남북한 정부가 따로 세워지고 신천은 인민공화국 시대가 됐다. 오래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터졌다. 류요한은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마루 밑의 구덩이에 숨어지냈다. 일제강점기에는 안온한 중농의 아들이었으나 이제는 구덩이로 피신한 신세였다. 그를 지탱해 준 것은 교회였다.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서 단합했고 다른 교회와 연대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리라는 꿈으로 버텼다.
그러다가 교회 연락망을 통해 '자유의 십자군' 미군이 곧 진공해 올 것이라는 비밀전갈을 받았다. 구월산이든 어디든 도피하던 청년들은 교회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군의 진공 이전에 선제적으로 봉기를 일으키기로 했다. 신천 옆의 재령에서 10월 14일 먼저 봉기를 일으켜 잠시 성공했으나, 운 나쁘게 퇴각하던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반동 기독교인을 색출해 처형하는 피의 광풍이 이틀 동안 재령을 휩쓸었다. 인민군은 후속부대와 합류하여 제 갈 길로 가버렸다.
피의 광풍... 옮겨 적을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