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24 11:24최종 업데이트 24.08.24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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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학도의용군의묘 ⓒ 윤태옥


국립서울현충원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현충문과 현충탑을 보게 된다. 텔레비전에서 종종 보는 바로 그곳이다. 일군의 무리를 이끌고 참배하러 나타나는 소위 거물 정치인들이 애용하는 곳이다.

'충렬을 높이 드러낸다'는 현충의 뜻과는 별 관계도 없이 자신의 정치적 발언을 강하게 하려고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거행하는 뻔한 의례는, 그저 식상하기만 하다. 그 현충문 바로 왼쪽에 있는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에도 들러서 짤막한 묵념이라도 했으면 좀 나았을 텐데, 그런 상상력을 가진 정치인들은 없는 것 같다.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은 지금의 현충문 자리에 있었던 것인데 1967년 현충탑을 새로 세울 때 현 위치로 옮겼다. 무명용사탑 바로 뒤에는 학도의용군의 묘가 있다. 포항지구 전투(1950.8.)에서 전사해 가매장했다가 전후에 발굴한 학도의용군 48위의 유해를 합동봉안한 것이다. 이들 48위의 유해는 1묘역에 안치했었다가 무명용사탑을 이전하면서 함께 이장해 온 것이다. 그래서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이란 긴 이름을 갖고 있다.

학도의용군을 기리는 현충시설이 꽤 많은 편인데 내게는 국립서울현충원의 이것이 가장 인상적이다. 또 하나는 인천 수봉공원에 있는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다. 수백 명의 참전자 명단이 새겨져 있고 그 옆에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가 세운 보은비도 눈에 뜨인다. 기념관은 현충시설로는 규모가 있는 편인데 학도의용군 기념관은 세 개나 된다. 포항에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이 있고 태백의 태백중학교에는 학도병 기념관이 있다. 영덕의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도 학도의용군 기념관이라 할 수 있다.

무명이나 학도 그리고 의용과 용사란 말이 다가온다. 현충원에서 장군이니 대통령이니 하는 거창한 타이틀보다 고요하고 진하게 스며온다. 학업이란 기회와 특권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전선에 나섰으나, 공훈록은커녕 전사자 명단에도 이름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무연고 유골로 남은 사람들이다. 살 만큼 산 게 아니라, 귀하디귀한 청춘시대에 참혹한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했으니 그 애처로움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애처로움은 그뿐만은 아니다.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이들을 가리켜 나라를 위해 장렬히 전사한 애국자라고 하는, 현충의 서술과 발화는 수없이 보고 읽었다. 그러나 이들 희생자들을 운위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로서 마땅히 반성해야 할 것은 제대로 반성했을까. 백성들의 흠은 세세하게 잘도 헤집어 내지만, 정작 국가권력의 실체로서 자신의 흠결은 두루뭉술하게 외면하거나 여차하면 저놈 나쁜 놈이란 고함으로 덮어버리는 나쁜 습성은 세월이 가도 그대로인 것 같다.

그 애처로움을 어찌 말로 다할까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에 있는 학도의용군 자료사진 ⓒ 윤태옥


학도의용군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12년 발간한 연구집과 자료집을 통해서 쉽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연구소는 학도의용군을 크게 세 가지 범주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좁은 범위의 학도의용군이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 학생 신분으로 자발적으로 참전했으며, 군번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승만의 복귀 담화(1951.3.)에 의해 학교로 돌아간 학도병들이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6~7년 후에 학도의용군 활동을 인정받아 병역면제 대상자로 확정된 이들이다. 모두 1844명이 병역면제 조치를 받았다.

주로 수도사단 학도의용대, 3사단 학도의용군, 여수순천 학도의용군 그리고 전국학생연맹 소속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학도의용군 단체 등이다. 이들과는 참전경위와 살았던 처지가 다르지만 대한해협을 건너온 재일학도의용군 642명도 좁은 의미의 학도의용군으로 분류하고 있다.

두 번째로 병역면제 대상자보다 범위를 확장해서 정의하는 학도의용군이다. 참전 당시 학생이었고 참전 의지가 자발적이라고 판단되는 모든 학도병들이다. 이들은 각급 부대에서 복무하다가 군번을 부여받아 정규군 신분으로 전환된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국가가 위험에 처하자 법적인 징집 대상이 아니었지만 자발적으로 나섰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존경을 표시해야 한다는 취지다.

군사편찬연구소에는 학도의용군 참전 경험이 구술기록으로 적지 않게 쌓여있다. 이 구술자의 대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복귀령에도 불구하고 이미 군인 신분이 됐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었고 훗날 병역면제 혜택의 대상자도 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1951년 4월 이전까지 몇 개월 동안의 학도병 활동으로 훗날 병역면제를 받은 이들과, 학도병으로 종군하다가 군번을 부여받고 수년 동안 복무를 한 이들과의 차별성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군사편찬연구소는 이런 범주의 학도의용군을 2만5000~3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서울학도포병대, 육군본부 직할 독립1유격대대, 육본 직할 정훈1, 2대대 등에 속한 학도의용군들과 여자학도의용군들이 이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참전 당시에는 학생 신분이었으나 활동 범위와 시기가 명확하지 않지만 학도의용군으로 분류해야 할 이들이 상당수 있다. 인천 주변과 옹진 등 서해안의 여러 섬지방 또는 북한 지역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다양한 형태로 적군과 맞섰던 이들이다.

좁은 의미의 학도의용군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1951년 4월 이후에도 현역도 아닌 채로 유격단체나 비정규전 부대에 소속돼 활동하거나, 북한 지역에서 학도의용군 단체 등을 조직하여 활동한 이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3만5000~4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예를 들어 옹진학도유격대, 태극단 학도의용군 그리고 후방 각지에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던 학도의용군들 이에 속한다.

세 가지 범주의 학도의용군을 합하면 대략 6만~7만 명이다. 전쟁이든 평시든 국민개병주의에 의한 의무복무라도 어떻게든 면탈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실제 많은 수의 젊은이들과 부모들이 병역회피를 희원하는 현실에 비견하면 그 충정을 높이 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도의용군 안에는 당시의 징집연령인 만 17세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소년지원병이란 명칭으로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학도의용군은 징집을 법적으로 연기할 수는 있는 징집대상자였으나 소년지원병은 아예 징집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구체적으로는 1933년 9월 1일 이후 출생자 가운데 자발적으로 참전한 이들을 소년지원병으로 분류한다. 참전자들에 의하면 3000명 내지 3500명 정도라고 하는데, 전사자 명부에서 확인되는 소년지원병은 2464명이다. 소년지원병이라고 해서 따로 조직과 단체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학도의용군의 일부로 인식했기 때문에 별도의 기록은 없다고 한다.

학도의용군은 인민군의 남침 직후에 바로 시작됐다. 학도의용군이란 맥락에서 최초의 움직임은 6월 27일 서울문리대 학생들이 조직한 '학도위문대'다. 학생들이 참전 가능성 등을 문의하자 평소 학도호국단을 잘 알고 있던 국방부 정훈국장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간식과 음료를 준비해서 미아리와 청량리까지 후퇴해 온 장병들을 위문하는 수준이었다.

최후의 방어선에서 군번도 계급도 없이 싸우다

학도의용군 결성지와 주요 전투지 ⓒ 봉주영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겠다는 행동을 직접 유발한 것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6월 28일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고 서울이 북한 인민군 수중에 떨어지자 국군은 물론 피란민들과 학생들도 목숨을 걸고 한강을 도하했고 수원에 모여든 학생 200여 명이 6월 29일 국방부 정훈국 후원 아래 '비상학도대'를 결성했다. 서울 경기 지역의 전국학련 이북한련 반공학련 출신들과 학도호국단 간부 일부가 참여한 것이다.

이들은 급박한 전황 속에 200여 명을 3개 소대로 편성, 한강방어선 전투에 투입됐다. 여기서 많은 학생들이 전사했으나 이것은 오히려 후방의 학생들에게 참전의지를 자극하는 결과가 됐다. 그러나 비상학도대는 7월 3일 인민군이 수원까지 밀고내려오자 후퇴하는 국군 대열에 휩쓸려 산발적으로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수원에서 비상학도대가 활동할 즈음 대전에서는 700여 명의 학생들이 '의용학도대'를 조직해 활동을 시작했다. 전황이 계속 나빠지면서 비상학도대와 의용학도대는 모두 대구로 후퇴했는데 이들은 대구에서 '대한학도의용대'로 통합했다. 이 시기에 부산에서도 대한학도의용대라는 같은 명칭을 쓰는 또 다른 조직이 결성돼 있었다. 이 두 조직은 7월 26일 부산에서 '대한학도의용대'로 통합했다.

당시 학도병들이 대한학도의용대를 거쳐 전선에 투입됨으로써 대한학도의용대는 국군의 병력조달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해냈다. 당시 국군은 인민군의 기습남침을 당해 후퇴를 거듭하면서 병력손실이 컸고 병력충원이 급박했으나 정부의 병무행정은 거의 공백상태였다. 현장에서는 각급 부대가 스스로 가두에서 모병하거나 피란민이나 주민의 거소를 뒤져 강제로 소집해 가는 기막힌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병력조달 창구의 하나가 되었으니 이들은 대단한 기여를 한 것이다.

대한학도의용대의 학도의용군은 국군 10개 사단과 예하 부대에 배속돼 전쟁에 참여했다. 낙동강 전선 곳곳에 배치됐고, 다부동, 안동, 기계, 안강, 영천, 포항, 창녕 등 최후의 방어선에서 군번도 계급도 없이 싸우다가 적지 않은 숫자가 전사하고 말았다. 최후의 방어선에는 학도병의 시신도 수없이 쌓여 반격의 발판이 된 것이다.

국방부 정훈국에서 지도하는 의용군과 다르게 내무부의 치안 부문에도 의용군과 같은 학생들이 다수 참여했다. 전국학련 출신 간부들은 7월 17일 '전국학련구국대'를 조직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7월 말부터 주로 학병을 모집해 학도의용군을 편성해 각 전선에 투입했다.

그러나 인민군의 남하속도가 둔화된 8월 중순부터는 후방의 민심수습과 치안확보에 역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9월 4일 대구에서 500여 명의 학생으로 '대한학도경찰대'를 조직했고, 1주일의 훈련을 받고 각지에서 경찰을 도와 치안담당 요원으로 활동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전선이 낙동강에 고착되면서 학도의용군의 활동은 그 이전에 비해 다양하게 전개됐다. 대한학도의용대와 전국학련구국대의 학도의용군 이외에 육군본부 직할 독립1유격대대와 제1, 2정훈대대 등이 활동했다. 해군 묵호경비부의 학도의용대와 같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조직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장사동상륙작전도 학도의용군을 동원해 수행한 것이다.

요동치던 전선과 후방업무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이승만은 1951년 2월 28일 학도의용군의 학교 복귀를 지시했고, 이에 따라 대한학도의용대는 해산했다. 이때 전선에서 군번 없이 학생 신분 그대로 참전하고 있던 학생들은 많은 수가 학교에 복귀했다. 4월 3일에는 학도의용군을 지도하던 국방부 정훈국 예하의 정훈공작대가 해산함에 따라 학도의용군은 공식적으로 활동을 종료했다. 대한한도의용대가 해산할 때까지 2만7700명이 전투에 참여했고 27만여 명이 후방에서 선무공작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부실행정 메운 청년들의 희생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에 있는 학도의용군 자료사진 ⓒ 윤태옥


학도의용군의 참전동기를 애국심이라고 집약해서 말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정치적 맥락에서 남침이란 자극을 받자 행동력이 강하게 발현된 것이다. 한국전쟁 개전 직후에 앞장서서 참전한 이들은 그 이전부터 활동해오던 우익 학생단체 또는 학도호국단과 직접 연결돼 있다.

일제가 패망하자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하여 점령했고, 두 강대국은 자신의 점령지에 자신이 원하는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국가가 건설되도록 끌어갔다. 남한은 남한대로 이승만을 중심으로, 북한은 북한대로 김일성을 중심으로 국가건설을 추진해가면서 강력한 원심력과 구심력이 동시에 작동했다. 남한은 우향우를 반복하면서 우편향으로 경도됐고, 북한은 좌향좌가 극단으로 쏠려가면서 남북한의 학생단체들도 격렬한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좌우-남북으로 갈라졌다.

이승만은 청년단체 학생단체를 자신의 정치활동에 가장 잘 활용한 정치가였다. 정부수립 직후 일민주의와 이북총진군이란 구호를 되뇌이던 문교부 장관 안호상이 학교교육 체제에 학도호국단을 삽입했다. 모든 학생을 국군의 예비전력으로 양성한다는 목적 아래 하나의 조직으로 엮은 것이다.

이를 위해 전국총학생연맹을 포함한 모든 사설 학생단체들을 해산하라고 명령하기까지 했다. 학도호국단은 대통령이 총재를 맡고, 중앙학도호국단 단장과 부단장은 문교부 장차관이었고, 각급 학교의 학도호군단 단장은 총장이나 학장을 맡도록 했다. 이로써 학도호국단은 대한민국 법령으로 공인된 유일한 전국 학생조직이 되었다. 이들의 가장 큰 과업은 군사훈련이었고 매일 시가행진과 도보훈련을 실시했다. 이곳이 훗날 학도의용군의 토대가 된 셈이다.

일제패망 이후 남북분단과 좌우갈등 속에 모든 정치단체 사회단체는 물론 학생단체들도 당시의 정세에 깊숙이 결합돼 돌아갔다. 간부 학생들은 정세의 변화에 민감했고 그에 따른 행동 역시 빠르고 열정적이었다. 개전 초기에 서울을 점령당하는 최악의 전세에서 오히려 강력하게 반발하듯 자발적으로 참전을 선도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의 학생들의 예비전력화 정책과 학생단체 간부들의 정치적 성향과 열정이 맞물려 학도의용군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학도의용군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애국심만 주목할 것은 아니다. 정부가 병력충원 체계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다는 엄연한 과오와 실책도 함께 주목해야 한다.

정부 수립 후 최초의 병역법은 1949년 8월에 공포됐다. 병역법은 국민개병제에 의거하여 남성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가하고 여성은 지원해 입대할 수 있도록 했다. 병사행정을 담당하는 병사구사령부를 서울과 도청 소재지에 두고 국방부의 병무국이 이를 관장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1950년 1월 대한민국 최초의 징병검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은 10만 병력을 초과할 수 없다는 미국의 한반도 지배정책에 구속돼 있는 정부는 당장 더 이상의 징병검사가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이런 이유로 징병검사도 중단하고 예산절약을 위해 각 지구의 병사구사령부도 해체해 버렸다. 정치적 구호로는 북진통일이나 이북총진군을 외치면서 실제 행동은 그에 미치지 못한 채 병무행정을 공백상태로 두게 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대한민국은 북한의 기습남침 전면전을 맞닥뜨렸다. 개전 초 국군은 후퇴를 거듭하는 동안 정부든 군이든 손실된 병력을 충원할 겨를이 없었다. 건군 초기라 소집할 예비역 자원도 없고, 병무행정도 이미 중단된 터라 입영대기 장병도 없었다. 국방부는 호남과 영남에 병사구사령부를 재설치해 병력을 충원하려고 했으나, 인민군이 호남지방으로 빠르게 진공하면서 그나마 영남지역에서만 가능했다.

정부는 1950년 7월 제2국민병(만 17~40세 남성)을 소집하기로 했으나 소집절차도 미비하고 피난민 대열이 휩쓸면서 정상적인 병력충원은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이럴 때 학도의용군이 자진해서 참전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물론 국방부 정훈국이나 내무부 문교부 등에서 학생단체와의 소통이 있기는 했겠지만 모병당국으로서는 그야말로 사막에서 샘물을 만난 셈이었다. 당시 병역법에서는 학생은 징집을 연기를 할 수 있었으나 참전하겠다고 하고, 제2국민병 소집에 해당하지 않는 17세 미만도 나섰으니.

병력충원 상황에서 학도의용군을 조망하면 정부의 부실하기 짝이 없는 병무행정이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학도의용군의 희생적인 참전을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그 이면에 광범위하게 깔려 있는 정부의 실책과 과오를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편찬연구소도 "병력충원 체제를 제대로 정비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무리 학도의용군이나 용감한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찬양하더라도 이러한 행정조치의 불비와 같은 정부의 준비 소홀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다시 전쟁이란 상황이 벌어지면 정부는 대책 없이 허둥대고 젊은이들의 열정과 희생으로 그 구멍을 메우는 건 아닐까. 괜한 노파심이길 바라기는 하지만, 파리 올림픽과 한국 스포츠계를 보면 지금도 그런 게 아닌가 싶고, 앞으로도 또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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