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역.
윤태옥
이 두 개의 전투는 1952년 10월의 일이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앞의 글에 이어서 1951년 중국군의 5월 공세 이후의 한국전쟁이 어떻게 전개됐는가.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넌 이후 1951년 5월까지 다섯 차례의 공세로 유엔군을 북위 37도 선까지 밀어냈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유엔군의 반격 속에 전선은 다시 38도 선에서 멈추는 양상이 됐다.
북한 인민군은 자기 역량을 훌쩍 넘어 부산까지 점령하려다가 역습을 당해 빈사 상태에 몰렸고, 유엔군은 맥아더의 오만과 오판으로 전면적인 철수 직전까지 몰렸지만, 중국군은 자기 역량의 최대치까지만 공격하고는 더 이상의 무리한 공세를 하지 않았다. 영리했다고나 할까. 그 결과 38선 언저리에서 전선이 출렁일 뿐 더 이상의 중대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게 된 것이다.
전선이 38선 일대에 고착된 이후의 전황을 군사편찬연구소의 공간사에서는 '휴전협상과 고지쟁탈전'이라는 말로 축약하고 있다. 한국전쟁 3년 가운데 2년이나 되는 긴 기간이다.
휴전 논의는 전선교착 이전부터 있었다. 1950년 12월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아랍 13개국이 양측에 휴전을 제안했다. 12월 초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애틀리 영국 수상이 만나 유럽의 안보이익을 우선하기 위해 동아시아에서의 전쟁은 확대하지 않고 한국전쟁은 38선에서 종결짓기로 했다. 미국은 내부적으로도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휴전을 고려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중국 역시 신생국가로서 무한정 전쟁에 빠져들 수 없었다.
38선에서 고착된 전황과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비슷하게 맞아가면서 전쟁은 이제 휴전협상 국면으로 넘어갔다. 1951년 7월 유엔군과 중국-인민군은 휴전회담을 시작했다. 회담이 며칠 만에 결렬되자 남측은 북측을 회담장으로 돌아오게 압박하기 위해 다시 격렬한 전투를 재개했다. 1951년 7~12월에 강원도 양구 지구를 중심으로 한, 소위 고지전들이다. 그 첫 번째 전투가 대우산 전투였다. 힘들게나마 고지를 점령했다. 회담을 속개시키기 위해 잠시 휴지기에 들어간 듯한 전투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이다.
대우산 전투에도 북측이 회담장에 나오지 않자, 이번에는 포탄 30만 발을 쏘며 피의 능선 전투(1951년 8월)를 벌였다. 결국 상당한 피해를 입고 입히면서 고지를 점령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마지막 장면이 이 전투다. 펀치볼 전투(8월), 백석산 전투(8~10월), 가칠봉 전투(9~10월), 단장의 능선 전투(10월) 등이 같은 맥락에서 이어졌다. 하루 3만 발까지도 쏘아대는 포탄으로 능선과 고지에는 나무 한 그루 남지 않을 정도로 격렬했다.
그래도 휴전회담은 지지부진했다. 지금은 북의 영역인 어은산 가까운 곳까지 밀고 간 남측은 그해 크리스마스를 지나서까지 격렬한 공중폭격, 지상포격, 육박전을 계속했다. 6개월 정도의 고지전을 치른 결과 남북의 대치 전선은 펀치볼 남측에서 펀치볼 북측까지 올라갔다. 회담이 지지부진한 동안 땅 따먹기가 된 셈이다. 한 뼘의 국토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수사가 내 귀에 익숙하다.
이 기간의 전투에서 6만6000여 명이 전사했다. 대략 한 달에 1만 명씩, 하루에 300 명씩 전사했다. 지지부진한 휴전협상에 전선의 남북에 배치된 수만 명의 목숨을 갈아 넣었다. 남한의, 북한의, 미국의, 중국의, 프랑스와 그 외의 많은 국가에서 온 젊은 장병들을 무기고의 총탄과 다를 바 없이 기계적으로 전선에 밀어 넣은 것이다. 정치란 게 그렇고 전쟁이란 게 그렇다고 하기엔, 가슴이 먹먹하다.
이 기간의 전사자 가운데 유엔군 측이 1만2천이고, 중국군과 인민군이 5만4천이다. 북측이 남측보다 4배 가까이 더 죽었으니 승리한 전쟁일까. 북으로 12~15km 정도 진격했으니 성공인가. 무기와 장비에서 우월한 유엔군은 포탄을 쏴도 서너 배 많은 포탄을 쏘아댔다. 유엔군 측은 미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훨씬 많은 물자를 쏟아부었고, 그보다 경제 사정이 형편없는 중국과 북한은 물자가 부족한 만큼 인명으로 그 갭을 메꾸고 있었다.
1951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전초 진지전 양상이었다. 이때 국군은 전방의 2개 사단을 후방으로 보내 지리산 토벌작전을 펼쳤다. 미공군의 후방 차단작전도 계속됐다. 주로 철도 시설을 공습하여 1952년 3월부터 6월까지 1만 9천 개소의 철도를 파괴한 것으로 보고됐다.
이즈음 휴전협상의 난제는 북한에 비행장을 건설하지 않는다는 유엔군의 요구였다. 재해권·제공권에서 압도적이었던 미군은 휴전 이후에 공군력을 증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북한 지역에 비행장을 건설하지 못한다는 의제를 제기하고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다. 북측에서는 내정간섭이라며 강하게 거부했다. 중립국 감시위원회에 소련을 넣자는 북측의 요구도 걸림돌이었다.
포로교환은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될 것이라는 초기의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협상 후반에 난제 가운데 최악의 난제가 됐다. 한국전쟁의 포로는,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돼 얼른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만인 포로가 아니었다. 유엔군에게 포로가 됐으나 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상당수의 반공포로가 존재했던 것이다.
결국 1952년 10월 8일 유엔군 측이 무기휴회를 선언했다. 이로써 휴전협상은 15개월 만에 결렬됐고 그 이후 6개월 정도 휴회 상태가 이어졌다. 이 시기에 다시 고지전이 격화됐다. 평강 철원 금화 지역을 잇는 소위 철의 삼각지를 통제하기 위한 양측의 대대적인 공세가 벌어졌다. 중국군이 선제공격을 한 것이 백마고지 전투이고, 이를 받아치며 유엔군이 공격한 것이 상감령 전투다.
그러나 한국의 이승만을 제외한 전쟁 당사국들은 모두 조속한 휴전을 원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자국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이 깎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념, 민주, 정의, 자유, 해방 등의 선명한 어휘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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