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사고 우려가 높았던 동덕여대 교내 가파른 비탈길에서 지난 2023년 6월 5일 쓰레기 수거차에 한 학생이 치여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학생들이 김명애 총장과 조원영 이사장 사퇴를 요구하며 학교 본관 점거농성을 벌였다. 당시 학교 설립자 조동식 동상에 학생들의 항의 대자보가 붙어 있는 모습. 최근 남녀공학 전환 반대 시위에서도 해당 동상에 오물이 투척된 모습이 확인됐다.
권우성
일본제국주의가 표방한 교육원칙 중 하나는 내선공학(內鮮共學)이다. 내지인과 조선인이 함께 공부하도록 하겠다는 이 원칙은 1922년 2차 조선교육령에서도 표방됐지만,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제3차 교육령 시행을 앞두고 일종의 전국장학사회의에 참석하고 임지로 돌아간 다케다 평안남도시학관(視學官)은 개정 교육령의 핵심을 지역 언론인에게 브리핑했다. 1937년 12월 2일 자 <조선일보> 4면 좌중간은 브리핑 내용을 이렇게 전했다.
"금후의 교육에 대한 방침은 황국신민으로서의 교육, 내선일체, 인고의 단련 등 세 가지를 주로 한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소학교·중학교·고등녀학교 등은 명년 신학기부터 내선공학으로 하게 되엇스나 급속히는 할 수 업고 순전히 공학을 하기까지에는 학교조합 관계도 잇서 구체화될 때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릴 터이다."
한국인과 일본인뿐 아니라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공부하는 장을 만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다케다 시학관의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일본은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선공학 전환을 추진했다. 내선공학의 전제조건인 내선평등이 요원한 상황에서 내선공학 전환부터 본격화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런데도 서두른 것은 군국주의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까지 도발한 것은 중국을 독식하겠다는 의지 표현이었다. 이는 일본과 서양제국주의 간에 존재했던 협조체제를 금가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미국 및 유럽과 충돌하는 부담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일제는 '당신들도 대일본제국 신민이다'라며 한국인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시작했다. 내선공학 본격화는 이런 흐름에서 추진됐다.
일제의 '내선공학' 정책 찬성한 교육자
내선공학이 교육적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적극 호응한 교육자가 있다. 지난 11일 남녀공학 전환에 반대하는 서울 동덕여대 학생들에 의해 계란 등을 뒤집어쓴 설립자 흉상의 주인공인 조동식이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1938년 2월 25일자 <매일신보> 1면에서 그의 사진과 발언을 접할 수 있다.
1면 전체를 도배한 이 기사는 "반도 2천 3백만 민중의 연래(年來)의 열망이 결실하여 조선통치사상 불멸의 금자탑을 쌓은 조선개정교육령에 대한 찬사·송성(頌聲)은 법령 공포를 앞두고 폭풍과 같이 전선(全鮮)을 휩싸고 있는데"라면서 조동식 동덕여고교장 등의 찬성론을 실었다.
이 글에서 조동식은 "내지인 여학생까지라도 입학 지원자가 있는 경우에는 수용해야만 될 것"이라며 일본인 신입생 유치에 기대감을 표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어 교과목의 존재가 신입생 유치를 방해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내선공학을 우리 학교에서도 시행해야만 될 것인데, 그렇다면 조선어 과목이 문제일까 합니다"라며 "결국 청산과목으로 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대세에 순응하는 것이니까 장래에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한일 공학이 되어 두 민족이 한 교실에서 공부하려면 다른 조건들도 성취돼야 하지만, 무엇보다 교육비 부담 능력이 어느 정도라도 균형을 이뤄야 했다. 두 민족의 경제력 차이가 현격한 상황에서는 내선공학의 현실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전두환 집권기의 저명한 언론인인 고 리영희(1929~2010)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과의 대담록인 <대화>에서 "경성공립공업학교는 이른바 내선공학이라고 해서 한 반에 일본인 30명, 조선인 10명 정도로 입학했지요"라며 "일본 학생들로서는 비교적 쉽지만 조선인 학생으로서는 굉장히 어려웠지"라는 말로 한국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내선공학 제도를 회고했다.
비슷한 인식이 위의 다케다 시학관의 인터뷰에서도 나타나지만, 당시의 공공연한 불만 표명에서도 확인된다. 오긍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장은 1938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1면 좌상단에서 "초등학교에는 공학 실시를 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말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 시기에는 초등학교만 다니는 사람들이 허다했으므로, 초등학교 내선공학에 대한 반대는 내선공학제도 전체에 대한 완곡한 반대의 표현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조선 아동과 내지 아동은 그 가정의 환경과 부모들의 언어·지식 정도가 각기 서로 다른 터이므로 만약 한 학교에서 가티 공부를 하게 된다면 만흔 핸듸캡이 엇게 되야 결국 조선 아동들은 그 성적이 떠러져서 기가 죽게 되고 공부에 염증이 나게 될 우려가 잇다"라고 염려했다.
1938년에 51세가 된 조동식은 위 <매일신보>에서 "내선공학이 실현되는 것은 현하(現下) 조선의 정세로 보아 당연"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경력은 이 발언이 진심이 아니라는 판단을 갖게 할 만하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조동식 편은 "1908년 4월 동원여자의숙을 설립하고 숙장을 맡았다"라고 말한다. 21세 때부터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자로 살았던 그가 내선공학이 현실에 맞지 않음을 몰랐을 리 없다. 친일파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전쟁 협력 위한 여성의 의무를 강조'... 친일 논설까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