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 노리히토의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와다 노리히토는 위 카드에 따르면 일제의 한국 강점 1년 뒤인 1911년 6월 13일 히로시마 남쪽의 큰 섬인 시코쿠의 고치현에서 출생했다. 키는 '5척 2촌 5푼'으로 적혀 있다. 159센티미터를 약간 넘는 키로, 평균적인 한국 남성보다 약간 작은 편이었다.
거주지는 '경기도 경성부 길야정(吉野町) 1정목(丁目)'이다. 지금의 서울 용산구 동자동이 그의 한국 집이었다. 신분은 사족(士族), 직업은 직공으로 적혀 있다. 한국의 선비 가문에 상응하는 무사 집안의 자제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직공이 된 것은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다. 1933년 3월 12일 자 <동아일보>는 그가 "일본 대학 출신"이라고 보도했다.
한국 항일독립운동세력과 연대해 반일 반전운동
직공 직업을 갖게 된 것은 위 신상카드에서 눈에 가장 잘 띄는 부분과 관련이 있다. 카드 정중앙에 "죄명"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글자가 있다. 일제강점기판 국가보안법인 치안유지법이 금지한 '국체 변혁'을 시도하고자 직공으로 위장 취업한 결과로 그렇게 됐다.
당시 한국에는 이런 일본인들이 상당수 있었다. 1933년 3월 23일 자 <동아일보>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일 운동가 중에 한국·일본·러시아 대학 졸업자들이 있다고 한 뒤 "질적으로 매우 우수분자들이 모인 것이라는데, 이 중에는 일본 청년으로 맑쓰주의에 상당한 연구가 잇는 화전(和田)·횡산(橫山)·본전(本田) 등도 석기어 운동에 렬중"했다고 전했다. 와다 노리히토를 '질적으로 매우 우수분자'로 평했다.
1934년 12월 4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도쿄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와다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게 됐다. 재벌 자본가들이 움직이는 일본제국주의와의 투쟁에 나선 그는 노동자의 길을 택한다. 그런 뒤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에 들어가 가두연락책이 된다.
그가 식민지 한국으로 무대를 옮긴 것은 1932년 6월이다. 1934년 4월 1일 자 <조선일보>는 그를 "경성교외궤도회사 직공"으로 표기했다. 현재의 서울 동대문과 광나루 구간을 운영하는 철도회사의 노동자로 취업했던 것이다. 신상카드에 직공으로 표기된 것은 이 때문이다.
위 기사들을 종합하면, 철도회사에 취업한 그는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항일정신을 심어주고자 일본제국주의가 가장 두려워하는 공산주의 이론을 전파했다. 그는 이들을 반제동맹 조직원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태평양연안제국(諸國) 반제국주의 민족대표대회에 한국 대표를 파견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식민지 한국인들의 항일 목소리를 국제적으로 전파하는 일에 동참했다.
와다는 한국 항일독립운동세력과 연대해 반일 반전운동을 벌였다. 그의 반일운동은 자기 나라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일본 민중을 착취하는 제국주의에 대한 거부였다.
그의 운동은 그런 면에서는 일본 민중을 위한 것이지만, 한국을 무대로 한국 항일세력과 연대해 한국인들을 고무시켰다는 점에서는 한국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인 활동가들의 투쟁은 한국 운동가들의 투쟁에 명분과 확신을 심어줬다. 그래서 그의 반전운동은 항일운동의 성격을 함께 띠었다.
독립운동이 지향해야 할 목표 보여준 사람들
와다가 한국에서 활동한 시기는 일본제국주의가 사상 최강의 힘을 갖게 됐을 때였다. 일본제국주의는 1931년 만주사변에서 1937년 중일전쟁을 거쳐 1941년 진주만 공습에 이르는 시기에 절정의 위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그의 투쟁은 당장의 성과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1934년 11월 27일 자 <동아일보>는 그가 1932년 봄부터 한국에서 수행한 반일투쟁을 요약하면서 그 결말을 보도했다.
"이 사건은 소화 7년 봄부터 암암리에 근거를 두고 좌익청년 중 인테리분자로 경성제대 학생을 비롯하여 학교 선생, 문예가 등을 규합하여 반제동맹을 조직하는 동시에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시작하는 외에 약소민족운동의 일부로 동경에 열리게 되는 태평양노조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하야 국제적으로 연락을 하고자 맹렬히 활동을 하다가 동대문서에 탐지된 바 되어 검거된 이래 ······(하략)"
1931년에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6년 뒤 중국 내륙을 침략했다. 그 6년간 일제는 한일 항일세력을 집중적으로 압박했다. 이 시기에 와다 노리히토도 객지에서 붙들렸다. 위 1933년 3월 12일 기사는 와다와 이관술 등을 비롯한 항일투사들이 동대문경찰서에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검찰)으로 호송되는 모습을 "피의자 43명을 금(今, 금월) 11일 오전에 '경737'호와 '715'호 두 자동차로 전후 네 번에 나누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국"했노라고 보도했다.
판결 선고 전에 와다는 전향 의사를 표시했다. 그런데도 징역 3년형이 떨어졌다. 그의 투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대한민국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명단에 없고, 전향 의사를 표시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지만, 한국 독립운동을 돕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3년형을 받은 외국인의 노고를 낮게 평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와다의 전향은 잘못된 일이지만, 이 시기에 일본인 반일운동가들에 대한 일제의 압력은 상당히 심했다. 그래서 전향자들이 대거 속출했다. 원호처(보훈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 제9권: 학생독립운동사>는 "1933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관계자 중에서 전향 또는 탈락자가 속출하였는데, 미결 1천 3백 70명 중 4백 15명, 기결 3백 93명 중 1백 33명의 사상범들이 전향을 하였다"고 설명한다.
전향자들이 꽤 있었지만, 와다 노리히토 같은 일본인들이 일본제국주의가 가장 강성할 때인 1930년대에 한국 독립운동을 응원한 일은 한국 항일투사들이 용기를 얻고 1945년까지 버티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됐다. 이들이 한국에까지 와서 독립운동을 도왔다는 것은 한국 독립운동이 국수주의나 민족이기주의에 머물지 않고 세계사적 보편성을 띠었음을 의미한다.
일본인 반일운동가들은 훗날 한국에서 직장을 구하거나 영구 거주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한국에 온 것은 오로지 항일투쟁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들은 순수한 시각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관찰할 위치에 있었다. 그런 그들이 추구한 해방 한국은 대한제국의 복제판이나 일본과 비슷한 나라가 아니라, 이 땅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공동체였다. 그들은 한국 독립운동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정확히 보여준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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