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조선일보> 20면에 실린 기사 <60년 전 "후손은 팔려오지 않도록 하겠다" 박정희 '눈물의 연설' 獨 장소에 기념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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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광부 임금 담보로 차관? 어불성설
외국에서 돈을 꾸기 힘든 악조건 속에서 파독 노동자들의 임금을 담보로 어렵사리 차관을 빌려 경제개발에 투입했다는 이야기는 신화적이기도 하고 인권침해적이기도 하다. 자국 노동자들의 해외 임금에 마음대로 담보를 설정하는 것이 정당한지 여하를 떠나, 서독이란 나라가 정말로 그런 조건으로 차관을 제공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서독에서 차관을 빌리는 문제는 장면 내각 때 이미 무르익었다. 내각 출범(8.23) 4개월이 좀 안 된 1960년 12월 21일, 예산 심사가 진행 중인 국회를 방문한 장면 총리는 무소속 조국현·이인 의원으로부터 '미국 경제원조가 감소하는 경향이 있는데, 정부 대책은 무엇이냐?'는 질의를 받았다. 다음날 발행된 <동아일보>에 따르면, 장면은 "서독·일본 등의 경제원조를 얻도록 노력함으로써 우리 경제의 미국 의존도를 낮출 생각"이라고 답변했다.
그 시각, 서독 현지에서는 한국 경제사절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태완선 부흥부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경제사절단이 서독 당국과 차관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달 18일 자 <동아일보>는 "서독의 대한(對韓) 경제원조 가능성은 16일 한국사절단이 서독 경제성(省)을 방문하였을 때 검토되었다고 서독의 일(一) 정부 대변인이 말하였다"고 보도했다.
장면의 국회 발언 일주일 뒤에는 낭보가 날아왔다. 27일 귀국한 태완선 단장이 "서독 정부는 한국의 신정부가 경제재건에 노력하는 데 대해 대단히 협조적이고 동정적이었다"라며 "(차관 성사가) 거의 확실하게 되었다"고 발언한 일이 28일 자 <조선일보>에 실렸다.
이 기사는 "서독 정부는 미국의 저개발국가를 위한 원조 부담에 참여하여 앞으로 10억 불에 해당하는 무상원조를 구상하고 있으며 한국도 이 원조 대상에 들어 있으나 그 원조 규모 및 그 시기와 원조 기구에 대해서는 아직도 아무런 윤곽이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는 태완선의 말을 덧붙였다.
이런 흐름이 이어지다가 1년 뒤 차관협정이 체결됐다. 이듬해 12월 15일 자 <동아일보>는 "한국과 서독은 지난 11일에 시작된 마지막 실무자급 회담이 끝난 13일 하오 마침내 차관협정에 도달하였다"라며 "1962회계연도에 한국이 서독의 정부 및 상업차관으로서 1억 5천만 마르크(미화 3750만 불)를 받게 될 차관협정에 조인하였다"라고 보도했다.
1960년 12월에 차관협정이 "거의 확실"하게 됐고, 1961년 12월에 차관협정이 성사됐다. 따라서 이 차관협정을 성사시킨 주역은 1961년 5월 16일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라기보다는 1960년 12월 당시의 정권인 장면 내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철우 도지사가 박정희 방독 60주년 행사를 진행한 뒤스부르크 행사장에서 상영된 동영상은 이런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이 영상에선 1964년 12월 박정희가 서독을 방문한 일을 언급하면서 "1964년의 서독 방문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 지도자들과 차관 협정을 맺은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습니다"라는 내레이션을 내보낸다.
박정희의 서독 방문 8개월 전에 나온 그해 4월 9일 자 <경향신문>의 기사 제목은 '서독 차관 또 얻게'다. "또"가 들어간 이 기사는 "우리나라는 지난 61년에 서독으로부터 제1차로 1억 5천만 마르크(재정차관과 상업차관이 각 7천 5백만 마르크)의 차관을 획득한 바 있으며, 이번이 2차에 해당한다"고 보도했다. 위 경북도청 동영상은 사실상 장면 내각의 작품인 1961년 제1차 차관협정 대신 1964년 제2차 차관협정을 거론하면서 "역사적인 순간"으로 평했다.
장면 내각 때 보도된 위 1960년 12월 28일 자 <조선일보> 기사에도 언급됐듯이, 서독 정부는 한국에 대한 무상원조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 서독이 간호사와 광부의 임금을 담보로 묶어놓고 차관을 줬다는 이야기는 어불성설이다.
서독이 제1차 차관협정을 맺은 것은 1961년이다. 인터넷 백과사전 등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광부 파독이 구체화된 것은 1963년이고, 정부에 의한 간호사 파독이 성사된 것은 1966년이다. 한국 정부가 차관을 갚지 못할 경우에 간호사·광부의 월급을 압류한다는 조건이 있었다면, 1963년 이전에 제1차 차관협정이 체결된 사실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서독 정부가 담보도 잡아두지 않고 돈부터 꿔줬다는 이야기가 된다.
'월급 담보설'의 진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