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왼쪽)와 추경호 원내대표가 지난 26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45주기 추모식에 참석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10월 26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추도식 때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이 화제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황교안 전 총리, 오세훈 서울시장, 김문수 고용노동부장관 등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박정희 딸인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은 내빈 소개 때 한동훈 대표의 이름을 빠트렸다. 그런 뒤, 실수였다는 입장을 한 대표 측에 전했다.
박정희는 전두환·노태우처럼 사법부의 단죄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탄핵, 금고 이상의 유죄 확정, 해외 도피, 국적 상실의 경우에 전직 대통령 예우를 원칙상 배제하는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 제7조 제1항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박정희는 사법부의 단죄보다 훨씬 더한 것을 받았다. 또 그의 독재는 대한민국 법률에 의해 단죄되고 있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10·26 사태는 열흘 전에 부산과 마산에서 시작된 부마항쟁(부마민주항쟁)의 결과물이다. 박정희 독재에 맞선 이 항쟁은 이에 대한 대응 방식을 놓고 박 정권이 분열하도록 만들고 뒤이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권총을 겨누는 결과로 연결됐다.
10.26과 부마항쟁
대한민국 법률은 박정희를 규탄하고 죽음으로 몰고간 부마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한다.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부마항쟁보상법) 제2조 제1항은 "부마민주항쟁이란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를 전후하여 부산·마산 및 창원 등 경남 일원에서 유신체제에 대항하여 발생한 민주화운동"이라고 규정했다.
우리 헌법 전문은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라고 선언했다. 대한민국 법률이 부마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다는 것은 부마항쟁이 이 같은 헌법 전문의 민주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의거였음이 우리 법률체계에서 인정됨을 의미한다.
부마항쟁보상법이 배상이 아닌 보상이란 표현을 썼다고 해서 박정희 독재가 불법행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법 제19조 제2항은 "이 법에 따른 보상은 배상으로 본다"고 규정했다. 불법인지 아닌지 모호한 보상이란 용어를 법률 제목에 쓰면서도, 법률 본문에서는 보상을 배상으로 간주한다는 규정을 둔 것이다. 박정희 독재가 부득이한 일이 아니라 불법·위법이었음을 명확히 밝히는 입법 조치라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법률은 부마항쟁뿐 아니라 그 이전의 박정희 반대투쟁 역시 동일하게 평가한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민주화보상법) 제2조 제1항은 이 법에서 말하는 민주화운동을 이렇게 정의한다.
"민주화운동이란 1964년 3월 24일 이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헌법이 지향하는 이념 및 가치의 실현과 민주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을 말한다."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1963.12.17)하고 3개월 뒤에 일어난 한일회담(한일협정) 반대 시위 이후의 반독재 투쟁이 이 법에서 말하는 민주화운동이다. 박정희의 대일 굴욕외교, 1969년 3선 개헌, 1972년 이후의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운동 등을 이 법에 의한 명예회복 및 보상의 대상이 되는 민주화운동의 범주에 넣은 것이다. 위 조문은 박정희에 대한 저항을 헌법 이념과 민주질서를 확립하는 일로 평가했다.
국민들이 박정희의 대한민국 지배에 거듭거듭 저항하고 국민들의 그런 의지가 민주화보상법과 부마항쟁보상법으로 구현돼 있으니, 정부 관계자와 집권당 지도부가 박정희 추도식에 가지 않는 게 마땅하다. 정부·여당의 박정희 추모는 민주이념을 추구하는 헌법 규정뿐 아니라 박정희에 대한 투쟁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한 위 법률들에도 저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