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인 1914년의 불국사의 모습.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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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한국에서는 스님들이 대체로 독신 수행자로 인식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중반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이 시절에는 사찰 마당에서 스님의 부인이 빨래를 너는 장면도 간혹 볼 수 있었다.
1991년에 <한국학연구> 제3집에 실린 정광호 인하대 교수의 논문 '한국 근대불교의 대처식육(帶妻食肉)'은 승려의 혼인과 육류 섭취에 관한 이 주제를 설명하다가,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승려가 "연전에 어떤 사원에 갔다가 노전(爐殿) 뜰에 유아의 강보와 부녀의 곤당(褌襠)이 널려 있는 것을 보고 마음에 대(大)불평을 일으켰더니"라고 회고한 일을 소개한다. 사찰 관리인 숙소 앞에 아이의 강보와 여성의 내의가 널려 있는 장면을 보고 마음이 불편해졌다는 회고담이다.
위 논문은 "총독부에서는 1926년 10월, 사법(寺法) 중 '주지 자격규정'에 관한 항목에서 '비구계를 구족(具足)해야 한다'는 조항을 삭제할 것을 종용함으로써 1929년까지는 대부분의 사찰이 이 조항을 삭제해버리기에 이르렀다"고 한 뒤 "1927·8년대로부터 대처(帶妻) 문제는 외형상 일단 합법적인 것으로 변질"됐다고 기술한다. 비구승이 아닌 대처승도 주지가 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한 총독부의 조치가 대처승의 지위를 불교계 내에서 사실상 합법화시켰다는 설명이다.
승려가 배우자를 두는 일은 어느 시대나 논란이 됐지만, 20세기 초중반 한국 불교의 대처 풍속은 일본과의 관련성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1872년에 승려의 결혼이 허용된 일본불교가 그 뒤 한국에 진출하고, 한국 강점 16년 만인 1926년에 총독부가 위의 조치를 내놓은 것 등이 대처승들의 입지를 크게 강화시켰다.
이런 상황이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수선사학회가 2015년에 발행한 <사림> 제53호에 실린 역사학자 김진흠의 논문은 1952년 11월경에 "대처승 측은 7000여 명의 승려들이 1300여 사찰을 장악하고 있었고, 비구승 측은 300~500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교단의 재산이었던 각 도의 여객회사와 목포의 대광유지회사, 부평의 베어링공장, 대전과 대구 시내의 백화점과 극장, 전북의 도정공장, 기타 기업체 등을 모두 대처승들이 점유하고 있었다"고 한 뒤 "대처승이 절대적인 기득권을 가진 반면, 비구승들은 수도할 사찰도 제대로 없는 형편이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일본불교와 총독부가 대처승의 영향력 확대를 도운 것은 사실이지만, 승려의 결혼 문제가 반드시 친일이나 왜색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2014년 <대각사상> 제22집에 실린 제점숙 동서대 교수의 논문 '식민지 조선과 불교 – 근대기 대처승 문제를 둘러싼 한·일 불교계의 동향'은 민족주의자인 만해 한용운이 승려의 결혼에 대해 가장 적극적이고 선구적이었다면서, 그가 1910년 5월에 결혼 허용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대한제국 정부에 제출하고 대한제국 멸망 다음달인 그해 9월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에게 동일한 건의서를 제출한 일을 소개한다.
1913년에 발행된 <조선불교 유신론>애서 한용운은 성욕과 식욕은 인간의 당연한 욕구라면서, 승려의 결혼을 금하는 것은 혼인 때문에 수행을 그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일 뿐 불교의 본질과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그는 결혼제도가 없었다면 석가모니나 수많은 보살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겠느냐는 물음을 제기했다.
7차례의 '대통령 유시' 형태로 불교계 압박
이 같은 승려의 혼인 문제는 1950년대 중반에 또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2014년에 <대각사상> 제22집에 수록된 이재헌 금강삼종대학 교수의 논문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와 불교정화운동의 전개'는 2006년에 '종단사 간행위원회'가 펴낸 <태고종사> 등을 근거로 이승만이 총 7차례의 대통령 유시(諭示)를 통해 대처승들에게 제동을 건 일을 설명한다.
그 시작은 4월 초파일 열흘 뒤이자 제3대 총선일인 1954년 5월 20일에 이승만이 제1차 불교정화 유시를 발표한 일이다. 11월 29일에 이승만의 3선 개헌이 강행된 그해 중반부터 불교계에 대한 압박이 대통령 유시라는 형태로 본격화됐던 것이다. 대처승들이 불교계를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에 대한 압박은 불교계에 대한 압박의 의미를 갖게 됐다.
백성을 가르친다는 의미가 담긴 유시 형식의 담화에서 이승만은 일본 불교에 관해 "도시와 촌락이 섞여 있어 중들이 가정을 얻어 속인들과 같이 살며 불도를 행해서 온 것"이라고 지적한 뒤 이런 일본 풍습을 따르는 한국 승려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고 경고했다.
그는 "일인(日人) 중의 생활을 모범해서 우리나라 불도에 위반되게 행한 자는 이후부터는 친일자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으니 가정 가지고 사는 중들은 다 사찰에서 나가서 살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대처승은 친일파로 간주될 것이니 절을 떠나라고 경고한 것이다.
이런 유시가 이듬해 연말인 1955년 12월 8일까지 7차에 걸쳐 발포됐다. 사사오입 개헌을 즈음한 시점은 3차례나 집중적으로 발포됐다. 1954년 11월 4일에 제2차, 그달 19일에 제3차 유시가 발표되고 12월 16일에 제4차 유시가 발포됐다.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국가 지도자가 한 번도 아니고 일곱 차례나, 그것도 불과 1년 7개월 사이에 불교계를 겨냥한 담화를 연달아 내놓았다. 전쟁으로 인해 이승만의 권력이 비대해지지 않았다면, 주요 종교를 이렇게까지 압박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대처승들은 일제강점기 중반 이후로 불교계 주류 세력이었다. 이들 중에는 일제에 협력하는 승려들이 많았다. 이승만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대처승 전체를 친일파로 규정하고 친일청산을 명분으로 불교계 내부의 세력 판도를 인위적으로 바꾸고자 했다. 당시 사람들의 화두였던 친일청산을 불교계 개입의 명분으로 활용했다.
그런데 1948년 정부수립 이후로 친일청산을 가장 강력하게 저지한 인물은 다름 아닌 이승만이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친일파 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과 제휴하고 친일파 군인 및 경찰을 중용했다. 1949년에는 국회 반민특위를 공격해 친일청산의 동력을 무너트리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1954년에 친일청산을 무기로 불교계 권력 교체에 인위적으로 개입했다. 친일청산을 훼방하던 이승만이 친일청산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니, 실제 동기는 다른 데 있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친일청산 명분으로 불교계 권력 교체 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