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을 표현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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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조합이 그 같이 '불순한' 단체였다는 점은 일제 경찰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2021년에 <탐라문화> 제67호에 실린 신소연의 '제주 조천 지역의 근대 민족운동 형태의 변화 과정'은 제주 4·3항쟁에 참여한 김평원에 관한 대목에서 "일제강점기 조천(신좌)소비조합 운동에 안세훈과 함께 활동하였다"라며 "이 때문에 일제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고 설명한다. 독립운동 마인드를 가진 인물들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 소비조합 활동을 하는 사례는 이 외에도 많이 발견된다.
노순열 역시 그런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 이 점은 그가 1919년 3월 10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이 당시는 법원 소속)의 신문을 받은 데서도 나타난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 근대사료 DB>에 저장된 이
신문조서에 따르면, 그는 "이름·연령·신분·직업·주소·본적 및 출생지는 어떻게 되나?"라는 일본인 검사의 질문에 답하면서 "신분과 직업은 여자고등보통학교 생도입니다"라고 말했다. 중등학교인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재학 중에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 전에 그는 박희도 목사가 운영하는 비밀 서클에 참여했다. 그 박희도가 민족대표 33인이 되어 3·1운동에 참여했다. 검사는 "그쪽은 예수교 신자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렇습니다"라는 답이 나오자 "3월 1일에 박희도로부터 조선 독립의 일을 들은 일이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노순열은 "없습니다"라고 부인했다.
이 같은 검찰 신문조서가 남아 있는 데서도 확인되듯이 그는 3·1운동 당시 거리로 뛰어나가 "대한독립 만세!", "일본 나가라!" 등을 외치다가 체포된 인물이다. 그런 그가 그 후 교사가 되고 얼마 뒤 원주에서 소비조합운동을 벌였다. 그 시절 소비조합운동이 항일운동의 성격을 띠었다는 점은 그의 3·1운동 경력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원주 생활을 한 것은 1925년 3월에 결혼한 이후였다. 당시로서는 늦게 결혼한 편인 그는 시댁 동네인 이곳에서 대중운동을 열심히 벌였다. 그가 원주에서 소비조합 결성에 참여한 것은 결혼 7년 차인 1931년이다. 그의 이 지역 대중운동은 그 전부터 있었다.
결혼 3년차 때 발행된 1927년 8월 30일자 <조선일보> 4면 좌하단은 원주노동회가 주최하는 그달 22일 강연회에서 노순열이 '노동 농민의 단결'이라는 강의를 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의 1928년 12월 16일자 4면 중하단은 원주에서 열리는 여성 야학에 노순열을 비롯한 교사 6인이 참여한다고 보도했다. 원주에 시집간 새댁이 노동·교육·소비조합 등의 분야에서 맹렬한 활동을 펼쳤던 것이다.
2021년에 나온 김이경의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일제하 한국 협동조합운동의 형성과 전개'는 "1919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설립된 협동조합은 최소 500여 개"라고 설명한다. 금융조합 등을 내세워 식민지 한국을 자신들 중심으로 통합하고자 했던 일제의 의도를 무시하는 움직임이 꽤 많았던 것이다.
그 모든 단체가 다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과 관련됐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먹고 입고 쓰는 것을 일제로부터 독립시키겠다는 마인드를 가진 운동가들이 소비조합을 비롯한 협동조합운동에 대거 참여했다. 이들은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 독자적인 생활공동체 건설을 추진하면서 한국인의 일상을 일제와 떼어놓는 활동을 끊임없이 전개했다. 이는 일제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대중 속으로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의 내면에 남아 있는 항일정신 혹은 반일정신과 무관하다고 보기 힘들다.
노순열은 국가보훈부가 지정하는 독립유공자는 아니다. 하지만 소비조합운동이라는 대중 밀착형 항일운동을 통해 한국인의 일상을 일제로부터 떼어내는 일에 참여했다. 이런 독립운동가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들을 제대로 조명하는 것은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을 새로운 차원으로 안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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