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석혜환
국사편찬위원회
일본의 핍박과 탄압이 그처럼 극심했던 남한산성에서 석혜환(石惠煥)이라는 항일운동가가 등장했다. 이 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그의 신상 정보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한국 근대사료 DB'의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코너에서 확인된다.
여기서 그의 이름을 클릭하면, 47세 때인 1937년에 대전형무소에서 촬영한 사진과 함께 그가 1890년 10월 22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서 출생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남한산성 마을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일제는 1890년 생으로 파악했지만, 1889년 생이라고 표시된 논문도 있다.
위 감시 카드는 그의 키가 158.5센티미터라고 알려준다. 이 키는 14~19세기에 출생한 한국 남성의 평균치다. 이 600년간 한반도의 농업생산성에 커다란 변동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감시 카드는 그의 신분이 상민(常民)이며 직업은 무직이었다고 알려준다. 일제는 식민지 한국에서 공식적으로는 신분제도를 운영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1910년과 1929년에 양반이나 유생인지 아닌지를 조사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석혜환은 평민이다.
해외 망명지나 대도시 객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경우에는 집안 배경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지만, 석혜환처럼 출신지에서 활동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더 중요했다. 감시 카드에 적시된 상민 신분만으로는 그가 고향에서 독립운동 지도자가 된 비결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향토서울> 제80호에 실린 조규태 한성대 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경기도 광주 출신 석혜환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인용된 족보인 <충주 석씨 병사공파보>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무과 급제자이고 조·증조·고조부는 종2품에서 종1품의 고위 품계 보유자였다.
한편, 이 논문에 따르면 박광운 광주향토문화연구소장은 "석씨 집안은 광주 지역에서 대표적인 향리 집안"이었다고 진술했고, 충주 석씨인 석경징 전 서울대 교수는 "조선시대 말기에 석씨 집안이 납속으로 관계(官階)와 산직(散職)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 집안이 대표적인 아전 가문이었고, 특정 직무가 없는 관직이나 품계를 사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고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전통적인 양반 가문은 아니었다는 진술이다. 일제가 석혜환을 '상민'으로 파악한 것은, 두 학자의 진술에 무게를 실어준다. 그가 출신지에서 독립운동지도자로 부각된 데는 개인적 신념과 역량에 더해, 아전 가문의 영향력과 경제력 등이 작용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기득권층 아들로 태어나 약자와 민족 위해 인생 바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