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 김기창 화백. 사진은 툇마루에 앉아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는 김기창 화백. 1984.5.22
연합뉴스
열세 살 때부터 친일화가 김은호 문하에서 공부한 김기창은 서울(경성) 승동보통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31년에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입선했다.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이 공모전에서 그는 거듭거듭 상을 받았다. 1937년 제17회 선전부터 1940년 제20회 선전까지는 4연속으로 특선에 뽑혔다. 이에 따라, 4연속 특선자에게 주어지는 '선전 추천작가'의 타이틀을 갖게 됐다. 일제가 한국인 화가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였다.
이 시기는 일제가 매우 예민할 때였다. 1931년 만주사변을 통해 중국 독점의 의지를 노출한 일본은 이로 인해 미국·영국 등과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태에서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켜 미국 등 서방세계를 더욱 자극했다.
일본은 그런 정세 속에서 한국 민중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움직임에 시동을 걸고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을 압박해 친일파로 전향시켰다. 이 같은 시기에 한 번도 아니고 네 번 연속으로 총독부 공모전의 특선으로 선정됐다는 것은 예술적 능력이 출중했다는 의미도 되지만 일제의 분위기나 심기를 잘 살폈다는 의미도 된다.
이것이 합리적 해석이라는 점은 그의 행보가 증명한다. 선전 추천작가로 선정된 그 시기부터 그의 반민족 미술이 본격화된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기창 편은 "27세에 선전 추천작가의 반열에 오르는 데 성공한 후 스승 김은호가 그랬듯이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고 총독부 전시체제와 문예정책에 반복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다"라고 설명한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2권 김기창은 그의 일제강점기 활동을 이렇게 요약한다.
"1943년 <매일신보>에 징병제 실시 기념 시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를 게재하고, 잡지 <춘추>에 해군지원병제도를 선전하는 표지화를 그리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지원병제·징병제 실시를 선전하고, 1944년 전시총동원체제를 독려하기 위해 개최된 경성일보사 주최의 결전미술전람회에 작품 <적진 육박>을 출품하여 조선군 보도부장상을 받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 선전함. 아울러, 1942~1944년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기관지 <국민총력>, 잡지 <춘추>와 <회심> 등에 태평양전쟁 기념 삽화와 근로보국을 선전하는 표지화를 그려 일제의 식민통치정책을 적극 선전함."
예술가의 자존심이나 양심이 있다면 일제 패망을 계기로 붓을 내려놓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김기창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모독했던 한민족을 위한 작품 활동을 해방 이후에 맹렬히 펼쳤다. <친일인명사전>은 "해방 후 세종대왕·을지문덕·조헌·신숭겸 등의 수많은 역사인물의 초상화를 도맡아 제작했다"라고 말한다.
일제가 가장 싫어하는 문자가 세종대왕의 한글이고, 일제가 가장 싫어하는 캐릭터가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이나 임진왜란 의병장 조헌처럼 한민족을 지키기 위해 무장투쟁을 벌인 인물들이다. 일제 침략전쟁을 옹호했던 화가가 이런 인물들의 초상화를 일제 패망 뒤에 쏟아냈던 것이다. "특히 이 중에서 1973년 자신의 얼굴에 기초해 제작한 세종대왕 영정은 2008년 현재 한국은행 만원권 화폐의 주된 도상으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라고 <친일인명사전>은 지적한다.
일제가 싫어한 한국 종교는 대종교 등과 더불어 기독교다. 유학자인 독립운동가 박은식이 볼 때도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혐오는 대단했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일본인들은 이들을 배일파로 지목하고 은연중에 하나의 적으로 생각하였다"고 설명한다.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핍박이 심했다는 점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에 기독교 대표가 16인이나 된다는 점,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친일로 전향한 목사들이 부지기수라는 점에서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김기창은 한국 기독교를 탄압하는 일본제국주의를 거들었다. 그랬던 그가 일제 패망 직후인 한국전쟁 시기부터 <예수의 생애> 시리즈를 그림 30점에 담아냈다. 이 시리즈에서 그는 한복 입은 예수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지난 2월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서 <예수의 생애> 판화 전시회를 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2020년 12월에 <신학과 학문>에 실린 심영옥 경희대 교수의 논문 '운보 김기창의 <예수의 생애> 작품을 통한 기독교 토착화 담론'은 1977년에 나온 김기창 회고록인 <나의 사랑과 예술>을 인용해 "예수의 고난이 우리 민족의 비극과 유사하다고 생각하여 한국적 성화의 필요성을 느꼈다"라는 김기창의 말을 전한다.
친일에 대해 사죄한 김기창,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