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바이를 타고 서울 거리를 지나는 엘머 케이블 선교사(오른쪽)
미국연합감리교회
엘머 케이블은 달랐다. 그는 이토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제의 한국 침략을 못 본 척 하지도 않았다.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위 검색서비스는 한국에 대한 그의 태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케이블은 한국의 일제에 의한 국권 상실에 비분하였고, 한국인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한국인의 교육을 통한 실력 배양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1908년 3월 공주지방감리사로 재직할 때에는 친일 감독인 해리스(M.C. Harris)에게 항의한 적도 있고,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총살당하는 현장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한국인 생존자의 증언을 기록하여 선교회 보고서에 첨부하기도 했다."
2008년에 <동서인문학(구 인문학연구)> 제41집에 실린 전재홍의 논문 '을사늑약 전후 시기의 재한 선교사들의 대응과 역할'은 "1908년 공주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케이블은 그의 연례 보고서에서 '박해'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일제의 학살을 보고했다"라며 그가 보고서에 이런 내용을 담았다고 알려준다.
"지난 가을 난리가 일어났을 때 목천에 있는 우리 신자들은 심한 고난을 받았다. 안내 병천에 있는 우리 교회가 일본군에 의해 전소되었고, 이곳에서 몇 리 밖에 있는 사자골에서는 3명의 신자가 일본군에게 붙잡혀 총살형을 당했다. 명령에 의하여 일본 병사들은 불행한 희생자들의 가슴을 겨냥하였다. 총성이 멎고 나서 병사들은 앞으로 나아가서 시체들을 총검으로 찔렀다."
케이블은 "비슷하고 아주 놀라운 일이 문위에서도 있었다"라며 일본군이 의병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부역 혐의를 씌워 총살시켰다고 보고했다.
"이곳에서는 총을 들이대고 강요하는 반란자·의병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는 죄목으로 14명이 일본군에게 잡혀서 총살형을 당했다. 그들 가운데 한 신실한 신자가 있었는데, 그의 결백하다는 간청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사람들과 같이 나무에 묶여서 총살형을 당했다."
케이블이 일제의 만행을 보고서에 담은 것은 감리교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위 논문은 "그러나 이 보고는 회의록에 부록으로 수록되었을 뿐, 친일적인 감독 해리스가 주재하는 회의에서는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다른 선교사들과는 확연히 달랐던 삶
한국전쟁을 계기로 기독교 교세가 크게 늘어났듯이, 유라시아 차원의 정치적 변화를 초래한 1904년 러일전쟁을 전후해서도 그런 현상이 있었다. 이는 선교사들이 그 직후의 을사늑약 때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한 가지 요인이 됐다. 교세 확장의 호시기에 일제 당국과 충돌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던 것이다.
케이블도 그 시기가 교세 확장의 호기임을 알고 있었다. 이정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의 저서 <3·1운동의 얼: 유관순>에도 케이블의 그런 인식이 언급됐다. 이 책은 "노블 감리사는 1904년 선교회의 제20차 연회 보고서에 지난해 늘어난 신자 수 3000명은 전체 신자의 42%이며, 이 중 약 90%가 러일전쟁 이후에 늘어났다고 기록했다"라며 이 시기에 케이블 선교사가 "우리는 지금, 우리 앞에 열려 있는 훌륭한 기회와 성공에 당황하고 있다"고 발언한 사실을 소개한다.
교세 확장의 필요성을 절감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을 외면했다. 반면, 케이블은 그런 필요성을 알면서도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미국인이 아니었다면 서대문형무소를 자주 들락거렸을 것이다.
케이블은 협성신학교 교수·교감·교장과 연희전문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면서 일제강점기를 보냈다. 그러다가 조선총독부가 서양 선교사들을 추방한 1940년에 한국을 떠나게 됐다.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긴 한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에 희망을 걸고 미국에 구조를 요청했다. 미국 정부와 미국인 선교사 대부분은 이때 고개를 돌렸다. 이런 속에서 호머 헐버트와 마찬가지로 엘머 케이블은 제1조를 개인 차원에서라도 이행하고자 했던 몇 안 되는 미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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