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성직자 탐정

[불멸의 탐정들 5] 브라운 신부

등록 2007.09.21 10:35수정 2007.09.2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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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브라운 신부의 동심>

<브라운 신부의 동심> ⓒ 동서문화사

범죄사건을 수사하는 성직자라고 하면 브라운 신부 말고도 다른 인물들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윌리엄, <캐드펠 시리즈>의 주인공 캐드펠이 그들이다.

이들 세 명은 모두 영국인이고,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다닌다. 그리고 뛰어난 통찰력으로 사건의 전모를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장미의 이름>과 <캐드펠 시리즈>는 모두 중세를 배경으로 한다. 브라운 신부가 등장하는 시리즈는 모두 20세기 초반이 무대다.

브라운 신부는 윌리엄, 캐드펠에 비해서 좀 더 인간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인물이다. 브라운 신부는 아마추어 탐정이자 성직자이고 철학자면서 사색가인 사람이다.

이렇게 독특한 탐정을 만든 작가는 영국의 체스터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체스터튼과 브라운 신부는 추리소설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 유명한 앨러리 퀸은 '가장 뛰어난 탐정 3인'의 명단에 브라운 신부를 포함시킬 정도였다. 존 딕슨 카아는 자신이 만든 탐정 기드온 펠 박사를 체스터튼과 유사한 인물로 설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에드먼드 벤틀리는 <트렌트 최후의 사건>에서 이 작품을 체스터튼에게 바친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외에도 체스터튼과 브라운 신부에게 보내졌던 찬사는 많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다. 브라운 신부는 구체적으로 어떤 점 때문에 그렇게 뛰어난 탐정이 되었을까?


범죄사건을 수사하는 성직자, 브라운 신부

브라운 신부가 등장하는 작품은 약 50편이다. 모두 단편이다. 단편소설이기 때문인지 브라운 신부에 대한 자세한 프로필은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보통 키에 통통한 체격의 인물이고 안경을 쓴 채로 항상 우산을 들고 다닌다. 탁월한 직관으로 수많은 사건을 해결하지만, 그의 외모는 왠지 '어리버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장 지적인 순간에는 늘 백치 같은 표정을 짓는다. 교황 레오 13세를 우상으로 받드는 인물이기도 하다.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서 '에식스에서 자라난 영국 시골뜨기'라고 표현한다. 영국에서 살고있지만 예전에는 남미와 멕시코 등에서도 활동했던 인물이다. 시카고 형무소의 주재신부로 근무한 경력도 있다. 그래서 브라운 신부가 등장하는 작품의 무대는 영국의 변두리부터 시작해서 남미와 멕시코까지 종횡무진한다.

브라운 신부가 해결하는 사건의 형태도 가지가지다. 살인사건부터 시작해서 실종사건, 도난사건까지, 멕시코에서는 남녀의 스캔들에 연루되기도 한다. 그 스캔들에서는 브라운 신부가 '남녀의 불륜을 도와주었다'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브라운 신부는 그야말로 수십 년 동안 세계를 누비면서 온갖 사건에 접했던 인물이다.

이렇게 많은 사건들을 해결했기 때문에, 그동안 만났던 범죄자들도 부지기수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플랑보'이다. 그는 한때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범죄자였다. 아르센 뤼팽에 버금갈만한 인물이기도 했다. 플랑보는 강도, 사기, 절도 등의 범죄로 유명한 사람이자, 전성기 때는 독일황제만큼 유명했던 인물이다.

브라운 신부의 초기 작품들에서 브라운 신부와 플랑보는 서로 쫓고 쫓기는 사이로 등장한다. 브라운 신부는 플랑보가 노리는 푸른 십자가를 지키기 위해서 형사를 유인하고, 값을 매기기 힘든 은식기들을 가로채려는 플랑보를 현장에서 검거한다. 그때마다 브라운 신부는 플랑보에게 관대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결국 플랑보는 범죄에서 손을 씻고 브라운 신부의 친구로 변하게 된다.

범죄자에게 너그러웠던 브라운 신부

a  <브라운 신부의 지혜>

<브라운 신부의 지혜> ⓒ 동서문화사

플랑보를 변화시키는 브라운 신부의 모습은, 다른 탐정들과 브라운 신부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다. 브라운 신부는 어떤 상황에서도 범인에 대한 강한 처벌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신께서는 오늘 저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낚시꾼이 되도록 하셨습니다'라는 말을 한다. 범인이 세상 끝까지 방황하도록 풀어주지만, 언제든지 잡아당길 수 있도록 낚싯줄에 묶어둔 것과 같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변신한 플랑보의 모습은 브라운 신부만큼이나 흥미롭다. 그는 탐정 사무소를 개설해서 활동하다가 스페인 여자와 결혼해서 스페인에 안착한다.

브라운 신부는 어떤 경우에도 플랑보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 브라운 신부는 플랑보에게 '자네는 세상에서 유일한 나의 친구일세'라는 말을 할 정도가 된다.

브라운 신부가 범죄자를 대하는 이런 태도는, 인간에 대한 브라운 신부의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크지 않은 체격에 별볼일없는 외모를 가진 브라운 신부이지만, 범인을 앞에 두고는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브라운 신부가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통찰은 또한 브라운 신부가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다른 탐정들과는 다른 브라운 신부의 추리방법은 어떤 것일까?

셜록 홈스는 돋보기를 들고 바닥을 기어다니면서 물적 증거를 수집했다. 파일로 반스는 사건현장을 분석해서 범인의 기질과 심리적 특징을 간파한다. 앨러리 퀸은 소거법을 사용했다. 브라운 신부의 추리법은 이런 것들과는 차이가 많다. <브라운 신부의 비밀>에서 한 미국인은 브라운 신부를 격찬하면서 추리방법을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대한 브라운 신부의 대답은 뜬금없이 엉뚱한 것이었다.

"그건, 모든 사람을 죽인 것이 바로 저이기 때문이지요."

브라운 신부는 이런 대답으로 모인 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든다. 이 대답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심리학적으로 범죄를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브라운 신부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브라운 신부는 자신의 자아가 살인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물리적으로 누군가를 죽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범죄자의 심연을 들여다본 브라운 신부

그보다는 좀 더 살인자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을 뜻한다. 브라운 신부는 절대 인간의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살인자의 내면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이것은 그냥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살인자의 내부에서 그의 팔과 다리를 움직인다. 살인자의 사고로 생각하고 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기다리고 노력한다. 맑은 눈동자에 붉은 핏발이 서고, 직선 도로가 피 웅덩이로 변할 때까지.

이런 방법은 어찌 보면,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하려는 현대의 프로파일링 기법과 비슷하다. 그 효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라운 신부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믿었을까. 오히려 그는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 자신이 마음먹는 만큼 악해질 수 있다. 도덕적 의지를 조절할 수는 있지만, 타고난 천성이나 행동양식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브라운 신부는 자신을 가리켜서 '사람을 낚는 낚시꾼'이라고 표현했을지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범죄자에게 등을 돌릴 때, 그들을 절망에서 건져줄 누군가가 필요할 테니까. 스스로 자신을 변호할 능력조차 없는 사람들이지만, 누군가는 그들을 용서해 주어야 할 테니까. 브라운 신부는 결국 이 과정을 위해서 살인자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사라딘 공작의 죄악>에서 브라운 신부는 플랑보와 함께 보트를 타고 노퍽의 강을 따라서 내려가는 여행을 한다. 한가하게 마을의 모습을 감상하고 밤이면 벌판에서 잠을 자는 평화로운 한때다. 브라운 신부는 플랑보와 함께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혼자서 조용히 사색에 잠기지 않았을까.

그 여행 동안 사건을 수사하는 아마추어 탐정은 휴가를 갔고, 죄인을 용서하는 성직자는 성당에 남았다. 여행 중에 플랑보의 눈에 비친 것은 철학자이자 사색가로서의 브라운 신부였을 것이다. 그것이 다른 탐정과 구별되는 브라운 신부의 본질이기도 하다.

브라운 신부의 동심

G. K. 체스터튼 지음, 박용숙 옮김,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2003


#추리소설 #브라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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