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대형교회, '하나님나라' 들어갈까

[주장] 대형교회는 그 자체가 죄... 물질 노예되면 사이비 탄생

등록 2008.02.21 09:43수정 2008.02.2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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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한국 개신교회여 회개하고 기도합시다!

한국 개신교회여 회개하고 기도합시다! ⓒ 조호진


목회자의 세금문제와 관련한 필자의 기사에 붙은 댓글 중에서 참으로 마음 아픈 댓글이 있었다. 요약하면 대략 이런 내용이다.

'목사들이 좌익 사관의 교회비판에 동참하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아직도 영의 활례(할례)를 받지 못한 육신적 목회자의 성경관에(으로) 주의 이름이 욕되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날 교회 안에 적화통일의 앞잡이 목사들이 많이 있다. 그런 자들이 선량한 목사들을 선동하여 교회 파괴를 목적으로 교회 개혁이라는 이름과 세금문제로 교회를 핍박하고 욕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란다.'

나도 레드컴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좌익·적화통일의 앞잡이 등의 단어만 보면 나도 모르게 '난, 아니야!' 손사래질을 할 만큼 분단의 세월은 우리의 생활 전반에 이데올로기의 양분을 가져왔다.

나도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교회에 대해, 목회자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한번 그런 글들을 쏟아내고 나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리고 긍정적인 역할들을 하고 있는 교회와 목사도 있는데 부정적인 이야기들만 난무하는가 해서 불편할 때도 있다. 그러나 작금, 개신교를 보면서 앨 고어의 책 제목인 <불편한 진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가 아니라 전반적인 문제이기에 더 심각하다

한국교회 혹은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오해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교리들, 신앙의 기본이 많다는 것이 큰 문제다. 하나님나라(천국)·부흥·선교·성령·기도·믿음·구원 등과 같은 중요한 명제들조차도 개인의 체험과 확신에 근거해 전혀 성서답지 못한 경우가 많다.

하나님나라를 '죽어서 가는 나라'로만 생각하다 보니 '하나님나라'라는 표현보다는 '천국'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하고, '부흥'은 양적인 부흥 혹은 눈에 보이는 부흥의 증거들이 없으면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선교'와 '전도'의 차이도 구별을 못하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방언만 생각하고, '기도'는 자기의 이익을 구하는 수단으로, '믿음'은 이성적인 판단을 뒤로 하고 무조건 믿는 것으로, '구원'은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여기에 기복신앙이 접목되면 가히 기형적인 이상한 종교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한국교회의 병은 치유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물량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방식과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회인식이 교회 안에 들어옴으로 인해 너도나도 양적 성장에 몰두하고, 중형교회나 소형교회들의 목적도 부흥(양적인 성장)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양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교회는 부흥되지 못한 교회며, 대형교회 목회자가 아니면 능력이 없는 목사요, 성공하지 못한 목사다. 결국 이런 사회 흐름에 편승하면서 한국교회는 예수의 이름만 있고, 예수의 뜻은 없는 이상한 종교집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a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는 지난해 12월 7일 ‘한국개신교회의 위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열었다.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는 지난해 12월 7일 ‘한국개신교회의 위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열었다. ⓒ 권성권



이재정 통일부장관이 이번 MBC <뉴스후>와 관련해서 불편해 했다는 보도를 들었다. 왜 불편하지 않았겠는가? 분명 건강한 교회도 있고, 건강한 목사와 교인들도 있는데 부정적인 것만 보도하는 듯해서 불편했을 것이다. 보수언론들은 마치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MBC에 대해 직격탄을 날린 것처럼 보도하려는 흔적이 역력했지만 내가 느낀 바로는 부정적인 이야기들만 하지 말고 긍정적인 이야기들도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 정도였다고 본다.

그의 문제제기는 이렇다.

'왜 작은 교회의 목소리가 안 나오는가? 대형교회에 대해 비판하면서 실제로 작은 교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아닌가?'

이 이야기의 진의를 진정 모르겠는가? 나도 건강한 이야기들이 많이 알려지면서 그런 기운이 사회에 퍼지기를 바란다.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긍정의 이야기가 주는 유익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침묵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지금 당장 한국교회가 가던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회개) 더 이상 한국교회에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대형 백화점보다도 못한 대형교회의 버스운행

백화점들마다 셔틀버스를 운행한 적이 있었다. 백화점 스스로 셔틀버스 운행을 자제한 것은 아니지만 지역의 상권과 작은 점포들을 살리기 위해 정책으로 셔틀버스운행을 전면 금지시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역의 소규모 점포들을 살리지는 못했다. 여전히 대형 백화점에 밀리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 백화점들이 강제에 의해서라도 셔틀버스 운행을 하지 않은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주일이면 대형교회 주차장과 주변 학교와 골목은 자가용으로 가득찬다. 그것도 모자라 대형버스가 즐비한데 대형버스 앞에 붙어있는 행선지를 보면 기가 막힌다. 서울에 있는 교회임에도 서울은 물론이요 경기도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지역교인들보다 외지인들이 더 많다보니 지역을 섬기는 일에도 무관심하다. 주일예배뿐 아니라 새벽예배까지도 셔틀버스로 교인들을 실어나르는 한국교회는 지나쳐도 한참 지나치다.

결국 교인도 많고 헌금도 많지만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의 증가와 더 많은 교인들을 채우기 위한 교회건축을 위해 부동산을 매입하고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치중하면서 점차 교회가 해야할 일들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이다.

대형교회들이여, 제발 당신들의 배만 불리는 잔치를 멈춰라.

어느 정도 규모가 되면 교회의 다양한 구성원들로 인해 프로그램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이 좋아도 생각만 가지고 일을 할 수 없기에 적정 규모의 교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대형화를 위한 욕심이 끝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대형교회 목사가 되면 사례비와 함께 각종 인센티브가 붙는다. 때론 사례비보다도 더 많은 선물비(떡값)도 생기고, 교단 내에서도 교회 크기만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담임목사와 부교역자는 사례비에서뿐 아니라 교회에서의 위치는 하늘과 땅 차이보다 더 크다.

이런 현실에서 부교역자들도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며, 작은 교회(양적으로) 목사들도 어서 부흥시켜 대형교회의 대열로 들어서고자 경쟁하는 것이다.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재정의 열악함으로 인해, 대형교회는 대형교회 대로 자기의 커진 몸통을 유지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서보다 자기를 위해서 재물을 모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성숙하지 못한 목사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시작하면 사택의 크기, 자동차의 크기 등 맘몬적인 치장에 열중하게 되는 것이다. 또 그걸 부러워하고 그것이 목회의 성공인 것처럼, 교인들 입장에서는 자기 교회의 목사를 최고로 모시는 것이야말로 신의 축복을 받는 지름길인 것처럼 여기게 된다.

교회가 물질의 노예가 되면, 목회자가 물질의 노예가 되면 복음은 변질되기 시작한다. 복음이 변질되면 거기서 사이비가 탄생하는 것이다. 사이비의 귀착점, 그것은 결국 물질의 문제인 것이다.

 성경에는 한 과부가 두 렙돈 헌금하는 것을 예수가 보고는 "가진 것 모두를 바친 이 여인이 가장 큰 헌금을 했다"고 칭찬하는 일화가 나온다. 헌금은 마음이 중요하다는 의미이지만, 종종 한국교회에선 "가진 것 모두를 헌금하라"는 뜻으로 강조되기도 한다. 그림은 성경의 '과부와 두 렙돈'을 묘사한 성화.

성경에는 한 과부가 두 렙돈 헌금하는 것을 예수가 보고는 "가진 것 모두를 바친 이 여인이 가장 큰 헌금을 했다"고 칭찬하는 일화가 나온다. 헌금은 마음이 중요하다는 의미이지만, 종종 한국교회에선 "가진 것 모두를 헌금하라"는 뜻으로 강조되기도 한다. 그림은 성경의 '과부와 두 렙돈'을 묘사한 성화.



교인들의 구미에 맞출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이냐?

이미 한국교회는 선지자의 사명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이제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를 드나들기에는 문턱이 너무 높아졌고, 심지어는 엘리트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교회도 있어 웬만한 학위를 가진 사람은 얼씬하기도 힘든 교회도 있다.

이젠 교인들이 목사를 선택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이 싫으면 개척을 하거나 목사직을 반납하는 수밖에 없다. 작은 교회들은 그나마 목사들이 소신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지만 자신이 개척하지 않은 교회에 청빙받아 간 목사가 자기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여간해서 쉽지 않다. 기존의 교인들이 요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할 뿐 아니라, 전반적인 목회활동도 그렇게 흘러간다. 건전한 것은 이어가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개혁을 해야하는데 목회자 혼자서 개혁의 깃발을 휘날린다는 것은 목사직을 내어놓을 만큼 위험하다. 하나님의 평가 이전의 교인의 평가가 있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비판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는 것과 일방적으로 교인들의 구미에 맞추는 것과의 경계가 참으로 중요한 문제인데 이제 교인들도 목회자의 머리 위에 서있다.

장로교의 경우는 목회자와 장로가 교회전반의 일들을 논의하고 결정하고 제직회나 공동의회에서 교인들의 허락을 받아 교회 일을 추진하는데, 담임목사와 교인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장로들로 구성되는 당회가 있다.

다수가 장로이며, 장로들은 대부분 그 교회에서 오래 신앙생활을 했거나 유지인 경우가 많다. 당회가 잘 운영되면 큰 문제가 없지만 담임목사와 장로 간에 분쟁이 생겨 당회가 파행을 맞게 되면 교회는 분규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많은 경우 분규가 생기면 목회자가 교회를 뜨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교회에 청빙받기도 힘들고 목회지를 구하지 못하는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또 교회에 분규가 생길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신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목회자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특히 대형교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교인의 구미를 맞출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이냐의 문제는 뱀 같이 지혜로워야 할 일인 것이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카리스마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공통점, 그것은 카리스마에 있다. 장로들은 물론이요 교인들도 목사의 말에 '절대복종'을 한다. 그 말이 맞고 틀리고가 아니고 '목회자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순종한다. 그래서 대형교회 목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목회자의 카리스마와 교인들의 절대적인 순종이 올바른 것이라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대형교회 목사라는 프리미엄, 그것이 한국교회에서는 상당히 유효하다.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프리미엄이 프리미엄을 낳고 또 낳는다. 확대 재생산되면서 대형교회만 살아남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기현상과 목회자 개인의 카리스마의 결합이 대형교회는 점점 커지고 작은 교회들은 늘 그 자리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본다.

나는 작고 크고의 문제가 아니라 건강한 교회와 건강하지 못한 교회, 건강한 목사와 건강하지 못한 목사로 나누어 보고 싶다. 대형교회 목사들 중에서도 건강한 목사가 있고, 작은 교회에도 건강하지 못한 목회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대형교회가 문제인가

 교회 헌금함.

교회 헌금함.


초대교회의 모델은 철저하게 나눔공동체였다. 위에서 필자의 글을 비판(?)한 목회자의 글에서 그토록 불경시하는 공산주의(현재의 이원론적인 이데올로기에서는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였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요 한 가족이다. 한 집에 다양한 가족구성원이 있는 것처럼 생각도 다르고 능력도 다르지만 모든 가족구성원들이 함께 기쁨뿐 아니라 힘든 일들도 나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교회와 작은 교회, 도시교회와 농어촌교회의 현격한 차이와 목회자들 간의 엄청난 사례비 차이 등은 일반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어려운 이웃이 곁에 있는데 호위호식하는 것 자체가 성서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이다.

성서에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사로는 죽어 천국에 갔고, 부자는 죽어 지옥에 갔다. 성경을 보면 나사로가 특별히 하나님을 잘 섬겼다는 이야기도 없고, 부자가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없다. 그렇다면 왜 부자가 지옥에 갔는가? 가난한 이웃(거지 나사로)이 문전걸식을 하고 있는데도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대형교회가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오로지 자기 배만 불리는 데 급급해서 작은 교회들과 농어촌교회들이나 빈민촌의 교회들, 그 곳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관심만 없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좌파·빨갱이로 몰기도 하면서 차별화(?)하는 행태는 결코 신앙적인 것이 아니다. 대형교회는 자신만의 배를 불리는 일보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재차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능히 부자도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기적을 체험할 것"이라고 허망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교회 밖의 소리에 겸허하게 귀를 기울이자

교회의 문제, 그것은 어쩌면 교회밖에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다 인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듯한 억울함이 있을지라도,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어야 할 교회를 향해서 세상이 '빛도 소금도 아니다'라고 한다면 왜 그런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귀 기울여 소리를 들어보고 그들의 지적이 옳다면 고쳐가고,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신앙의 양심을 걸고 싸워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최근 논의되고 있는 세금문제, 교회재정의 투명성 문제 등의 주제들은 한국교회를 건강하게 만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카페 <달팽이 목사님의 들꽃교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다음카페 <달팽이 목사님의 들꽃교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교회세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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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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