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역사팩션 45] '쑥대머리 귀신형용'

김갑수 대하소설 <제국과 인간> 상해의 영혼들편

등록 2008.04.13 11:56수정 2008.04.13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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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수가 그녀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저는 아직 확신이 없어요. 당신을 사랑한다는. 그러니 기다려 주세요.”


김태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기다리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다려도 안 될 거라는 체념이었다.

“백 동지, 부탁이 하나 있네.”
“말씀하세요.”

다시 김태수는 장난기 섞인 어조로 말했다.

“들어 주려나?”
“그럼요.”
“내가 죽기 전에 우리 소리 한 번 같이 하세.”

김태수는 백주원의 무릎을 손끝으로 건드리며, “쑤욱대 머리이 구우신 형용” 하며 북채잡이 흉내를 냈다.


백주원은 물끄러미 김태수의 얼굴을 보았다. 김태수도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눈을 들어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반달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반달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 지난 후 김태수는 손바닥으로 백주원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주었다. 멀리 어디에선가 이름 모를 산새가 울고 있었다. 새벽이었다. 산새는 한사코 혼자서만 울고 있었다. 백주원의 눈에도 여전히 물기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기구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물론 신규식이 그녀의 출생과 성장을 거의 알고는 있을 터이었다. 하지만 신규식은 지금 그녀가 김태수라는 새로운 운명과 맞닥뜨려 겪고 있는 고뇌를 알 리 없었다.

“조국을 찾는 것이 곧 아버지를 찾는 일이다.”

동경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에게 신규식이 한 말이었다. 그 말은 아버지를 앗아간 자가 조국을 빼앗은 자와 같다는 뜻으로 들렸다.

“조국을 찾게 되면 너의 출생을 이야기해 주마.”

동경에 갈 때 신규식이 한 말이었다. 그때 신규식은 조국을 빨리 찾을 수 있으리라고 낙관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이제 그녀는 신규식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잃은 자신의 슬픔보다 조국을 잃은 신규식의 슬픔이 언제나 더 깊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출생 내력을 알고 있는 사람과 함께 일하면서도 그것을 물을 수조차 없는 자신이 스스로 안쓰러웠다.

그리고 안쓰럽기는 김태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녀는 일본과 한국과 중국에서 많은 남자를 눈여겨 볼 기회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민제호는 단연 뛰어난 남자였다. 그의 안목과 심성과 유머는 그녀가 거부감을 갖는 심리적 기준선보다 언제나 높았다. 그러나 그녀는 민제호에게 이성적 자극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런데 김태수는 민제호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김태수에게 번번이 친화감을 느끼고는 했다. 그는 지적인 면에서 민제호에 훨씬 못 미치지만 감각과 직관이 비범하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김태수만큼 예민한 사람을 겪어 보지 못했다. 그리고 김태수는 민제호 이상으로 선량한 심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김태수가 자기 남자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떤 남자도 결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발견했다. 그녀는 자기의 비정한 출생과 삶이 자신을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흔해 빠진 상투적인 말, 이른바 ‘기구한 운명’이란 것이 바로 자기의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뺨에는 밤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눈물을 닦은 그녀는 차분히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 본 적도 없어, 그래서 그리워해 보지도 않은 어머니였지만, 그래도 그 어머니의 정체를 밝혀야 할 것 같았다. 또한 아버지는 왜 실종되었는지를 알아야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자신도 다른 여자처럼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게 되었다.

백주원은 민제호의 제국주의 강의를 들을 때 다시 한 번 인간의 가치 같은 것에 신뢰감을 느꼈다. 비록 생활이 누추하고 피곤하더라도 그렇게 깨어 있는 의식을 지니고 사는 민제호가 아름다워 보였던 것이다.

반면에 그녀는 김태수를 볼 때마다 슬픔과 기쁨을 번갈아서 느끼고는 했다. 그런데 아주 공교롭게도 자신이 김태수와 동일한 감정을 갖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자신이 즐거울 때 김태수는 대체로 슬퍼 보였고, 자신이 슬플 때 김태수는 즐거워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까만 해도 그랬다. 그렇게 슬픈 연주를 하던 사람이 불현듯 그렇게 장난스러워질 수가 있는 것일까?

백주원은 말라가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눌러 닦아내면서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는 김태수가 북채잡이 흉내를 내던 모습을 떠올렸다. 작은 동작만으로도 김태수의 북은 건드러지는 솜씨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김태수와 함께 쑥대머리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리강화회의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내놓은 민족자결주의는 피압박 민족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을 안겨 주었다. 인간이 개인으로서 기본적 인권을 가지는 것처럼 민족이라는 공동체도 민족자결이라는 기본적 권리가 있다는 것이 민족자결주의의 일반적 원리였다. 장자크 루소에게서 빌려온 이 논리는 어쨌든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1918년 가을 상해를 방문한 미국 대통령 특사 크레인은, 미국이 파리강화회의에서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촉구할 것이라고 연설했다. 신규식은, 한국의 독립 여부는 미국에 달려 있다는 민제호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항주로 연락해 민제호를 급히 오라고 했다. 그러나 민제호는 폐렴을 앓고 있었다. 병세가 매우 심해서 기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신규식은 크레인이 오기 2주 전쯤에 여운형을 불렀다. 신규식보다 8년 연하인 여운형은 서울 승동 예배당의 전도사로 있다가 1914년 9월 조동우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 금릉대학 영문과에서 3년 동안 수학했다. 그는 1917년 상해로 와서 미국인 피치가 경영하는 협화서국의 위탁판매부 주임으로 있었다.

“여 동지가 이번에 올 미국 특사 크레인을 만나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소.“

이미 석 달 전부터 신규식은 여운형과 함께 창당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당명은 신한청년당이었다. 여운형 외에 선우혁 서병호 조동우 등 동제사와 신민회 출신 청년들이 주축이 된 당이었다.

미국 대통령 특사 크레인은 중국의 대표를 파리 강화회의에 참여시키려는 목적으로 상해에 오는 것이었다. 미국은 명목상 승전국의 일원이면서도 실제로는 많은 이권을 빼앗긴 중국을 등장시켜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크레인은 상해 칼튼 카페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중국도 이제까지 일본에게 받은 손해를 청구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중국을 비롯한 피압박 민족에게 큰 희망을 던져 주었다.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던 신규식과 동제사의 청년들은 크레인의 상해 발언에 자극을 받았다.

여운형은 신규식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식 대표를 파견하자는 거지요?”
“그렇소. 신한청년당 이름으로 대표를 보냅시다.”

당시 중국에는 두 명의 김규식이 있었다. 그들은 이름이 같고 나이가 비슷했지만 기질은 사뭇 달랐다. 무관 출신 김규식은 동제사에 머물다 무장 항쟁을 하겠다고 간도로 떠났고, 영문학을 전공하고 프린스턴에서 석사를 마친 김규식은 동제사와 신한청년당을 돕고 있었다. 신규식과 여운형은 미국에서 온 김규식을 입당시키고 그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로 합의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시대에 매혹적인 삶을 살다 간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시대에 매혹적인 삶을 살다 간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여운형 #김규식 #파리강화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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