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장 나오라 그래!

[까칠한 고시생 유럽 정벌기 2] 영국 입국

등록 2008.05.29 21:25수정 2008.06.10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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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는 표 안 판다?

 

a 히드로 국제공항 지하철 역 고마운 역무원에게 '브링 유어 수퍼바이저!'라는 말이나 내뱉으려 했었다니….

히드로 국제공항 지하철 역 고마운 역무원에게 '브링 유어 수퍼바이저!'라는 말이나 내뱉으려 했었다니…. ⓒ 이중현

▲ 히드로 국제공항 지하철 역 고마운 역무원에게 '브링 유어 수퍼바이저!'라는 말이나 내뱉으려 했었다니…. ⓒ 이중현

 

"You… Go to right over ther… Don't… Q…  Ticket…."

'너… 저리가… 안돼… Q… 티켓….'

 

아무리 좋은 쪽으로 끼워맞춰봐도 그닥 호의적인 의미로 해석 될 단어들이 아니다.

 

히드로 공항에서 런던 시내로 들어가는 지하철역 입구에서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굳은 표정으로 이런 말을 걸어오는 역무원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퍽이나 난감하다.

 

문득, 가방끈을 움켜진 내 손이 눈에 들어온다. 새카맣게 탄 것은 아니지만, 이들처럼 희지도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랗다.

 

나는 동쪽 먼곳의 작은 나라에서 온 황인종이고, 여기는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유럽이며, 그 중에서도 과거 거의 세계 전체를 지배할 뻔 한적이 있는 영국의 수도다. 그리고 내 눈 앞의 역무원은 푸른눈과 새하얀 피부, 금발 머리의 순수한 앵글로색슨 혈통이다.

 

'어쭈…. 이런 식으로 환영해주는구나….'

 

이런 녀석들에게는 오히려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 싸워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싸우지? 여기서 주먹을 썼다간 버킹검궁도 구경 못해보고 추방당할 거다. 잘해봐야 런던 서부 경찰서 유치장이나, 주잉글랜드한국대사관 정도는 구경 할 수 있겠지. 그러니 말로 싸워야 한다. 내게도 표를 사서 지하철을 탈 권리가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근데, 영어로 해야 한다.  영작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잠깐이면 되는데...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죠?

 

불현듯 머리에 전구가 켜지면서 전에 없던 재치가 떠오른다.

 

"I am so sorry but… Can you say that again for me please?"

 

죄송하지만 한번만 더 말해 주실래요? 최대한 천천히 대답해야 한다. Excuse me? I'm sorry? I beg your pordon? 도 있지만, 그건 문장이 짧다. 혀가  쉽고 긴 문장을  발음하는 동안, 대뇌 전두엽 구석에서 '전투용 영작'을 할 여유를 확보해야 했다.

 

토익 710점에 빛나는 내 영어 실력은, 그 짧은 순간 '내가 누구로 보이냐. 나 돈 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아냐? 너희 나라에 돈쓰러 와준 손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너는 지금 나보고 뭐라고 말했냐? 그건 손님에게 해야 할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용서 할 수 없다. 지금 당장 네 상급자를 불러와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직접 네 상급자를 찾아서 네가 내게 어떻게 말했는지 말하겠다?'라는 길고 긴 영어문장들을 내뱉을 준비를 마친다.

 

3초, 딱 3초만에 준비가 끝났으니, '넌 머리가 나빠서 공부는 글렀다. 니 꼴에 뭔놈의 법대냐'라는 우리 아부지의 핀잔은 잘못된 명제임이 확실하다. 이제 내 눈 앞에 서 있는 역무원이 '너한텐 티켓 안판다 저리 가라…'라는 말을 다시 한번 더 해주기만 하면, 이 이역만리 만리타국에서 고추장 먹고 자란 민족의 성깔을 드높일 수 있을 터이다.

 

줄 설 필요 없어요

 

역무원은, 영국식 악센트를 어려워하는 나를 위해 친절하게도 손으로 방향까지 가리켜가며 또박또박 발음 해 준다.

 

"If you go to right over ther, you don't need to get into a queue to perchase ticket."(저쪽으로 가면,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설 필요가 없어요.)

 

역무원이 가리킨 손끝 저편에는 텅빈 매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영국에서는 미국식 영어에 없는 단어들이 꽤 쓰이고 있다는데, 그 중에서 '큐'라는 게 있다는 것을… 영국인은 줄 서는 것을 참 좋아한다는 것을 얼핏 기억해낸다.

 

산만한 배낭을 짊어진 채 맨 뒷줄에 서서 기다리는 여행자를 위해 안내해준 고마운 역무원에게 '너희 사장 나오라고 해!'라는 말이나 내뱉으려 했었다니, 낯이 확 뜨거워진다.

 

"고맙습니다"라고 고개를 꾸벅숙여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줄을 빠져 나와버렸다.

덧붙이는 글 | slrclub, 쁘리띠님의 떠나볼까

이 여행은 지난 2006년 6월~8월에 다녀왔습니다.

2008.05.29 21:25ⓒ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slrclub, 쁘리띠님의 떠나볼까

이 여행은 지난 2006년 6월~8월에 다녀왔습니다.
#가짜시인 #유럽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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