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향한 '시민 경고방송', 경찰도 겸연쩍은 웃음만...

"전경 여러분, 여러분들이 이런다고 밥·휴가 더 주지 않습니다"

등록 2008.07.13 13:24수정 2008.07.1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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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촛불집회 현장 ⓒ 박형준

▲ 12일 촛불집회 현장 ⓒ 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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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촛불집회 현장 ⓒ 박형준

▲ 12일 촛불집회 현장 ⓒ 박형준

 

시위인가, '시민 걷기 대회' 인가

 

이 말부터 시작하겠다.

 

"죽는 줄 알았다.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었다."

 

내가 시위를 취재하는 것인지, '시민 걷기 대회'를 취재하는 것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철인이었다. 대관절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 먼 거리를 걸어놓고도 여전히 힘이 넘쳐보였다.

 

청계천 소라광장으로부터 시작해 시청 앞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행진 코스는 엄청났다. 국가인권위원회 건물을 거쳐 수배자들이 피신해 천막 농성을 진행중인 조계사 인근에서 '만남'을 가졌다. 그러고는 안국동을 잠시 거쳐서는 종로와 동대문, 을지로를 모두 거쳐 다시 시청 앞이었다. 장장 4시간 이상 걸었다. 이건 시위가 아니었다. '시민 걷기 대회'였다.

 

그럼에도, 이 '시민 걷기 대회'가 한편으로는 '시위'임을 이야기해주는 것은, 시위 참가자들의 우렁찬 구호였다. "이명박은 물러가라"와 "독재타도 명박퇴진"에 이르기까지, 구호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시위를 마치고 돌아간 1만여 명의 시위 참가자들, 일요일은 무조건 쉴 것이다. 다리와 목청을 그렇게도 끝까지 활용했으니 충전이 필요하진 않았을까?

 

a  소라광장에 등장한 수녀들

소라광장에 등장한 수녀들 ⓒ 박형준

소라광장에 등장한 수녀들 ⓒ 박형준

 

a  소라광장에서 촛불을 든 김근태 전 의원

소라광장에서 촛불을 든 김근태 전 의원 ⓒ 박형준

소라광장에서 촛불을 든 김근태 전 의원 ⓒ 박형준

 

10대 여학생과 경찰의 지하철역 실랑이, '초등학생 연행' 떠올라

 

시민들이 이러한 열정과 에너지에 비하면, 경찰의 대처는 여전히 서글프게 느껴졌다. 이젠 인도에서 '진압'을 들어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지하철역 안에서 남성 전경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 10대 여학생들을 직접 진압하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이유는 "화장실에 간 전경을 못나오게 하는 청소년들은 10대가 아니라 범죄자"라는 논리다. 물론, 청소년들이 잘 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생리현상을 해결하려는 전경을 굳이 막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경찰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 발언,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초등학생을 전경버스에 연행하고도 '덩치가 커서 중학생인 줄 알았다'면서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던 경찰은 경찰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선언하건데, 경찰의 '초등학생 연행'이라는 자랑스러운 위업은 틈틈이 거론해 사람들이 잊지 못하게끔 하겠다. '촛불시위'와 관련해 결코 잊을 수 없는 경찰의 역사적인 업적이다. 국사 교과서에 게재해 후세에 전할 필요성이 있을 정도다. 그런 일을 한 경찰이, 화장실 앞에서 청소년들과 실랑이 좀 벌였다고 '범죄자'를 운운한다. 이건 아이러니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 공권력을 빙자한 코미디다.

 

문제는, 남성 전경들이 10대 청소년들을 지하철 내에서 온몸을 앞세워 진압하면서 꼴사나운 풍경도 벌어졌다는 것이다.

 

남성 전경이 직접 10대 여학생까지 진압하겠다고 나섰으니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육체적 접촉'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에 여학생들은 '성추행'이라면서 강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경찰의 반박은 자신들의 발언을 곧장 뒤집는 격이라 재미있다.

 

"건드리기만 해도 성추행이냐?"

 

실랑이만 벌여도 범죄자라고 해놓고, 건드리기만 했으므로 성추행이 아니라는 논리다. 경찰은 지하철 역에서 청소년들을 진압하기에 앞서 기본적인 말의 앞뒤부터 공부해오길 바란다.

 

a  촛불시위에 참가한 10대 소녀들

촛불시위에 참가한 10대 소녀들 ⓒ 박형준

촛불시위에 참가한 10대 소녀들 ⓒ 박형준

 

물론, 이것만이 다가 아니었다. 아예 시청 앞에서 한참 벗어나 전경버스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정복경찰들을 대거 동원해 인의 장벽까지 쌓으면서 다시금 과잉대처에 나섰다. 이에 대해서는 어느 시민이 노트북에 담아온 녹음파일을 소형 확성기를 이용해 '시민 경고방송'이 나섰다. '시민 경고방송'이 이 과잉대처에 대한 시민들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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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촛불집회 현장 ⓒ 박형준

▲ 12일 촛불집회 현장 ⓒ 박형준

 

 

"전경 여러분, 이미 점호시간이 지났습니다. 지금 바로 해산하시고 숙소로 돌아가서 점호받으세요. 전경 여러분, 여러분이 이런다고 밥 더 주지 않습니다. 휴가, 더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선동당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을 선동하는 저 경찰들을 보세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불법을 행하는 동안, 여러분들을 선동하는 저 경찰관은 얼굴도 보이지 않는 안전한 곳에서 여러분들을 선동하고는 바로 도망가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 선동당하지 마시고 방패를 내려놓으시고 시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 '시민 경고방송'은 정복경찰 대열 코 앞에서 울러펴졌다. 정복경찰들도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이 방송을 들으며 겸연쩍게 웃었다.

 

8인의 수배자들, 시민들과의 만남에 모처럼 '웃음꽃'

 

이날의 백미는, 12일 저녁 8시 30분 경에 있었던 시위참가자들과 8인의 수배자들의 '조우'다. 시위참가자들의 행진이 조계사 부근을 지나면서 가졌던 만남이다. 시위참가자들이 부근을 지나다 멈췄다는 소식을 들은 수배자들도 일주문 밖으로 나와 일렬로 서서 시민들과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으며, 일부 시민들은 그 반가움의 표시로 악수를 시도했다.

 

그들은 천막 내에서 컴퓨터로 인터넷 생중계를 보다가 시위참가자들이 근처를 지난다는 것을 알고 일주문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대책회의 측은 조계사 부근에서 무대를 설치하고 문화제를 진행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왜 당신들 마음대로 이 좁은 곳에 멈춰서 있느냐"고 빗발치게 항의했다. 

 

악천후를 감당할 정도라면 마음을 단단히 먹은 시민들이다. 긴 행진이든 경찰과의 대치든 마다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 결국, 대책회의 측은 무대 설치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의 선택은, 역시나 '기나긴 행진'이었다.

 

'최종 선택'은 YTN 본사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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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촛불집회 현장 ⓒ 박형준

▲ 12일 촛불집회 현장 ⓒ 박형준

 

 

시청 앞 광장에 이르러, 경찰 병력과 마주한 상황이었지만 시민들은 무리해서 경찰과 대치하지 않았다. 그들의 선택은 YTN이었다. 현덕수 전 노조위원장이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다. 수천의 시위참가자들이 예상치 못한 방문을 하자, 현덕수 전 위원장은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역시나 예전과 같이 힘을 잃지 않은 목소리로 '각오'를 다졌다.
 
"YTN 사장 자리에는 이명박 당선에 앞장섰던 구본홍씨가 와선 안된다. 언론의 생명은 정치적 중립인데 그런 자리에 어떻게 대통령의 측근이 올 수 있는가. 이게 바로 방송장악이며 언론장악이다. 우리 조합원들은 14일에 열리는 주총을 반드시 무산시킬 것이다."
 
"승지로 가셔야 할 분이 어떻게 대사간으로 올 수 있겠느냐"던 그 각오와 그 지론 그대로였다. 내 눈에 익숙한 풍경이 곧 펼쳐졌다. 종이비행기가 날아왔으며 본사 앞에 연좌한 시민들이 촛불을 밝히고 있다. '다인아빠'의 용달차가 찾아와 라면을 제공하고 있으며, 곳곳에서 대화와 웃음꽃이 피워지고 있다.
 
홀로 외롭게 어려운 싸움을 하는 입장에서는, 그렇듯 진심을 가득 담아온 사람들이 반가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현덕수 전 위원장의 입장이었다면 아마도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속으로는 흘렸을수도 있다. 14일 아침 일찍, YTN 본사 앞으로 반드시 취재를 나가겠다는 각오를 다시금 다졌다.
 
'악천후'도 촛불 끌 수 없다
 
악천후였다. 시종일관 비가 내렸다. 하지만 그들은 촛불을 포기하지 않았다. 걷고 걷고 또 걸으면서 끝내 YTN까지 챙기는 여유를 보였다. 예비군은 묵묵히 앞장서 뛰어가면서 차량을 통제했고 '진압' 직전 위기에 처했던 시민들을 설득해 인도 위로 올려보내기도 했다.
 
'다인아빠'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여전히 라면을 끓여 시위참가자들의 추위와 허기를 녹였다. 변한 것은 없었다.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이제 이명박 정부만 변하면 된다. "독재타도 명박퇴진"이라는 구호를 불쾌해하는 것으로 멈출 것이 아니라 이 구호 속에서 이명박 정부가 무엇을 읽어야 할지를 느껴야 한다. 물론, 시민들은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쓴웃음을 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읽어야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의무이기에 굳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그 구호 속에서 무엇을 읽을까. 모든 정책에 있어 저항의 대상이 된 이명박 정부가 '악천후' 속에서 더욱 씁쓸하게 다가왔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07.13 13:24ⓒ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촛불 #위기의 언론독립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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