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맨해튼 프로젝트와 베모르크 특공대

[김갑수 역사팩션 137] 3부 '열두 개의 눈동자' 편

등록 2008.10.17 15:12수정 2008.10.17 18:48
0
원고료로 응원
임수경,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유일한 한국인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정보를 임수경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우라늄 연쇄반응이 1942년 10월 초쯤에 성공할 것으로 확실시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에서는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대규모 연구· 실험단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임수경은 아인슈타인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튼 원자폭탄 개발은 본격적으로 현실화되고 있는 점만은 분명했다.

독일이 중성자 감속재를 직접 구해 손쉽게 우라늄 235를 얻으려 한 데 비해, 미국은 아주 기본적인 방법으로 거대한 공장을 세우는 일련의 계획을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라고 불린 이 몇 년 간의 과정에 임수경은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처음부터 참여했다.

사실 물리학자들보다 더 다급해져 있는 사람들은 미국 정부 관리들이었다. 독일의 원자폭탄 연구가 미국보다 1년 정도 앞서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상황은 예전과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독일보다 먼저 폭탄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 시도


얼마 후 일본의 군부에서도 원자폭탄의 제조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것은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보낸 지 6개월쯤 된 시점이었다. 일본군의 스즈키 신사부로 중령은 도쿄대 물리학 교실에서 연구를 마치고 육군연구소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육군항공기술연구소 소장 야스다 다케오 중장의 호출을 받는다.

"우라늄 연쇄반응을 이용한 폭탄 개발 가능성을 조사해 보게."


스즈키는 도쿄대 교수 사가네 료키치에게 자문을 받아 보고서를 완성한다. 보고서의 내용은 짤막했다.

'원자폭탄은 가능한 것이며, 그 재료인 우라늄은 일본에서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됨'

1941년 4월, 정식으로 원폭 제조에 관한 연구가 이화학연구소에 의뢰되고 첫 예산이 집행되었다. 연구팀의 책임자로는 니시나 요시오가 선임되었으며, 연구의 명칭은 니시나의 첫 이름자를 따서 '니호 연구'로 정해졌다. 니시나는 뛰어난 물리학자였다. 그는 당대 물리학계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덴마크의 닐스 보어에게 지도를 받은 양자역학 전공자였다.

당시 일본은 세계 물리학계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서구의 과학 전문지도 입수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 환경에서도 니시나는 우라늄 농축 개발의 기초 연구를 진행시켰다. 2년 후인 1943년 니시나는 육군에 연구 보고서를 올린다.

1.원자폭탄의 개발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2.우라늄 235 1킬로그램을 농축 분리하면 황색화약 1만8천 톤의 폭탄을 얻을 수 있다.
3.우라늄 235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열확산법이 적당하다고 판단된다.
4.분리 통에는 금도금이나 백금도금을 한 재료를 사용해야 하는데 구리를 이용할 수 있을는지는 더 연구해야 알 수 있다.

도조 히데키 수상은 육군 항공본부가 중심이 되어 원자폭탄을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항공본부는 수상의 지시를 니시나에게 전했다. 니시나는 폭탄 개발의 관건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우라늄 235의 분리 작업이 과연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현재의 연구는 거기까지 진행되어 있지 않습니다. 설령 분리가 되더라도 그것이 폭탄이 될지, 원자 연료로 원동기에 이용할 수 있는 정도일지 현재로서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이 밖에도 일본에서는 다른 경로로도 원폭이 연구되고 있었다. 물리간담회도 원폭에 대한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그들은 어느 나라든지 폭탄 제조가 가능하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아무리 최소한으로 잡아도 3,4년 내로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원자폭탄 개발은 가능하다. 하지만 아군이건 적군이건 이번 전쟁 중에는 사용할 수 없다. 그것은 최소 3,4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전쟁을 속전속결해야 하는 일본으로서 3,4년의 세월은 무의미했다. 일본 군부는 1,2년 내로 승리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패배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원자폭탄 연구에 회의감을 가졌다. 그러던 차에 미군의 공습으로 이화학연구소가 파괴됨으로써 일본의 원폭연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중단되었다.

일본이 원폭 연구에 들인 예산은 미국 맨해튼 프로젝트 예산의 1천분의 1이었다. 전후 미국은 미국에만 있는 줄 알았던 원폭 연구 시설이 일본의 이화학연구소· 교토대학 등 무려 네 군데에나 있는 것을 알고는 황급히 그것들을 파괴해 버린다.

독일 상황은 일본과 크게 달랐다. 그들은 이미 중성자의 속도를 효율적으로 늦출 수 있는 감속재를 물색해 놓은 상태였다. 독일은 무거운 수소와 무거운 산소로 만들어진 중수(重水)가 감속재로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독일에 중수 생산 공장이 없다는 점이었다. 역시 시간에 쫓겼던 독일도 중수 생산 공장을 한가로이 건설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있는 중수공장을 물색했다. 이것은 독일 정부의 조급증이 빚은 일대 실수였다. 만약 그들이 중수 생산 공장을 국내에 만들었더라면 독일은 원자폭탄의 최초 생산국이 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베모르크 중수공장을 폭파하라

독일은 노르웨이 남부에 위치한 베모르크 전기화학공장에서 암모니아 생산의 부산물로 중수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한 것은 중수 공장 확보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독일은 주변이 온통 화강암 절벽으로 요새화되어 있는 중수 공장을 노르웨이 군의 거센 저항을 물리치고 함락시켰다. 이렇게 하여 독일은 국내에서 중수공장을 건립하는 시간을 벌게 되었다. 중수공장을 확보한 독일은 원자폭탄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한편 영국은 독일이 왜 노르웨이의 전기화학공장을 중시하는지 의문을 가졌다. 사실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을 가장 두려워한 것은 당연히 지근거리에서 독일과 전쟁 중인 영국이었다. 그들은 노르웨이에서 프랑스를 거쳐 들어온 정보를 분석한 결과,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이 베모르크 공장의 중수에 의존하고 있다는 심증을 굳히게 되었다.

영국군은 노르웨이 군과 합동으로 조직된 34명의 특공대를 베모르크에 급파한다. 4명은 공장 주변에 미리 잠입했고 나머지 30명은 두 대의 글라이더에 나눠 타 출발했다. 그러나 결과는 허망하게 나타났다. 글라이더 한 대는 산등성이에 충돌했고, 남은 한 대는 산골짜기에 추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두 번째 특공대는 노르웨이 군인으로만 구성되었다. 그들은 공장 주변의 꽁꽁 언 호수에 낙하산으로 내려앉았다. 그들은 500미터 높이의 화강암 절벽을 타고 올라가 공장 침투에 성공했다. 그들은 가장 먼저 한 것은 물론 중수 탱크를 찾아 폭파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독일은 중수공장 재건에 1년의 시간을 더 써야 했다. 이로써 1년 정도 앞서 있던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 진도는 미국과 비슷해진다.

영국은 미국에 원자폭탄 개발을 서두르라고 종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독일의 동태를 유심히 살폈다. 독일은 24시간 3교대로 공장 보수에 진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영국 정보부는 독일이 다시 중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영국의 비밀 특사는 사태의 심각성을 미국에 알리기 위해 폭격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가 루스벨트를 만난다.

영국은 미국에 베모르크 공장의 정밀 폭격을 요청했고 미국은 즉시 수락했다. 미국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르웨이 민간인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점심시간을 이용하기로 했다. 140여 대의 미국 폭격기는 250킬로그램 폭탄 700개를 베모르크 공장에 집중적으로 투하했다. 이렇게 하여 연합군은 다시 공장 가동을 중단시키는 데 성공했다.

독일은 뒤늦게 국내 공장 건설을 결정한다. 베모르크 공장을 복구해 재가동하더라도 미국이 다시 폭격을 해 올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하루라도 일정을 당기기 위해 베모르크 공장 시설을 뜯어내 독일로 가져가기로 한다. 동시에 아직 남아 있는 상당량의 중수도 같이 옮기기로 했다.

그러나 이 비밀 정보는 공장과 선을 대놓고 있었던 노르웨이 레지스탕스에 새어 들어갔다. 그들은 독일이 2주 후에 중수통들을 독일로 운반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들은 노르웨이 공장장과 내통하고 있었다. 노르웨이 공장장은 운반 수단이 기차와 선박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베모르크에서 독일로 가기 위해서는 틴쇼 호수를 건너야 했다.

중수를 실은 독일 배가 출발한지 30분 경, 그다지 크지 않은 폭음이 터진다. 그것은 노르웨이 특공대원이 배 바닥에 붙여 놓은 시한폭탄이었다. 시한폭탄은 배의 바닥에 지름 1미터 정도의 구멍을 냈다. 얼마 후 선체가 기울며 침몰했고 물보다 무거운 중수통들은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물론 영문을 알지 못한 수많은 민간인 승객들도 중수와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로써 원자폭탄 개발을 눈앞에 두었던 독일의 야망은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은 중수통과 함께 침몰하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의 실상과 이에 도전한 매혹적인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의 실상과 이에 도전한 매혹적인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맨해튼프로젝트 #베모르크중수공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