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보다 좋은 우리 '상말' (46) 불구대천

[유리 말에 마음쓰기 469] ‘불구대천(불공대천)의 원수’ 다듬기

등록 2008.11.07 11:58수정 2008.11.07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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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불구대천 1

..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한 새 세대들이 올바른 길을 가려고 할 까닭이 없다. 역사에 대한 두려움, 민족을 배반하는 행위의 죄과를 무서워할 줄 모르는 사회에 민족의 양심이고 역사의 심판이고 관심이고 갈 까닭이 없다. 한때 천지가 유신 일색이요, 만약 털끝만치라도 유신을 의심하는 자가 있다면 당장 불구대천의 원수나 되는 것처럼 공격하던 위인들이 일단 박 대통령이 살해되고 새 시대, 새 질서가 제창되는 사회가 되자, 어느새 천지민심이 세 시대, 새 질서 일색이 되어 지난날의 유신질서는 온데 간데 없어져버리는 오늘의 세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송건호-살아가며 고생하며》(시인사,1985) 52쪽


‘新 세대’가 아닌 ‘새 세대’를 쓰니 반갑습니다. “역사에 대(對)한 두려움”은 “역사를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나 “역사를 두려워하고”로 다듬습니다. “민족(民族)을 배반(背反)하는 행위(行爲)의 죄과(罪過)”는 “겨레를 등진 잘못”으로 손보고, ‘관심(關心)’은 ‘눈길’이나 ‘눈’으로 손보며, “유신 일색(一色)이요”는 “유신뿐이요”나 “유신 법석이요”로 손봅니다. ‘만약(萬若)’은 ‘조금이라도’로 손질하고, ‘자(者)’는 ‘사람’으로 손질하며, ‘당장(當場)’은 ‘곧바로’나 ‘바로’로 손질합니다. “원수나 되는 것처럼”은 “원수나 되는 듯”으로 고치고, “공격(攻擊)하던 위인(爲人)들이”는 “퍼붓던 놈들이”나 “퍼붓던 분들이”로 고치며, ‘일단(一旦)’은 ‘아무튼’으로 고친 다음, ‘살해(殺害)되고’는 ‘죽고’로 고칩니다. ‘제창(提唱)되는’은 ‘부르짖는’으로 고쳐쓰고, ‘천지민심(天地民心)’은 ‘하늘 뜻’이나 ‘하늘과 땅이 바라는’으로 고쳐쓰며, ‘일색(一色)’은 ‘한 가지’로 고쳐쓰고, “지난날의 유신질서”는 “지난날 유신질서”로 고쳐씁니다. “오늘의 세태(世態)”는 “오늘날 모습”으로 다듬어 줍니다.

 ┌ 불구대천(不俱戴天) = 불공대천
 ├ 불공대천(不共戴天) : 하늘을 함께 이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 세상에서 같이
 │    살 수 없을 만큼 큰 원한을 가짐을 빗대는 말
 │   - 불공대천의 원수 / 불공대천의 왜적을
 │     그와는 불공대천할 원수지간이다 / 우리는 불공대천할 사이이다
 │
 ├ 불구대천의 원수
 │→ 보고 싶지도 않은 원수
 │→ 쳐다보기도 싫은 원수
 │→ 같은 나라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는 원수
 │→ 찢어죽일 원수
 │→ 둘도 없는 원수
 └ …

누구나 알아들으며 널리 쓰는 말이 있고, 몇몇 사람만 아는 말이 있으며, 듣는 사람이 대충 알아듣는 말이 있어요. ‘불구대천’은 이 가운데 어디에 드는 말일까 생각해 봅니다. 이 말을 쓰는 분은 뜻을 얼마나 잘 헤아리고 있을는지, 또 이 말을 듣는 분은 뜻을 얼마나 잘 받아들일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 불공대천의 원수 → 아주 몹쓸 원수 / 빌어먹을 원수
 ├ 불공대천의 왜적을 → 찢어죽일 왜적을 / 우라질 왜적을
 ├ 그와는 불공대천할 원수지간이다 → 그와는 꼴도 보기 싫은 사이이다
 └ 우리는 불공대천할 사이이다 → 우리는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사이이다

말하는 쪽에서는 뜻을 안다고 해도, 듣는 쪽에서는 뜻을 잘 모른다면, 제아무리 훌륭한 말씀을 들려준다고 해도 아무런 보람이 없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성경이든 불경이든,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좋은 말씀을 들려주어야 성경이나 불경에 담은 훌륭한 뜻을 널리 나누면서 함께 즐길 수 있다고 느낍니다.


처세를 다룬 책도, 실용기술을 다루는 책도, 문학이나 예술을 담은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읽는이 눈높이에서 차근차근 풀어내어야 비로소 너르고 깊은 뜻이 찬찬히 열릴 테지요. 나누어질 테지요.

ㄴ. 불구대천 2


.. 온 겨레가 달려들어 무너뜨려야 할 절벽이 아니냐고 / 그 앞에서 우리 모두 한 겨레로 허물어져야 하는 / 불구대천의 원쑤 아니냐고 .. (문익환)《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화다,1985) 19쪽

‘절벽(絶壁)’이라는 말을 곧잘 씁니다만, 우리 말은 ‘벼랑’이나 ‘낭떠러지’입니다.

 ┌ 불구대천의 원쑤 아니냐고
 │
 │→ 몹쓸 원쑤 아니냐고
 │→ 끔찍한 원쑤 아니냐고
 │→ 죽일놈이 아니냐고
 │→ 잊지 못하도록 미운 놈이 아니냐고
 └ …

끔찍하게 미운 사람한테는 “끔찍하게 밉다”고 할 때가 한결 잘 어울리지 않으랴 싶습니다. 죽도록 미운 사람한테는 “죽도록 밉다”고 할 때가 어느 때보다 걸맞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찢어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한테는 “찢어죽이고 싶게 밉다”고 할 때가 딱 알맞으리라 봅니다. 이런 이들을 가리켜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하기보다는, 지금 내가 어떤 마음이며 내 마음에 어떤 미움이 꿈틀꿈틀하고 있느냐를 나타날 때가 한결 생생하다고 느낍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죽일놈을 다 봤나.” 하는 말을 때때로 씁니다. 말끝만 살짝 바꿔 “죽일년을 다 봤나.”처럼 쓰기도 합니다. 자기한테 참으로 못되거나 나쁜 짓을 한 사람은 오래오래 잊지 못하기 마련인데, 이들은 ‘몹쓸’ 원수나 ‘끔찍한’ 원수로 두고두고 되새기게 됩니다. ‘괘씸한’ 원수나 ‘막돼먹은’ 원수나 ‘버르장머리없는’ 원수로 언제까지나 미운털이 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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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한자 #우리말 #우리 말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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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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