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물도 안 나와 밭으로 산으로...
한 달안에 비 안 오면 여기서 못 산다"

[르포-목마른 태백①] 시내 개천도 바닥... 한숨 깊은 시민들

등록 2009.02.08 11:33수정 2009.02.08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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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6일 오후 찾아간 태백시 장성시장 큰길. 태백시청이 붙인 제한급수 안내문이 붙어 있다.

6일 오후 찾아간 태백시 장성시장 큰길. 태백시청이 붙인 제한급수 안내문이 붙어 있다. ⓒ 김환


"이거 뭐, 태백시민들 다 태백산 올라가서 천제단 모여 기우제라도 지내야지… 이래 갖고 어디 사람이 살 수나 있갔나?"

6일 오후 4시 강원도 태백시 장성동 화광아파트 관리사무소에 60~70대 노인 7명이 둘러앉았다. 오래돼 녹슨 난로가에 손을 올려놓고 불을 쬐던 최용식(72·남)씨가 낮은 탄식을 흘렸다. 최씨의 입에서는 "이게 바로 천재지변이지, 암, 천재지변"이라는 혼잣말도 나왔다.

최씨 옆에 앉거나 서서 실내를 서성이던 노인들도 머리를 끄덕였다. 최씨는 "엊그제 TV 보니까 태백시장이 한 달 정도만 더 비가 안 오면 정말 큰일이라데…. 광동댐 물이 바닥나면 어떻게 될지 정말 모르겠다"고 다시 한숨을 뱉었다.

옆자리에 앉은 김아무개(61·남)씨는 "내가 여기 산 지 60년 가까이 되는데도 이런 일은 생전 처음"이라며 "옛날에 상수도가 없을 때도 이런 일은 없었다"고 최씨의 말을 받아줬다. 다른 노인은 "여기 토박이들도 이런 일을 처음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발 650m 고원분지에 자리 잡아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고, '한국인의 젖줄'인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라는 자부심으로 살아 온 강원도 태백시가 말라 죽어가고 있다. 작년 9월부터 시작돼 유난히 길어지고 있는 '겨울 가뭄' 탓이다.

예전에도 물이 부족한 때는 있었지만, 이번만큼 혹독하지는 않았다. 태백시에 수돗물을 공급하던 30km 상류의 '광동댐'은 바싹 말라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속이 탄 태백시는 관내 지역을 8개로 나눠 하루 3시간씩 돌아가며 제한급수를 하고 있다. 태백시청에 따르면 22% 가량 남은 저수량은 한 달 안에 고갈된다고 한다. 태백시청 관계자는 "그 때는 정말 답이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급해진 박종기 태백시장은 지난 2일 '생면부지' 기업인들에게 "생수를 좀 보내달라"는 호소문을 띄웠다. 다행히 서울시를 비롯한 각 지자체와 기업에서 생수 지원에 나섰지만, 문자 그대로 '마른 땅에 물 붓기'다. 급기야 김진선 강원도지사까지 나서 태백과 인근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해 달라고 청원하고 있다.  


a  말라버린 장성천. 애초 수량도 많지 않았지만, 겨울 가뭄에 자갈 바닥을 그대로 드러내 더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보였다.

말라버린 장성천. 애초 수량도 많지 않았지만, 겨울 가뭄에 자갈 바닥을 그대로 드러내 더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보였다. ⓒ 김환


        
"물이 깔짝깔짝 나오니께 죽겠드래요, 새벽 6시에 일어나..."

태백의 'SOS' 소식을 접하고 찾아간 6일 오후, 시내에서 만난 시민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오랜 가뭄에 태백의 '돈줄'이 먼저 말랐다. 먹고, 마시고, 잠자는 장삿집은 그대로 직격탄을 맞았다. 사람들로 북적여야 할 시장골목에는 인적이 거의 없었다. 대신 태백시와 상수도사업본부에서 내건 현수막만 거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푸른 현수막에는 "제한급수가 실시됩니다, 오전 6시부터 9시까지…"라는 안내문이 써졌다. 아파트 담장과 가로수 사이 곳곳에서도 "물을 아껴쓰자"는 계도용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물이 깔짝깔짝 나오니께 죽겠드래요."

태백 장성시장 칼국수집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던 김미진(50·여)씨는 '가뭄' 소리에 "아이고~" 탄성을 먼저 뱉었다.

"내가 하는 일 중 절반이 설거지인데, 물이 부족해서 쓴 물을 재활용 하느라 불편함이 많아요. 설거지 시간도 2배는 더 걸리고…. 새벽 6시에 일어나 (집에) 물을 받고, 바로 식당으로 와서 또 물을 받아야 되요. 물 받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닌데."

김씨가 일하는 식당 입구에는 물통들이 얌전하게 줄을 서 있었다. 하소연을 하면서도, 김씨는 물통의 물을 조금씩 부어다가 설거지를 계속했다. 언제 손님이 올지 모르니, 물이 없어도 그릇은 깨끗해야 했다.

인근에서 세탁소를 하는 임미순(50·여)씨의 가게는 아예 개점휴업 중이었다. 바쁘게 돌아가야 할 세탁기는 멈춰 섰고, 한켠에는 세탁물만 가득 쌓였다.

"세탁물 중 20%가 물세탁인데, 지금은 할 수도 없어요. 물 나오는 때(오전 6시~9시)만 물세탁을 할 수 있죠. 물세탁 맡기면 하루 이상 더 걸리고…. 다른 업종들처럼 물을 받아놓고 할 일이 안되니 손님들한테 제일 미안하죠."

임씨는 현장을 보러 온 기자에게 "정말 기사를 꼭 좀 써 달라, 도와 달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장성동을 거쳐 흐르는 황지천은 자갈 뿐인 맨바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황지천변 인근 골목에서 만난 정아무개(58·남)씨는 "지금 눈꽃 축제가 한창인데, 예전에 사람들이 몰릴 때는 여기까지 와서 자고 가기도 했다"면서 "그런데 장성읍내에 있는 모텔에 물이 안 나온다, 물이 안 나오니까 씻을 수도 없고, 화장실도 못가고, 손님들이 오겠나? 지금 방이 다 텅텅 비어있다"고 전했다.

정씨는 또 "태백 가뭄이 계속되는데, 앞으로 태백이 물 부족 동네라고 해서, 이미지 나빠져 손님들 안 올지도 모른단 생각에 걱정"이라며 한탄했다.

"씻지를 못해 옛날에 사라진 '이'가 다시 생겼단다"

영업도 영업이지만, 물 부족 사태는 태백시민들의 건강과 생존권도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정씨는 "광동댐에서 나오는 물이 부족하다 보니 물에서 찌꺼기가 엄청 나온다"며 "시에서 미리 준설해서 아래 찌꺼기를 걷어내야 식수로 사용할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먹는 물이 제일 문젠데…. 시에서 주는 생수 갖고는, 이거 될 일이 아니래요. 근데 먹는 물도 물이지만, 태백지역에 산불이라도 나는 날에는 정말 큰일 납니다. 물이 없어서 산불 끄지도 못하고… 우리는 불이 정말 무서운 거예요."

화광아파트 주변에서 만난 시민 김영철(61·남)씨는 "태백시에서 며칠 만에 2ℓ짜리 물병을 2~3개씩 나눠주는데, 그거 5병 줘봐야 우리 집 세 식구 사흘을 못 간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먹는 물 이외에도 주민들에게 불안을 드리우는 것은 환경위생 문제였다. 김씨는 "태백 관광지 황지연못에 공중화장실이 있는데, 지금 거기 냄새가 나서 쓰지도 못 한다"며 "물이 안 나오니까 용변 보고 물을 부으라고 하는데, 가서 보면 부어서 내릴 물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장성시장 금은방에서 만난 홍영식(64·남)씨도 "먹는 물은 어떻게든 되는데, 화장실 갈 일이 제일 큰 문제"라고 말했다.

"처음 제한급수 됐을 때는 사람들이 다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죠. 그러다보니 화장실 물도 안 내려 가니까 인근 밭으로 산으로 가서 일을 보더라구… 빨래도 멀리까지 가서 하고, 그야말로 '빨래 원정'이지 뭐."

젊은 부부는 아이들 걱정을 먼저 했다. 황지동에서 식당을 하는 김을중(39)씨 부부는 "태백시 아이들이 씻지를 못해 60~70년대나 볼 법한 '이'가 생겼다는 얘기까지 떠돈다"고 전했다. 김씨 부부는 "시민들은 수인성 질병이 생길 것을 가장 걱정하고 있다"며 "우리 아이도 어린이집에서 씻지를 못해 손이 시커멓게 돼서 집에 오는데, 아이들 건강에 이상이 생길까봐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a  장성시장 한 식당 주방. 수돗물 공급 시간에 받아 놓은 물들로 가득하다.

장성시장 한 식당 주방. 수돗물 공급 시간에 받아 놓은 물들로 가득하다. ⓒ 김환


태백 '물 공급량' 평시 54%... 전국 지자체·기업 나섰다

'23년 만의 가뭄'에 시달리는 강원도 태백시의 물 공급량은 어느 정도일까. 6일 태백시에 따르면 평시 4만2000톤이 공급되던 용수가 현재는 2만2000여톤(54%) 밖에 되지 않고 있다. 수치로만 따지면 평시보다 절반 정도 모자란 셈이다.

가뭄이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지난 2일 박종기 태백시장은 전국 각지에 호소문을 보내 "시민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어 '불고체면'(체면을 돌보지 않음) 지원을 부탁드린다"며 병물(생수)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태백시의 긴급 구호요청에 전국 지자체와 기업들도 하나 둘 나서고 있다. 서울시는 6일 강북아리수정수센터에서 생산한 350㎖짜리 아리수 4만병을 태백시에 보냈다. 태백시와 같이 가뭄난을 겪고 있는 정선군에도 따로 2만병을 지원했다. 대전광역시도 2만병을 지원하기로 했다.

기업들도 발 벗고 나섰다. 한국도로공사 제천지사가 물병 1500병, 대한생명보험이 1만2000병(20톤)을 보내왔다. 주택공사도 생수 600박스를 준비했다. 하지만 아직 가뭄을 극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다.

태백시는 부족한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새로 관정을 개발하고 있다. 원동 1곳, 백산과 혈리 각각 2곳 등 모두 5곳의 관정을 뚫고 있다. 5곳이 모두 뚫리면 1990톤의 용수를 더 얻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외에도 기존 관정 8곳을 보수해 일일 490톤을 추가로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강원도 '특별재난지역' 지정 추진

광역단체도 함께 뛰고 있다. 김진선 강원도지사는 지난 6일 광동댐에서 강원남부권 자치단체장들과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중앙정부에 태백권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해 줄 것을 촉구했다.

한편 환경부에 따르면 극심한 겨울 가뭄으로 태백권 뿐만 아니라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등 전국 73개 시·군 마을 807곳에서 10만명의 주민이 먹을 물을 구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으로 나타났다. 기상청에 따르면 당분간 큰 비가 올 예보가 없어 겨울 가뭄에 이은 봄 가뭄도 심각한 상황으로 변할 것으로 보인다.

시민들 재난극복 의지... "하늘이 비를 안 내려주는데"

a  장성시장 내 미용실을 운영하는 안옥자씨.

장성시장 내 미용실을 운영하는 안옥자씨. ⓒ 김환

몇몇 시민들은 태백시청의 대응에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홍씨는 "태백시청이 몰라도 너무 몰랐는지, 어느 날 갑자기 비상급수 한다고 하더니, 또 며칠 있다가 제한급수 한다고 알려주더라"면서 "시청은 이런 일도 예상을 못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태백시청의 책임이 크다"면서 "만약 가뭄이 계속되면 고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물 전쟁이 날 것이고, 한달 안에 비가 안 오면 여기서 더는 못 산다"고 말했다.

장성동 주민 정씨도 "태백시 발표를 보니 누수율이 46%라고 하던데, 시민들 물세를 꼬박꼬박 받아먹으면서 절반 가까이 되는 물을 그냥 버렸단 말이냐"라고 흥분했다. 정씨는 또 "지금 태백시장이 부시장도 하고, 시 행정에 경험이 많은데 이를 그냥 보고도 지나쳤다는 게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태백 시민들은 대체로 지금의 재난을 함께 극복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늘이 비를 안 내려주는데, 누굴 탓하겠느냐"는 얘기다.

"30년 동안 태백에서 미용실을 해왔지만 이런 일은 정말 처음이예요. 물 하나 때문에 힘이 2배나 더 들고, 물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이제 알겠네요. 어차피 손님들도 태백 시민들이라 다 이해해줍니다. 이른 시일 내에 물이 콸콸 나왔으면 좋겠어요."

"1달 정도 시간급수를 받으니까 이제 적응 돼서 괜찮아요. 앞으로 물이 점점 줄어들 거라는데, 이만큼이라도 나와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고통은 있지만 서로 나눠야 잘 살지 않겠어요?"

장성동에서 미용실과 꽃집을 운영하는 안옥자(60)씨와 고재욱(66)씨가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고 전한 말이다.
#태백시 #가뭄 #태백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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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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