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표에 갇힌 한자말 (26) 미(美)

[우리 말에 마음쓰기 590] '혹한(酷寒)'과 '강추위'

등록 2009.03.26 13:41수정 2009.03.26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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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혹한(酷寒)

.. 지난 1월 20일은 9년 만의 혹한(酷寒)이라 해서 서울의 기온이 영하 一七도까지 내려갔다 ..  《박연구-어항 속의 도시》(문예출판사,1976) 90쪽


"9년 만의"는 "아홉 해 만에 찾아온"이나 "아홉 해 만에 맞이한"으로 다듬습니다. "서울의 기온이"는 "서울 기온이"나 "서울은 기온이"로 손보고, "영하 一七도"는 "영하 17도"로 손봅니다.

 ┌ 혹한(酷寒) : 몹시 심한 추위
 │   - 혹한으로 많은 등산객이 동상에 걸렸다 / 수십 연래의 혹한이라고들 했다
 │
 ├ 9년 만의 혹한(酷寒)이라
 │→ 아홉 해 만에 강추위라
 │→ 아홉 해 만에 찾아온 강추위라
 └ …

추위가 모질 때에는 '강추위'라고 말합니다. 말 그대로 "모진 추위"라고 해도 되고요. '혹한'으로만 적어서 못 알아들을까 걱정스럽다면, 묶음표를 치고 '酷寒'을 써 주기보다는, '강추위'로 고쳐쓰거나, "모진 추위"라 하면 됩니다.

또는, "대단한 추위"나 "엄청난 추위"라고 적어 봅니다. "아주 추운 날씨"라 하거나 "매우 추운 날씨"라 해도 됩니다. "어마어마한 추위"라 하거나 "어마어마하게 추우 날씨"라 해도 어울립니다. "살을 에는 추위"나 "귀가 떨어질 듯한 추위"라 해도 되고요.

 ┌ 혹한으로 → 강추위로 / 추운 날씨로
 └ 수십 연래의 혹한이라고들 → 수십 해 만에 찾아온 강추위라고들


그러고 보니, 우리들은 추운 날씨를 '춥다'라 하지 못하고 '혹한'이라는 한자 옷을 입히듯, 더운 날씨를 '덥다'라 하지 못하고 '혹서(酷暑)'라는 한자 옷을 입히고 있습니다. 추우니 춥다 하고 더우니 덥다 할 뿐이지만,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글을 쓰지 못합니다.

날씨를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봄이 오건 여름이 오건 가을이 오건 겨울이 오건, 이러한 날씨를 날씨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철을 철대로 헤아리지 못하며 기운과 흐름을 기운과 흐름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철을 잊은 이 나라에서는 철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철을 잊어버리면서 철다움이 사그라드는 말입니다. 철다움이 사그라들면서 우리 말다운 맛과 멋 또한 차츰차츰 사라집니다. 틀림없이 우리 말이지만 어느 대목에서 우리 말이라 할 수 있는지 어려워집니다.

ㄴ. 미(美)

.. 이 경우에는 학생들이 사용자들의 미에 대한 개념을 파악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  《빅터 파파넥/한도룡,이해묵 옮김-인간과 디자인》(미진사,1986) 51쪽

"이 경우(境遇)에는"은 '이때에는'으로 손봅니다. '파악(把握)하는'은 '헤아리는'으로 손보고요. "실패(失敗)한 것이다"는 "실패했다"로 다듬고, 앞말과 묶어 "헤아리지 못했다"나 "살피지 못했다"나 "알아내지 못했다"로 고쳐써도 됩니다.

 ┌ 미(美)
 │  (1) 눈 따위의 감각 기관을 통하여 인간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아름다움
 │   - 자연의 미 / 미를 추구하다
 │  (2) '아름다움'의 뜻을 나타내는 말
 │   - 미소년 / 숭고미 / 우아미
 │  (3) 성적이나 등급을 '수, 우, 미, 양, 가'의 다섯 단계로 나눌 때 셋째 단계
 │   - 국어는 수를 받았는데 미술은 미를 받았다
 │  (4) '미국'을 이르는 말
 │
 ├ 미에 대한 개념을
 │→ 아름다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 무엇을 아름다움으로 느끼는지
 │→ 무엇을 아름답다고 보는지
 └ …

보기글은 앞뒷말을 묶어 통째로 다듬어 봅니다. 먼저, "사용자들이 어디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지 헤아리지 못했다"처럼. 아니면, "사용자들한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다"처럼.

 ┌ 자연의 미 → 자연에 깃든 아름다움 /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 미를 추구하다 → 아름다움을 찾다 / 아름다움을 찾아나서다

그나저나, '아름다움'이 아닌 '미'를 쓰고 묶음표로 '美'를 넣어야 한결 알아듣기에 좋을까 궁금합니다. 우리들은 이 나라 아이들한테 '아름다움' 같은 낱말은 안 가르치고, '미'라는 한자말과 '美'라는 한자만 가르치려 하고 있지는 않나 궁금합니다. 왜 '아름다움'을 말하지 못하고 '미'나 '美'만 찾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아름다움'은 글자수가 길어서? 그러면 글자수가 짧은 다른 토박이말을 알뜰살뜰 살려쓰지 않는 까닭은?

 ┌ 미소년 → 예쁜 소년 / 아름다운 소년
 ├ 숭고미 → 거룩한 아름다운 / 거룩한 멋
 └ 우아미 → 아름다움

국어사전 보기글을 보면 '우아(優雅)미(美)'라는 낱말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아'란 '아름다움'을 한자말로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이리하여 '우아 = 아름다움'이요 '미 = 아름다움'이기 때문에, '우아미'라고 적는 낱말은 '아름다움아름다움'이 되고 맙니다.

이런 보기글을 실은 국어학자는 '우아'와 '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얼마쯤 헤아렸을까요. 이런 낱말을 버젓이 쓰는 우리들은 '우아'와 '미'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어느 만큼 생각하고 있을까요.

껍데기는 한글이지만 속은 우리 말이 아니기 일쑤입니다. 겉보기로는 한국사람이지만 속은 한국사람이 아니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겉보기까지 한국사람이 아니 되고 있으며, 껍데기마저 한글이 아니 되고 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던 말과 사람이, 겉과 속이 하나로 되고 있습니다만, 이 하나됨이 어쩐지 하나도 반갑지 않습니다. 달갑지 못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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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음표 한자말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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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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