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마디 한자말 털기 (68) 족히足

[우리 말에 마음쓰기 638] '족히 15년 만에', '족히 되었을' 다듬기

등록 2009.05.14 13:57수정 2009.05.1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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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족히 15년 만에

 

.. 족히 15년 만에 손글씨 편지를 썼다. 컴퓨터로 편지글을 만든 다음, 화면을 베껴 적는 방식으로. 손가락이 많이 아팠다. 퇴화했다. 수신인은 권정생 선생님. 부칠지, 만나 뵐지, 만나 뵙고 편지를 전해 드릴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  〈김규항 블로그 2004.7.14〉

 

 손으로 쓴 글씨이니 '손글씨'입니다. '퇴화(退化)했다'는 '굳었다'나 '말을 잘 안 들었다'로 손보고, '수신인(受信人)'은 '받는 사람'으로 손질합니다. '전(傳)해'는 '건네'로 고칩니다. "아직 정(定)하지 못했다"는 "아직 모른다"나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로 손볼 수 있습니다.

 

 ┌ 족하다(足-) : 수량이나 정도 따위가 넉넉하다

 │   - 이 정도면 한 달 용돈으로 족하다 / 식사는 이것으로 족합니다

 │     서너 권 분량은 족히 될 것입니다 / 열흘은 족히 걸릴 테지

 │

 ├ 족히 15년 만에

 │→ 넉넉히 열다섯 해 만에

 │→ 넉넉잡아 열다섯 해 만에

 │→ 자그마치 열다섯 해 만에

 │→ 거의 열다섯 해 만에

 └ …

 

 그저 '넉넉하다'를 뜻할 뿐인 외마디 한자말 '足하다'입니다. 생각해 보면, '넉넉하다'를 가리키는 또다른 낱말로 이런 말을 쓰면 더 좋지 않느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넉넉하다' 한 마디로는 넉넉하지 않아서 꼭 '족하다'를 받아들여서 써야 할까요. 우리로서는 '넉넉하다'에서 가지를 치는 '너끈하다'나 '널널하다'나 '넉넉잡아'를 함께 쓸 수 없을까요.

 

 ┌ 한 달 용돈으로 족하다 → 한 달 쓸돈으로 넉넉하다

 ├ 식사는 이것으로 족합니다 → 밥은 이쯤으로 넉넉합니다 / 밥은 이쯤이면 됩니다

 ├ 서너 권 분량은 족히 될 것입니다

 │→ 서너 권은 넉넉히 됩니다

 │→ 서너 권쯤 넉넉히 됩니다

 └ 열흘은 족히 → 열흘은 넉넉히

 

 토박이말만으로는 우리 생각과 뜻과 마음을 넉넉히 나눌 수 없다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한자말을 들여오고 미국과 유럽에서 서양말을 들여와야 비로소 우리 생각과 뜻과 마음을 너끈히 나눌 수 있다고 여기는지 모릅니다.

 

 우리한테는 우리 힘과 슬기로 우리 새말을 빚어낼 재주가 없어, 언제나 이웃나라에서 바깥말을 들여와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일구고 가꾸기보다는 돈을 주고 사오든 거저로 얻어 오든 바깥에서 들여오는 낱말이 훨씬 반갑고 즐겁고 고맙고 알맞고 좋다고 하는지 모릅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말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잘 쓰는 말이 아닌 잘못 쓰는 말이라 하여도 사람들은 잘 새겨 주면서 헤아리기 때문입니다. 사이사이 영어를 끼워넣든 외마디 한자말을 끼워넣든 깊이 생각하지 않고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은 그예 옛말입니다. 같은 말이면 한결 살갑고 손쉽고 맑고 기쁘게 쓸 말을 찾겠다는 매무새는 그저 머나먼 꿈나라 같은 소리입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우리 마음을 살찌울 길을 놓치고 있어도 놓치는 줄 깨닫지 않습니다.

 

 

ㄴ. 족히 큰 거실 넓이는 됐다

 

.. 족히 큰 거실 넓이는 됐다 ..  《야마오 산세이/이반 옮김-여기에 사는 즐거움》(도솔,2002) 178쪽

 

 '규모(規模)'라는 말을 넣어 "큰 거실 규모"처럼 적는 분도 있으나, "큰 거실 넓이"라고 적은 대목이 반갑습니다. 다만, '거실(居室)'은 '마루'로 고쳐쓰면 한결 낫습니다.

 

 ┌ 족히 큰 거실 넓이는 됐다

 │

 │→ 넉넉히 큰 마루 넓이는 됐다

 │→ 아마도 큰 마루 넓이는 됐다

 │→ 거의 큰 마루 넓이는 됐다

 │→ 얼추 큰 마루 넓이는 됐다

 └ …

 

 '잘은 모르지만' 큰 마루 만한 넓이라고 가리키는 보기글입니다. 잘은 모르니까 '어림잡아' 그만큼 된다고 말하는 셈일 테지요. 어림잡는 크기이니 '얼추' 그만큼 된다거나 '거의' 그만큼 된다 할 수 있고요.

 

 또는 '넉넉히'나 '넉넉잡아'나 '너끈히' 같은 말을 넣어서 이야기를 해도 괜찮습니다. "아마 큰 마루 넓이는 됐다"나 "그러고 보면 큰 마루 넓이는 됐다"로 적어도 잘 어울립니다.

 

 곰곰이 생각하면서 알맞게 넣을 낱말을 찾아 줍니다. 차근차근 돌아보면서 슬기롭게 넣을 말투와 말틀과 말씨를 헤아립니다.

 

 

ㄷ.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 식구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면 사십 명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  《사티쉬 쿠마르/서계인 옮김-사티쉬 쿠마르》(한민사,1997) 16쪽

 

 "사십(四十) 명(名)"은 "마흔 사람"이나 "마흔"으로 손질합니다. "되었을 것입니다"는 "되었습니다"나 "되지 싶었습니다"로 다듬습니다.

 

 ┌ 사십 명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

 │→ 거의 마흔 사람이 되었습니다

 │→ 거의 마흔 사람이 되지 싶었습니다

 │→ 마흔 사람쯤 되었습니다

 │→ 얼추 마흔 사람쯤 되었습니다

 └ …

 

 숫자를 어림으로 세는 자리에서 '족히'라는 말을 쓰는 분이 제법 있습니다. '거의'라는 말은 드문드문 듣습니다. '얼추'라는 말은 듣기가 꽤나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한'을 넣어 "한 마흔 사람쯤 모입니다"처럼 쓰는 분은 그럭저럭 있어요.

 

 보기글에서는 "넉넉히 마흔 사람쯤"으로 적어도 됩니다. "대충 마흔 사람쯤"으로 적어도 되고, "그럭저럭 마흔 사람쯤"으로 적어도 어울립니다. 말차례를 살짝 바꾸어 '아마'나 '아무래도'나 '어쩌면'를 앞에 놓고 "식구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면 아마 마흔은 되었습니다"처럼 적어도 괜찮습니다.

 

 ┌ 식구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면 마흔쯤은 되었습니다

 ├ 식구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면 마흔쯤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식구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면 마흔 남짓 되었습니다

 └ …

 

 글흐름과 글뜻과 글느낌을 헤아리면서 사람마다 다 다르게 나타낼 말을 곱씹어 봅니다. 이때에는 이렇게 쓰고 저때에는 저렇게 쓸 알맞고 올바른 말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 깜냥을 빛내고 우리 슬기를 북돋울 말 한 마디를 가만히 그려 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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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4 13:57ⓒ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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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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