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흙 묻히던 선생님... 그가 그립습니다

[서평] 탁동철 선생님과 아이들의 산골학교 이야기 <달려라, 탁샘>

등록 2012.01.16 17:20수정 2012.01.1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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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달려라, 탁샘> 책표지

<달려라, 탁샘> 책표지 ⓒ 양철북

전에는 분교였다가 지금은 폐교된 백련초등학교. 그곳은 어린 시절 내가 배우고 자란 초등학교였다. 지금은 학교 운동장도 좁디좁은 논밭과 같지만 그때는 월드컵 운동장만큼이나 크게 느껴졌다. 체육대회 때가 되면 왜 그렇게 운동장이 길게 느껴졌는지, 이어달리기를 해도 좀체 끝나지 않았고, 기마전을 하면 운동장은 마치 만주벌판처럼 드넓었다.

그곳에서 함께 배운 아이들 이름이 떠오른다. 기현이, 상운이, 행용이, 성수, 길배, 인갑이, 치권이. 또 정순이, 영금이. 다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모두들 그 운동장에서 배우고 자랐다. 학교 운동장 아래는 논두렁길이 나 있었고, 학교 옆 동산에는 대낮에도 무서운 묘지와 비석들이 서 있었다.


백련초등학교에서 잊지 못할 게 있다면 우리들을 동무처럼 대해 준 선생님들이지 않을까? 그 중에서도 내게 또렷하게 기억 속에 남는 선생님 한 분이 있다. 문성화 선생님이 바로 그 분이다. 그분은 무척이나 잘 생겼다. 미남형이라 여학생들에게는 인기 '짱'이었다. 나도 그분이 잘 생겨 내심 질투심도 났지만, 내 노래 솜씨 하나만큼은 인정해 주셨다. 더욱이 꾀꼬리처럼 목소리도 좋고, 얼굴도 예쁜 혜련이 누나와 함께 학교를 대표해서 듀엣으로 졸업식을 부르게 한 건 더 가슴에 남는 추억이다.

탁동철 선생님과 아이들의 산골학교 이야기 묶음집 <달려라, 탁샘>도 어릴적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책이다. 그 선생님은 아버지가 졸업한 학교를 다녔고, 이제는 그 모교에서 아들딸들과 함께 공부하고 씨름하고, 산과 들판을 누비고, 운동장 구석에 작은 논도 만들어 모도 심고, 심지어 닭장도 짓고 토끼도 키우며 아이들과 동무가 돼 살고 있다.

"손바닥만한 논에서 하는 모심기지만 흉내는 다 낸다. 작대기 두 개에 끈을 묶어 만든 못줄을 두 아이가 양쪽에서 잡아 줄을 맞추고, 다른 아이들은 허리 숙여 모를 심었다. 교장 선생님이 보시고는 '거 되지도 않을 걸 뭣하러 하냐'고 했다. '안 돼도 좋아요. 살아 있는 모를 구경만 해도 그게 어디예요.' 5학년 아름이는 벌써 '선생님, 우리 나중에 이걸로 떡해 먹어요'한다. 논두렁을 만들고 콩도 심었다. 일기장을 보니 모를 심는 날이 5월 31일이었다." (본문 67쪽에서)

손 모내기가 남겨 놓은 추억 한 조각

농촌에서 자란 아이들은 알고 있다. 어린 시절에 가장 바쁠 때가 모내기할 때라는 것 말이다. 경운기가 없던 시절, 나도 손 모내기를 직접 했다. 그때만 되면 아이들이 학교를 빼먹고 부모님들을 도와 직접 모내기를 도와야만 했다. 물론 힘이야 들지만 학교를 빼먹는다는 건 그 시절엔 재미난 일이었다. 더욱이 배불리 먹었던 모내기 밥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그런데 탁동철 선생님은 거기에다 한 술 더 뜨는 것 같다. 이 책을 보니 모내기할 때 학교에 나오지 않는 녀석이 있으면,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오후엔 다른 아이들과 함께 그 녀석의 논으로 모내기를 직접 하러 가니 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줄을 띄우고 한 줄에 한 뼘씩 모를 심는 모습은 흡사 이웃집 아저씨의 품앗이 하는 모습일 터다. 물론 선생님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과 정겨운 동무로 어울린다.

탁동철 선생님이 머문 학교들은 명문이거나 도심에 있는 초등학교가 아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흔한 시골 초등학교다. 가난하고, 배운 게 덜하고, 자주 싸움을 하는 그런 아이들이 자라는 학교다. 탁동철 선생님은 그 속에서 공부하다 삐친 아이와 싸우기도 하고, 연극을 해서 아이들의 잘못을 돌이켜보게 하고, 또 학교 급식 문제에 관해서는 아이들과 함께 토론하며 길을 찾기도 한다.


요즘은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하나만 낳아서 기른다. 교육비가 그만큼 만만치 않은 탓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골도 그런 흐름을 타고 있으니, 그 많던 시골 학교 역시 모두 폐교가 될지 모른다. 이 책에서 <닭장>이란 시를 쓴 차정현이랑 <메뚜기 선수>를 쓴 다솔이, <거름 나르는 아저씨>를 쓴 유정이, <잡탕 떡볶이>를 쓴 희영이도 먼 훗날 자기들이 배우고 자란 '오색초등학교' '공수전분교' 그리고 '상평초등학교'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어쩌면 내가 어릴 적 배우고 자랐던 백련초등학교처럼 녀석들도 비슷한 감회를 떠올리지 않을까? 왜 그 시절에 그토록 코피 터지며 친구들과 싸워댔는지, 왜 그토록 여학생들을 못살게 굴었는지, 왜 그토록 친구 물건을 탐하며 살았는지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함께 뒹굴며 자기 삶을 나누어 준 멋진 '탁동철 선생님'을 사무치도록 떠올리지 않을까?

달려라, 탁샘 - 탁동철 선생과 아이들의 산골 학교 이야기

탁동철 지음,
양철북, 2012


#탁동철 선생님 #문성화 선생님 #백련초등학교 #오색초등학교 #공수전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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