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이무영
이화영
이무영의 친일행각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와 친일인명사전에 낱낱이 드러나 있다.
진상보고서에는 48쪽, 친일인명사전에는 7쪽에 걸쳐 이무영의 친일활동상과 친일문학의 구체적 내용이 적시돼 있다.
1908년 음성에서 태어난 이무영은 1920년까지 충주에서 자라며 학교를 다닌 뒤 일본으로 건너가 가토 다케오로부터 문학수업을 받는다.
1929년 귀국 후 교사, 출판사 직원을 거쳐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며 소설가로 활동했다. 동아일보를 그만둔 1939년 경기도 시흥에 정착한 뒤에는 농민문학 창작에 열중했다.
그의 작품에 친일이란 먹구름이 드리운 건 이때부터였다. 그는 1942년 조선총독부 관변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소설·희곡회 상임간사를 맡았으며 같은 해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일본어 신문 '부산일보'에 일문 장편소설 '청기와집'을 연재했다.
이 작품은 조선인 작가가 일본어로 쓴 최초의 연재소설이다.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홍콩을 점령할 때까지를 시대배경으로 하는데 청기와집이라 불리는 양반 권씨 집안은 '조선'을 상징한다.
청기와집의 가장 권 대감은 '사대주의 구사상', 아들 권수봉은 '영미 제일주의 사상', 손자 권인철은 '일본의 신사상'을 대변한다. 권 대감이 세상을 뜨고 수봉도 마음을 바꾸어 조선신궁을 참배하게 됐으며, 인철은 젊은 일본인으로서 개간사업에 몰두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무영은 같은 시기 간도의 조선인 개척촌을 돌아보고 온 뒤 좌담회와 집필활동 등을 통해 "일본의 분촌이 조선에서도 시행됐으면 좋겠다"는 주장을 펼친다. 친일인명사전은 이에 대해 "일제가 조선에서 행한 정책적 농업식민을 조선인이 만주에서 재현하기를 기대한 아류제국주의"라고 비난했다.
해방 후 대학에 출강하다 6·25 전쟁 당시 군에 입대한 이무영은 1955년 국방부 정훈국장(해군대령)으로 예편한 후 1960년 작고 전까지 친일파 청산을 폄훼하거나 친일파를 시대의 희생양으로 묘사한 다수의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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