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멸망'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리뷰] 권력에 대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연극 <멸>

등록 2012.11.07 19:22수정 2012.11.07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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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포스터
공연포스터국립극단

임기 말이 되면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일이 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일부 측근들이 각종 비리로 검찰에 소환된다. 나라를 바꿔보겠다던 대통령도 "제 주머니만 채운다"는 비판을 받긴 마찬가지다. 연이은 실책으로 신뢰를 받지 못한 대통령은 절름발이 오리에 빗댄 '레임덕'이란 오명을 쓴다. 정권이 쇠락하는 데는 그만큼 '보편성'이 있다는 얘기다. 이 보편성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권력자의 통제되지 못한 욕망'이다.

국립극단의 삼국유사 프로젝트 네 번째 작품인 연극 <멸_滅>(박상현 연출, 김태형 작)이 주목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수천 년을 거슬러간 역사 속에서도 이 보편성은 그대로 적용됐다. 과거와 현재를 엮어가다 보면 이는 껍데기만 바꾼 채 그 틀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를 보여주기 위해 '신라 말기의 역사'를 현재로 가져왔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는 말을 증명이나 하듯, 고려 때 서술된 <삼국유사>에서 신라의 최후를 담은 부분은 고작 대여섯 쪽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 허술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 '상상력'으로 과거를 재구성해 낸다.

 김부 역을 맡은 정보석 배우와 김일 역의 이상홍(왼쪽), 김굉 역의 김민하 배우
김부 역을 맡은 정보석 배우와 김일 역의 이상홍(왼쪽), 김굉 역의 김민하 배우국립극단

극은 김부(정보석)가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던 경애왕(서동갑)을 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김부는 고려와 후백제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런 그에게 고려 태조의 딸 낙랑(최지영)은 유일한 안식처다. 김부는 혼란에 빠진 나라를 뒤로 한 채 낙랑에게 빠져들고, 청혼까지 결심한다. 여기에는 고려의 전략적 의도도 깔려 있었다. 낙랑은 이 결혼을 통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신라의 항서를 받아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러자 이를 눈치챈 죽방왕후(우미화)는 다급함을 느낀다. 왕후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반감이 있는 태자 김일(이상홍)에게 왕좌에 올라 신라를 지키라고 회유한다. '마의태자'로도 알려진 김일은 3년 전 궁을 떠나 소식을 끊었다가 청년구국단의 일원이 되어 얼마 전 돌아왔다. 극은 김부와 김일이 나라의 운명을 두고 사사건건 대치하면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아들인 김일이 권력욕만 드러내는 자신을 몰아세우자 김부는 "정의? 진실? 그런 것들은 다 집어던져버려! 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는 건 욕망이야"라고 일축한다. 그러나 그런 아들도 아버지의 약혼녀를 탐하는 등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긴 마찬가지다. 결국 마의태자는 후계자를 꿈꾸던 동생에 의해 살해되고, 김부는 무너져 가는 신라에 연연하기보다 고려에 항복해 편안히 안주하는 길을 택한다.

연극은 역사적 기록을 비틀어 김부가 나라를 포기한 건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한 자기 욕망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신라 시대의 색채를 빼고, 무대를 현대적인 의상과 소품으로 채움으로써 권력에 대한 욕망은 과거가 아닌 현재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특히 가죽 재킷을 입은 왕이나 금색 귀걸이를 한 왕자가 본색을 숨기지 않고 욕망을 날 것으로 드러내는 장면은 마피아 조직을 떠올리게 한다.


김부 역할을 맡은 정보석의 열연으로 한층 더 완성도를 높인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2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그리고 진짜 여운이 남는 순간은 커튼콜이 끝난 후, 어둠이 내린 무대에 단 한 글자가 붉게 빛날 때다. 멸(滅). 그때야 우리는 왜 현재의 답을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연극 멸 = 오는 18일까지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평일 오후 8시 / 토, 일 오후 3시 / 일반 3만 원 / 청소년(24세까지) 2만 원 / 소년소녀(19세까지) 1만 원. 공연문의 1688-5966
#연극 멸 #정보석 #신라 #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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