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고의 명탐정에게 찾아온 마지막 사건

[리뷰] 요코미조 세이시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등록 2013.04.01 13:41수정 2013.04.0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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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겉표지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겉표지 ⓒ 시공사

개인적으로 추리소설은 좋아하지만 추리만화는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냥 만화'는 그동안 꽤 많이 보아왔는데 유독 추리만화에만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와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 이유는 아마도 '만화로는 추리소설 특유의 분위기를 이끌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이상한 선입견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또는 고전추리소설의 명탐정들이 늘어놓는 엄청난 장광설(특히 파일로 반스)을 만화로 표현하기에는 어렵겠다고 짐작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추리소설만 읽더라도 시간이 부족한데 만화까지 보기에는 벅차다는 생각도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예전에 '소년탐정 김전일' 시리즈가 유행했을 때에도 이 시리즈를 한편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 이름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김전일이 한때 그만큼 유명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소년탐정 김전일의 할아버지

시리즈 내에서 김전일(긴다이치 하지메)은 긴다이치 코스케의 손자로 묘사된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일본작가 요코미조 세이시가 창조한 탐정이다. 재미있는 것은 긴다이치 코스케는 작품 속에서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결혼하지 않고도 자식과 손자를 만들 수는 있겠지만, 이런 생각은 명탐정에 대한 불경죄일 테니 접어두도록 하자.

대부분의 명탐정이 그렇듯이 긴다이치 코스케도 좀 특별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 특별한 면은 긴다이치 코스케를 좀 초라해 보이게 만든다. 그는 평균보다 약간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고 주름투성이의 옷을 입고 다닌다. 구겨진 모자 속의 부스스한 더벅머리를 긁을 때마다 비듬이 떨어진다. 외모만 봐서는 도저히 명탐정이라고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어수룩해 보이는 외모안에 감춰진 그의 두뇌는 충분히 기름을 먹인 기계처럼 정교하게 돌아간다. 20대 중반에 <혼진 살인사건>을 통해서 데뷔한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후 수십 년 동안 수십 편의 작품 속에서 활약하며 수많은 어려운 사건들을 해결해왔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다. 나이를 먹으면 육체의 기력이 약해지고 정신력이나 추리력도 예전같지 못할 것이다. 원래 초라했던 사람은 더욱 초라해 보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자. 그것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탐정도 시간이 흐르면 무대에서 퇴장해야 한다는 단순한 진실일 뿐이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1978년 작품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이하 <병원 고개>)은 바로 긴다이치 코스케의 마지막 사건을 다루고 있다. 첫 작품인 <혼진 살인사건>이 발표된 것이 1946년이니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작가는 이 시리즈를 이어온 것이다.

폐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병원 고개>는 어쩐지 제목에서부터 좀 으스스한 분위기가 풍긴다. 마지막 사건답게 긴다이치 코스케는 작품 속에서 사건을 해결하는데 무려 20여 년을 소모한다. 작품의 시작은 1953년 가을, 사진관을 운영하는 나오키치는 미모의 젊은 여인으로부터 기묘한 부탁을 받는다. 한 여자가 목을 매어 자살한 후 폐가가 된 '병원 고개 집'에서 결혼기념사진을 찍어달라는 것이다.

나오키치는 이 부탁을 받아들이고 현장에 도착하지만 분위기는 묘하기만 하다. 신랑은 굉장히 불량스러워 보이고 미모의 신부는 마약에라도 취했는지 반쯤 정신이 나간 분위기다. 나오키치는 이 결혼이 정상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한 조사를 위해서 긴다이치 코스케를 찾아가지만, 그 이후에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이 사건은 발생 얼마후에 찜찜한 형태로 마무리되지만 그 진상은 20년 후인 1973년에 가서야 밝혀지고 만다. 긴다이치 코스케도 자신의 수사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할 강적을 막판에 가서야 만난 셈이다.

오래된 시리즈의 주인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늘 안타까운 일이다. 그 인물이 긴다이치 코스케 같은 명탐정이라면 더더욱. 긴다이치 코스케는 늘 사건을 하나 해결하면 그 뒤에 구제할 길 없는 고독감에 시달렸다. <병원 고개>에서는 엄청난 강적을 상대했으니 그 이후에 느낀 고독감도 그만큼 커지지 않았을까.

<병원 고개>의 마지막 장면에서 긴다이치 코스케는 미국으로 훌쩍 떠난다. 노병은 죽지않고 사라져 가는 법.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살인자들을 상대해왔고 이제 나이가 60을 넘었으니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긴다이치 코스케가 그 이후에 일본으로 돌아왔다는 소문도 있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미국에서건 일본에서건, 긴다이치 코스케가 자신이 해결한 사건들을 회상하면서 평온하고 행복한 말년을 보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병원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전 2권.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 정명원 옮김. 시공사 펴냄.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1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시공사, 2013


#긴다이치 코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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